• 【현종호 연재소설 (제5-2회)】 노량에 피는 꽃
    • 소설가 현종호
      소설가 현종호


      《백의종군의 길 위에서 – 이순신, 다시 일어나다》


        계사년(1593년) 5월 5일, 맑음.
        선전관 이순일이 경상도에서 돌아왔기에 아침 식사를 함께했다. 명나라에서 나에게 ‘은청금자광록대부(垠靑金紫光祿大夫)’라는 직품(職品)을 주었다고 하는데, 아마도 그가 잘못 들었을 가능성이 크다. 저녁에 우수사와 군관들과 같이 술을 마시며 이야기하고, 군사들이 편을 갈라 활쏘기 시합을 하게 하였다.

        “청이…… 하나 있소이다. 위관…….”
        고개를 푹 떨군 채로 체념한 듯 이순신이 겨우 말을 흘리자 시종 그를 추궁하던 위관이 갑자기 안색을 바꾸며 사뭇 살가운 어조로 되묻는 것이었다.
        “청이라고? 청이라니?! 무슨 청인데……?! 대체 무슨 청……!?”
        “…….”
        “진작에 그랬어야지. 이제라도 생각을 고쳐먹길 정말 잘했네. 어서 말해보시게. 길삼봉의 사주를 받고 정여립의 꼬임에 넘어가 자넨 어떤 놈들과 어디서, 도대체 어떤 역모를 도모했던 건가……?”
        “…….”
        “어서 말해보시게. 어서!”
        인두질을 멈추고 위관이 마른침을 연달아 삼키며 부드럽게 다시 그를 다그쳤다. 낯빛을 바꿔 사뭇 살갑게 물어오는 위관을 곁눈질로 흘금거리면서 이순신은 한 차례 더 몸을 부르르 뒤틀었다. 그리고 토했다. 며칠을 쫄쫄 굶었던 탓에 목구멍 밖으론 그저 신물만 넘어왔다. 몰인정한 형리들이 인두로 그의 사타구니와 허벅지를 지져댈 때, 살이 타들어 가던 냄새를 다시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그는 토악질이 절로 나온 것이었다.
        “배…… 배가 몹시 아프고, 내…… 내가…… 지금 서…… 서……설사가…….”
        “……?”
        “내가…… 그만…… 뒤…… 뒤…… 뒷간이…… 아주 급해서…….”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대역죄인 이순신은 기진해서 쓰러졌다. 그 후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이순신도 정확히 기억해낼 수 없었다.


        허준 어의께서 진통제 온백원을 어쨌든 다시 보내주시다니 그는 감사한 마음과 불안감을 떨쳐낼 길이 없었다. 깊어가는 밤에도 비는 억수로 퍼부었다. 빗소리에 묻히는가 싶으면 적들이 바다를 휘저으며 몰려오는 환청은 다시 해풍에 실려 그의 귓전을 지겹도록 찔러댔다. 임금의 용안이 그의 눈앞을 퍼뜩 스쳤다. 졸지에 강해진 신하 이순신이 죽어서 가마니에 덮여 시구문 밖으로 실려 나가길 임금은 간절히 원했을 것이었다. 임금이 크게 노하여 그의 방면을 위해 탄원하는 종사관 정경달을 호되게 꾸짖고 있었다.
        “통제사를 죽이시면 전하께선 사직을 잃을 것입니다, 전하…….”
        “너희 놈들이 남쪽 바다에서 이 나라 종묘와 사직을 정말 걱정했단 말이냐……!?”
        “…….”
        “…….”


        재상 류성룡이 따라주는 족족 이순신은 술을 사양 않고 연거푸 단숨에 들이켰다. 전란 중에도 영의정이자 도체찰사로 활약한 류성룡은 왜(倭)가 전시재상(戰時在上)으로서 무지 경계하던 조선의 지략가였다. 숨죽여 속으로 떨구는 눈물이 이순신의 술잔에 고스란히 녹아들어 있었다. 이어지게 될 의금부의 추국을 염려해서인지 영의정 류성룡은 속내를 드러내지 않으려는 듯 그보다 술을 덜 마시고 말을 더 아꼈다. 둘은 아득한 나랏일을 심각하게 이야기하며 밤이 새도록 술잔을 주고받았다. 새벽에 닭이 울고 나서야 둘은 헤어졌다.

        이튿날, 대역죄인 이순신은 아침에 출발하여 조선의 얼음저장고 서빙고(西氷庫) 나루에서 배를 타고 한강을 건넜다. 빗줄기가 점점 굵어지는가 싶더니 비가 곧 퍼붓듯이 쏟아졌다. 엎어지고 자빠지며 길을 가는 동안 비통한 마음과 억울함을 그는 금할 길이 없었다.
        한참 뒤에 비가 그쳤다. 형리들이 여드레 동안 퍼부어댄 그 모진 고문 때문이었을까, 가만히 있어도 머리가 어질어질하고 까닭 모를 환청이 시시때때로 그의 귓전을 아프게 찔러댔다. 이순신은 관악산 여우고개를 겨우 넘었다. 과천 인덕원에 들러서 지치고 비루먹은 짐말을 쉬게 하였다. 과천루에 누워 한동안 상념에 잠겼다가 다시 길을 떠나 저녁 무렵이 돼서야 수원으로 가 이름도 모르는 경기 관찰사의 병사 집으로 가서 잤다. 신복룡이 우연히 들렀다가 중죄인 이순신의 행색을 보고 술을 가지고 와서 위로해 주었다. 수원 부사 유영건이 찾아와서 이순신에게 또 깍듯이 인사하였다.
        비록 죄인의 몸으로 백의종군하는 신세였지만 백성들의 신망이 여전히 두터웠던 만큼 이순신은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존재였다. 중죄인 이순신이 가는 곳마다 헤아릴 수 없이 백성들이 모여들어 길을 막고 주저앉아 통곡하였고, 현감들이 융숭한 대접을 하였으며, 아전들이 늘 술을 가지고 나타났다. 쓰린 속과 착잡한 마음을 달래는 데 술만 한 게 없었다.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하는 그들의 그 마음을 또한 사양할 수 없어 그들과 밤새 술을 마셔대니 의금부 형틀에 으스러지던 그의 몸은 걷잡을 수 없이 다시 무너져내렸고, 속은 속수무책으로 문드러졌다. 각 고을의 현감과 아전들 대개가 초계를 향해 먼 길을 가는 이순신을 극진히 대접하였다.

        온종일 걸어오느라 지칠 대로 지친 말을 보적사 해탈의 문 앞 소나무에 묶어두고 걸어서 양산봉에 올라 한눈에 굽어보는 경치는 문자의 형용을 거부할 만큼 수려했다. 황구지천이 햇빛 곱게 스민 청산(靑山)을 끼고 아득히 돌아나간 풍광에 그의 두 눈이 몹시 호강했다. 형언할 수 없이 수려한 풍경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동안 그는 그러나 다시 서러워졌다. 저 멀리 배추 줄기처럼 신비롭게 뻗어 나간 태백산맥의 능선들이 임진년 그날의 바다처럼 일렁이고 출렁거렸다. 한동안 잠잠하던 금부도사 이사빈이 감흥에 젖어 대머리 모양을 한 ‘독산’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나직이 말했다.
        “저기가 벼랑 끝으로 몰린 권율 도원수가 흰쌀로 말을 씻어서 왜놈들을 가뿐히 물리친 곳이라네. 그게 사실이었는지 나도 모르겠네만 민둥산이라 흰쌀로 말을 씻는 광경을 퇴각하는 가토와 그 졸개들이 아마도 쉽게 목격할 수 있었겠지. 하여간 도원수 권율은 저기에서도 또 이겼네.”
        마치 길을 재촉하기라도 하듯 금부도사 이사빈은 가늘게 뜬 실눈으로 황량한 논밭 저쪽 끝을 씁쓸히 바라보고 있었다.
        서둘러 길을 떠나 오산(五山)의 독성 아래에 이르니, 판관 조발(趙撥)이 술을 준비해 장막을 치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사빈은 술을 한사코 사양했으나 판관 조발과 이순신은 취하도록 많이 마셨다. 술에 취해 그는 오산 아전 황천상(黃天祥)의 집으로 가서 점심을 또 얻어먹었다. 황천상은 짐이 무겁다며 자기 말을 몸소 내어 짐을 남쪽으로 먼저 보내게 하니 대역죄인 이순신은 고마운 마음이 그지없었다.

        비루먹은 그의 짐말이 진위를 떠나 평택 부락산을 지나갈 때, 백성들이 산자락에 쓰러져 통곡하였다. 마왕이 그 안에 혼자 살고 있다는 그들의 산이었다. 후한의 멸망과 고구려의 전성기를 이루는 계기가 되었고, 개혁가 정암 조광조 선생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곳이라 여러모로 유서 깊은 그들의 영산이었다. 산자락에서 통곡하던 백성들 가운데 한 사내가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죄인 이순신에게 슬금슬금 다가왔다. 시큼털털한 냄새가 그에게서 훅 끼쳐왔다. 손등으로 코 밑을 쓱 훔쳐내며 무지해 보이는 사내가 마치 앞날을 예견하듯 제법 우렁차게 말했다.
        “장군께서는 멀지 않아 그때 그 삼도수군통제사로 당당히 다시 돌아올 겁네다. 몸을 상하지 않도록 항상 잘 챙기고 지켜내야 합네다, 장군. 위용을 잃지 마시오, 이순신 장군!”
        “…….”
        “…….”


        “전쟁 때문에 우리 백성들이 얼마나 고통을 받는지 차마 말로 표현할 수가 없다. 아침에 일어나 둘러보니 여기저기 굶어 죽은 사람들이 널려 있었다. 조선 전역이 굶주림에 허덕이고, 군량을 운반하느라 지친 노인들과 아이들은 길 위에 쓰러져 누웠으며, 쌀이 없어 백성들은 솔잎가루를 물에 타서 마셔야 했고, 장정들은 모두 도둑이 되었다. 전염병으로 인해 그 도둑들마저 죽어 사라지고 아버지와 아들, 남편과 아내가 서로를 잡아먹는 지경에 이르러 노천에는 죽은 사람들의 뼈가 잡초처럼 튀어나와 있었다. ”

        길섶에 주저앉아 걸신들린 듯이 푸성귀와 쑥을 뜯어서 허겁지겁 먹어대던 사내가 무슨 보따리를 꼭 끌어안고 산길을 가는 부녀자를 잔뜩 꼬나보고 있는 것이었다. 전쟁의 후유증은 이곳에서마저도 상상을 초월해 있었다. 왜놈들의 무차별한 학살과 약탈로 인해 사람이 사람을 잡아먹는가 하면, 아이들은 길 위에 떨어진 말똥까지 주워 먹었고, 말똥을 먹은 그 아이를 죽여 백성들이 연명한다는 소문이 항간에 파다했다. 사내는 보따리 정도로 만족할 것 같지가 않아 보였다. 오산 아전이 싸주었던 좁쌀과 말린 청어를 사내 앞으로 툭 던져주며 이순신이 타이르듯 점잖게 충고했다.
        “생명은 누구에게나 소중한 것일세.”
        “…….”
        “알겠는가?”
        “…….”
        “…….”

        끝 모르고 펼쳐진 바다처럼 끝없이 펼쳐진 하늘은 이리도 티 하나 없이 맑고, 그윽한 꽃향기 실어 산자락에 이따금 불어와 몸에 슬며시 감기는 바람은 이토록 시원시원하건만 착잡한 기분은 그러나 여전했다. 대역죄인 이순신은 형언 불가의 꽃향기를 몸속 깊이 빨아들이며 문자향(文字香)을 혼자서 조용히 만끽했다. 그와 같이 말을 타고 있던 이사빈이 한숨 두어 번 길게 뽑아내고 나더니 혀를 차대며 물어왔다.
        “저놈에게 다 줘버리면 당신이 앞으로 쫄쫄 굶어야 하지 않는가……!?”
        “…….”
        “…….”


        가는 곳마다 만나는 사람들 태반이 안타까워하며 그를 격려하고 위로했지만 서글픈 마음은 그러나 좀처럼 지울 길이 없었다. 따뜻한 봄날의 싱그런 햇살 가득한 논밭 저쪽 끝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금부도사 이사빈이 씁쓸히 말했다.
        “저기가 바로 당신의 원수 원균이 태어난 마을일세.”
        금부도사는 지리에 밝고, 역사에 대해 많이, 그리고 깊이 아는 벼슬아치였다. 평택 현 이 근처 마을 어딘가에서 그의 친구 원연(元埏)의 형 원균(元均)이 울면서 태어났을 것이다.
        며칠 뒤 아산에서 보기로 하고 금부도사는 기름진 그의 말을 몰고 먼저 길을 떠났다. 혼자 쓸쓸히 길을 가는 동안 시종 흐느적거리는 말 위에서 지칠 대로 지친 몸이 흔들릴 때마다 안장에 닿는 부위가 몹시 쓰리고 형틀에 으스러지던 아랫도리가 욱신거려서 그는 말 위에 더 앉아 있는 것조차 불편했다.
        말을 좀 쉬게 했는데도 주리고 비루먹은 짐말은 곧 쓰러질 것처럼 비틀거렸다. 그는 말에서 내려 걸어야 했다. 탈구돼 으스러지던 어깨가 다시 쑤시고, 형틀에서 짓눌리던 고환이 곧 터져버릴 듯이 아팠다. 비가 또 퍼부었다. 천둥소리가 고막을 찢어대듯 요란했다. 혼자 길을 가기 어려워 엎어지고 자빠지며 그는 서럽게 부르짖었다.
        “차라리 어서 죽느니만 못하구나!”

        한산섬으로부터 한양까지 걸어서 따라온다던 종사관 정경달을 떠올리며 말과 함께 겨우 가는 길이 비통하고 억울하기 짝이 없었지만 그렇다고 신세타령이나 이어가고 자신의 처지와 서러움만 마냥 탓할 순 없는 일이었다. 보고픈 아내와 자식들의 얼굴이 퍼뜩 눈앞을 스쳤다. 옥에서 풀려난 자식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고 기다리실 어머니 얼굴이 눈앞에 한참을 어른거렸다.

        재상 류성룡이 훗날 평가했듯 단아한 선비와도 같은 이순신은 시련 앞에서도 결코 좌절하는 자가 아니었다. 털 다 빠지고 노쇠해져 흐느적거리는 말과 함께 초계를 향하면서도 왜적들과 피 터지게 싸웠던 해전들을 돌아보면서 허술했던 자신의 전략을 다시 보완하고 전술을 꼼꼼히 새로 짤 정도로 이순신은 역시 포기를 모르는 사람이었다.

        “진실은 그 어떤 고난과 역경도 두려워하지 않는 법. 역사는 나를 알아주고, 역사는 나를 기억할 것이다.”

        뙤약볕 아래 비틀거리고 몇 번이고 쓰러지고 주저앉으며 길을 가는 동안 임진년(1592년) 초에 쓰기 시작하여 의금부에서 옥고를 치르던 날들을 제하고 무술년(1598년)에 유명을 달리하기까지 무려 2천5백일이 넘게 꼬박꼬박 써서 세상에 남겼던 일기가 그의 머릿속에서 다시 써지고 있었다.

      【해설】(편집부)

        이번 회는 ‘의금부의 고문과 이순신의 침묵’을 통해 권력과 정의의 충돌을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형벌은 육체의 고통을 넘어 진실을 지우는 장치로 작동한다. 이순신의 침묵은 체념이 아니라, 거짓 서사에 대한 반증(反證)이었다.
        류성룡과의 재회는 정서적 정점이며, 조정의 ‘불편한 심기’는 충신을 배제하는 권력의 병리(病理)를 드러낸다.
        의금부의 혹독한 고문이 끝나자, 그는 다시 일어섰다. 한산에서 노량으로 이어지는 이순신의 걸음은 조선의 몰락 위에서 피어나는 희망의 서사였다. 의금부의 고문이 남긴 상처는 사라지지 않았으나, 그는 무너진 나라를 일으켜 세우려는 인간 이순신의 재기록을 써 내려간다.
        위관의 문초는 ‘정여립·길삼봉’ 사건과 억지로 연결된 정치극이었다. 그는 권력의 허위 신문을 견디며 끝내 침묵으로 진실을 지켰다. 그리고 그 침묵의 끝에서 백의종군의 길이 시작된다. 백의종군은 속죄가 아니라 재건의 서막이었다.
        “법이 진실을 누르고 권력이 정의를 압박할 때, 침묵은 복종이 아니라 저항이 된다.”
        백의종군의 길은 곧 속죄의 길이자 재탄생의 길이었다. 비루먹은 말을 끌며 과천·수원·평택·아산을 지나 초계로 향하는 동안, 그는 다시 조선의 백성을 마주한다. “장군께서는 머지않아 통제사로 돌아오실 겁니다.” 백성의 이 말은 예언이자, 역사의 입으로 쓰인 선언이었다. 『징비록』이 전한 참혹한 민중의 현실 속에서, 이순신은 ‘전쟁 영웅’이 아니라 생명을 지키는 인간으로 거듭난다.
        첫 번째 백의종군이 개인의 시련이었다면, 두 번째 백의종군은 국가의 회개이자 인간의 구원으로 확장된 서사였다. 평택 부락산의 백성들이 통곡하는 장면은 민중이 국가보다 먼저 ‘영웅의 귀환’을 기다리고 있었음을 상징한다.
        이순신의 길 위에는 세 가지 인물이 겹쳐진다. ① 국가가 버린 영웅, ② 백성이 믿은 구원자, ③ 스스로를 다스리는 성자(聖者).
        결국 그의 여정은 단순한 이동이 아니라, “국가의 구원은 개인의 회심에서 비롯된다”는 철학적 서사로 전환된다.

      【본문 어구 해설】(편집부)

      宣傳官 李順日(선전관 이순일) 조정의 명을 전하거나 왕명을 전달하던 관리. 이순신에게 하명을 전한 인물로, 임금의 의중을 전달하는 ‘왕의 입’ 역할.
      垠靑金紫光祿大夫(은청금자광록대부) 조선시대 문무 고위직에게 내리던 명예직 작호(爵號). 벼슬의 품계를 높여주는 명예로운 칭호로, 이순신이 죽은 뒤 추증받은 최고의 영예.
      畵顔問候之委官(화안문후지위관) 낯빛을 바꿔 사뭇 살갑게 물어오는 위관. ‘위관(委官)’은 죄인을 심문하던 관리. 태도가 돌변하여 상냥하게 묻는 모습은 권력의 교활한 이중성을 상징.
      社稷(사직) 국가와 백성을 뜻함. 본래는 토지신(社)과 곡식신(稷)을 모신 제단을 가리키며, 나라의 근본을 상징.
      宗廟(종묘) 역대 왕과 왕비의 신위를 모신 사당. ‘사직과 종묘’는 조선 왕조의 국가 체제를 지탱하는 두 기둥으로 자주 함께 쓰임.
      都體察使(도체찰사) 전쟁 시 군사 전반을 총괄하는 임시직. 임금의 명을 받아 각 도의 군사를 지휘했으며, 임진왜란 때는 류성룡이 이 직을 맡았음.
      倭(왜) 일본을 뜻하는 한자. 조선시대 문헌에서는 일본인을 ‘왜적(倭賊)’이라 불렀음.
      戰時在上(전시재상) 전쟁 중 최고 지휘자라는 뜻. 명목상으로는 임금의 명을 받았지만, 실제로는 모든 작전을 결정하는 실권자.
      觀岳山 狐嶺(관악산 호령, 여우고개) 서울 관악산의 고개 이름. 여우가 자주 나타난다 하여 붙여졌으며, ‘간교함’과 ‘위험한 경계’를 상징.
      果川樓(과천루) 과천의 누각. 이순신이 압송되는 길목에서 잠시 머물렀던 곳으로, 그가 조선 권력의 냉혹함을 실감한 장소로 묘사.
      水原 府使 柳永健(수원 부사 유영건) 수원 고을의 지방관. 이순신이 압송될 때 통행을 맡은 관리로, 당시 지방관료의 관망적 태도를 드러냄.
      縣監(현감) 한 고을을 다스리던 말단 지방관. 백성과 가까운 자리였지만, 중앙의 눈치를 보며 소극적으로 처신하는 인물상을 상징.
      衙前(아전)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던 하급 관리. 탐관오리와 백성 사이에서 억지 세금을 거두던 존재로 자주 풍자의 대상이 됨.
      抄啓(초계) 본래는 ‘임금에게 올리는 보고서의 초안(抄)’과 ‘아뢸 계(啓)’를 합친 말로, ‘임금에게 아뢰는 문서를 초안하다’는 뜻의 문서 행위. 그러나 이순신의 백의종군길에 등장하는 초계(抄啓)는 문서가 아니라 지명(地名)으로, 오늘날의 경상남도 합천군 초계면(抄啓面)을 가리킴. 이 지역은 조선시대에 경상우도 병마절도영(兵馬節度營)이 있던 전략적 요충지로, 이순신이 백의종군 중 머물렀던 실제 장소임.
      禁府都事 李士賓(금부도사 이사빈) 의금부의 실무 책임관. 이순신을 신문하고 압송한 관리로, 오늘날로 치면 검찰 수사관에 해당.
      獨山(독산) 권율 장군이 왜군을 물리친 곳으로 전해지는 산. 작품에서는 절망 속 희망의 상징적 배경.
      독산성 전투 권율 장군이 백의로 적을 속여 이겼다는 전설의 전투. 지혜와 믿음으로 거둔 승리를 상징.
      權慄(권율) 임진왜란 때의 명장. 행주대첩의 주인공으로, 이순신과 함께 조선을 구한 대표적 인물.
      “白米洗馬(백미세마)” 권율 장군이 행주산성 승리를 기념하며 ‘흰쌀로 말을 씻었다’는 말은, 전투의 완전한 승리를 상징하는 비유적 표현.
      烏山(오산) 경기도 오산시 일대의 고개와 산. 권율이 승전한 전설이 전해지며, 민중이 기억하는 의로운 전쟁의 상징지로 등장.
      獨城(독성) 경남 고성 근처의 성 이름. 이순신이 작전 중 경유한 곳으로, 적의 이동을 탐지하기 위한 요충지.
      判官 趙撥(판관 조발) 관찰사의 부관 격. 행정 실무와 재판을 담당한 관리로, 이순신의 압송 경로에 동행한 인물.
      烏山 衙前 黃天祥(오산 아전 황천상)– 오산 고을의 하급 관리. 고문당한 이순신을 은밀히 도운 인물로, 이름의 ‘天祥(하늘의 상서로움)’이 그의 양심을 상징.
      疥癬魔王(개선마왕) 문학적 비유. “비루먹은”이란, 본래 피부병(疥癬, 개선)에 걸린 짐승처럼 초라하고 더럽고 병든 상태를 뜻. 문학적으로는 탐욕스럽고 추한 사람, 도덕적으로 타락한 권력자를 빗대어 말할 때 쓰임. 즉, “비루먹은 마왕”은 겉은 왕이지만 속은 썩은 — 추악한 권력의 상징. ‘비루먹은 마왕’은 부패한 권력자, 혹은 탐욕에 물든 지배층을 풍자하는 표현.
      平澤(평택) 이순신이 지나간 지역으로, 백성들의 눈물과 통곡의 땅으로 묘사. ‘부락산’과 ‘황구지천’ 등 지명은 민초의 고난을 대변.
      扶樂山(부락산) 백성들이 이순신을 위해 울었다는 산으로, 백성의 눈물이 영웅을 다시 일으킨다는 상징적 장소.
      改革家 靜庵 趙光祖(개혁가 정암 조광조) 중종 때의 개혁가. 사림정치의 기틀을 세웠으나 훈구파의 모함으로 사사(賜死)된 인물. 이순신이 가장 존경한 선비.
      길섶, 순우리말(純우리말),. ‘섶’은 ‘옆, 주변’을 뜻하는 고어. “길섶”은 ‘길의 옆’, 즉 길가를 뜻. 길섶의 한자는 路側(노측) 또는 道旁(도방).
      文字香(문자향) 글의 향기, 곧 ‘학문의 품격’을 뜻하는 표현. 고통 속에서도 정신적 품위를 잃지 않는 이순신의 내면적 고결함을 보여줌.
      元埏(원연 1540~1597)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의병장(義兵將)으로, 경기도 평택 출신, 원균(元均)의 동생. 형과 달리 권력보다 의리를 중시했으며, 정유재란(1597) 때 충청도 아산 일대에서 의병을 일으켜 왜군을 격퇴하는 데 공을 세움. 이순신 장군과는 백의종군 시절 평택을 지날 때 만나 위로와 협력의 뜻을 나눈 벗. 문무를 겸비한 인물로, 이순신의 고난과 회복을 상징적으로 비춰주는 ‘양심의 동반자’로 평가됨.
      牙山(아산) 충청도의 도시. 이순신의 부친이 묻힌 곳이며, 그의 고향. 전란 속에서도 늘 마음속에 품었던 ‘귀향의 상징지’.
      近衛軍(근위군) 임금을 호위하던 왕실의 친위 부대. 작품에서는 조정의 권력 중심부를 상징.
      “신의 권력이 두려우신 겁니까, 전하?” 이순신이 속으로 임금에게 던진 말로, 권력의 부당함을 향한 내면의 저항과 절규를 표현.
      形枷(형틀) 죄인을 묶어 심문할 때 쓰던 나무틀. 이순신이 형틀에 묶인 장면은 육체의 고통과 정의의 억압을 상징.

      【현대적 의미】(편집부)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오늘날 공직자의 윤리이자 시민의 양심과 맞닿아 있다. 권력이 실패했을 때 공동체를 다시 일으켜 세우는 것은 제도나 법이 아니라 양심 있는 개인이다. 그가 남긴 말처럼 “진실은 고난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 믿음은 오늘의 리더십과 한국 사회의 윤리 회복에 여전히 유효한 메시지를 던진다.

      그러나 ‘낙인’은 여전히 현재형이다. 내부고발자, 공익제보자, 전문가의 양심적 발언이 조직 논리에 눌릴 때, 이순신이 견뎌야 했던 고통은 오늘의 사회를 향한 경고로 되살아난다. 그의 침묵이 복종이 아니라 저항이었듯, 오늘의 양심 또한 침묵을 강요받을 때 더욱 빛난다.

      충성의 대상은 조직이 아니라 공공의 진실이어야 한다.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단순한 복귀가 아니라 양심의 회복이자 책임의 실천이었다. 따라서 그의 첫걸음은 오늘의 리더십에게도 ‘양심의 기준’을 요구하는 선언으로 남는다.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가련한 여인의 초상』, 『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역임
      • 현재 평택 거주,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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