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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하식(칼럼니스트•문인, Ph.D.) - |
----------머나먼 미주와의 만남(3)----------
타이완을 이륙한 지 5시간, 샘플을 꺼내 보며 입국신고서를 작성했다. 그러고 보니 난생처음 날짜변경선(Date line)을 지나 베링해협을 가로지르고 있었다. 해가 저무는 게 아니라 거꾸로 날이 밝아오는 장관. 아내는 대낮을 좇아가는 여행의 묘미가 마냥 신기한가 보다. 형용컨대 구름은 엷고 바다는 묽었다. 휴지가 구겨진 듯한 민둥산. 말로만 듣던 알래스카(Alaska)였다. 나무 한 그루 찾아볼 수 없는 산들이 끝없이 이어졌다. 굽이굽이 홍수가 휩쓸고 간 자국에 이따금 눈사태로 보이는 흔적들. 가느다란 물줄기가 흘러 군데군데 물이 고여 있긴 했으나 불모지나 매한가지였다. 깊은 호수처럼 커다랗게 보이는 저류지. 친절한 계기판이 공지하기를 지금 출발지는 밤 12:55이고 현지 시각은 아침 8:55이란다. 간식이 나왔다. 짜디짠 베이컨을 여러 겹 포개 넣은 빵. ‘이들은 왜 이다지 짜게 먹는담?’ 아내는 입도 대지 않았고 나만 시장기를 달랬다.
척박한 대지, 나무는커녕 풀 한 포기 자라나기 어려운 여기는 어디쯤일까? 이건 산이 아니라 숫제 바닷속 같은 느낌. 우스운 건 나는 이곳을 로키(Rocky)산맥인 줄 알았다는 점이다. 귀국 후 지도를 펼치니 매킨리(Mckinley) 산맥. 해발 6,190m로 북미의 최고봉이자 미주 서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알래스카산맥의 주봉이었다. 불쑥 별반 쓸모도 없는데 덩치만 크면 뭘 하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지루한 산봉우리들의 연속. 비록 좁지만 알차게 가꾸기만 하면 우리나라도 결코 남한테 뒤질 게 없다는 입에 발린 말을 주문처럼 건네면서도 어쩔 수 없는 약소국이라는 자격지심이 몰려올 때는 온갖 부조리와 불합리에 홀로 맞설 때였다. 한참 뒤 출현한 산다운 산. 그야말로 태초의 산맥에 반사된 듯한 눈부신 햇살이 기창을 가득 채웠다. 아마 모세가 시내산에서 맞닥뜨렸던 영광스러운 빛이 정작 이랬을 터. 응당 그 영험한 세계의 경지를 모르는 바는 아니나 적어도 물리적으로는 그랬으리라 짐작했다. 이어 드러난 한 줄기 선. 영락없이 실뱀장어가 기어가는 형상이었다. 그리고는 연안을 따라 무더기를 이루고 있는 시추선들이 보이더니, 드디어 육안으로 식별할 만한 물과 나무들이 나타났다. 다만 짙은 운무가 산자락을 휘감고 있어 언뜻 때에 전 이불솜처럼 좀체 때깔이 나질 않았다. 색다른 경험의 드라마. 아래를 굽어보랴, 그것을 메모하랴, 고개는 잽싸고 손은 바빴다.
서서히 고도를 낮추는 동체. 곧 착륙하겠다는 방송이 귓전을 울렸다. 멀리 건물 몇 동이 어렴풋이 보였다. 거만한 군용기의 위용은 앵커리지 공항의 성격. 한눈에 정교한 데라곤 없다. 엉성한 잔디밭이며 허술한 건물의 모양새. 그러고 보니 우리가 이네들을 닮은 터였다. 아스콘 위로 삐죽 솟은 관제탑 뒤 높다란 능선이 가까이 다가왔다. 초가을인 양 볕이 따사로운 오후. 그러나 살갗에 닿는 대기의 감촉은 쌀쌀했다. 인천을 이륙한 지 무려 12시간 만에 또 기다란 줄이 우릴 기다렸다. 왼쪽은 승무원, 귀빈, 장애인들을 위한 Crew, 가운데는 자국민을 위한 U.S. Citizens, 오른쪽 Visitors 뒤에는 방문객들이 출입구를 꽉 메운 채 밧줄처럼 늘어져 있다. 앞뒤 손님들에게 양해를 구하고 들른 화장실. 휴지가 큼지막해 편리했으나 출입문이 필요 이상 붕 떠 있어 불안했다. 드디어 우리 부부의 순서. 근엄한 심사관 앞에 서니 왜 왔으며, 며칠간 머물지를 묻는다. “Trip”, "Nine days"라고 짤막하게 답했다. 꼬박 두 시간이 걸린 통관절차를 마치고 한 시간을 더 대기하다 뉴욕으로 향발.
가도 가도 이어지는 어스름. 이륙할 때는 분명 낮이었건만 기창을 따라오는 건 줄곧 어둠이었다. 머나먼 하룻길, 그렇게 육중한 물체가 검은 공간을 비행한 지 다시금 일곱 시간이 흐른 뒤에야 하늘 아래 불빛들이 보였다. 붉은 등불과 하얀 수은등의 물결. 하지만 공항을 뒤덮은 안개 탓인지 서울의 야경만은 어림없었다. 문득 이건 어쩌면 도심을 감싸고도는 고질적인 스모그일지도 모른다는 예감이 들었다. 항공기가 관제탑을 끼고 선회하기를 몇 차례, 그간 뉴스로만 듣던 존에프케네디(JFK)국제공항에 어렵사리 연착륙했다. 짐을 찾은 뒤 벽시계를 보니 19:15. 출구에는 반갑게도 아이라인을 굵게 그린 숙녀가 환영인파에 끼여 큼지막이 쓴 피켓을 들고 나와 있었다. 그러나 우리 부부는 다른 일행을 기다리느라 네 시간을 더 주차장에 묶여있어야 했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날씨가 선선했다는 점. 취학 전 어린이 둘을 안고 나타난 젊은 부부는 남서부 샌디에이고에서 합류하는 길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