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택=주간시민광장] 조종건 기자 = 경기도 평택시 포승읍 고려인 마을. 옛 소련 지역에서 건너온 8천여 명의 고려인 동포들이 집단 거주하는 이곳은 한국 사회 다문화 현실의 축소판이라 불린다. 언어와 문화의 장벽은 두텁고, 갈등은 그만큼 깊었다. “같이 살아야 한다”는 당위는 있었지만, 일상은 불편과 원망으로 얼룩지기 일쑤였다.
그러나 이 마을의 풍경을 바꾼 것은 행정 계획도, 대규모 지원도 아닌 단순한 한마디였다. 한 대표가 내뱉은 “딱 2주만 도와줄게”라는 약속. 처음에는 마지못해 시작한 일이었지만, 그 선택은 ‘2주짜리 유치원’을 거쳐 꼬마 통역사, 다국적 방범대, 할머니 봉사대, 그리고 영화 한 편이 불러온 사명감으로 이어지며 기적 같은 변화를 낳았다. 이제 포승 고려인 마을은 주민 자율의 힘으로 전국적 공로를 인정받는 공동체 모델로 주목받고 있다.
① 2주짜리 유치원의 기적
고려인 유치부의 출발은 번역 착오였다. 갑자기 아이들이 몰려들자 어쩔 수 없이 문을 열었고, 그 시작은 혼란의 연속이었다. “앉아라”라는 말조차 통하지 않았고, 밥을 줘도 먹지 않았다. 아이들에게는 ‘빵’이 없으면 식사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러시아식 식사를 위해 조리사까지 따로 고용해야 했다.
매달 학부모에게 받는 돈을 모두 합쳐도 1,200만 원, 선생님 인건비만 1,250만 원에 달했다. 월세와 식재료비를 합치면 늘 적자였고, 부족분은 고스란히 대표 주머니에서 메워야 했다. 그러나 아이들이 한국어를 배우며 성장하는 모습은 포기를 막았다. 특히 1:1 눈높이 수업은 큰 효과를 거뒀다. ‘2주짜리 실험’은 어느새 공동체 희망의 씨앗이 되었다.
② 꼬마 통역사들의 등장
유치부의 성장은 가정으로 이어졌다. 한국어를 익힌 아이들이 부모를 대신해 병원, 학교, 관공서에서 통역을 맡았다. 다섯 살 안냐는 “한국어가 제일 쉬워요”라며 당당히 가족의 대변자가 되었다. 아이의 성장은 곧 한 가정의 사회 적응을 이끄는 다리가 되었다. 그러나 어린 아이가 성인의 세계까지 짊어지는 한계도 드러났다. 새로운 과제는 어른들의 몫으로 남았다.
③ 다국적 방범대의 탄생
범죄 문제는 또 다른 불안을 낳았다. 평택경찰서는 특단의 대책으로 ‘외국인 자율방범대’를 제안했다. 핵심은 언어 장벽을 깨는 것이었다. 대장으로 발탁된 고려인 텐 알렉세이는 러시아어, 한국어, 몽골어, 영어 등 5개 국어를 했다. 그의 존재만으로 범죄자들의 “말 몰라요”라는 변명은 더 이상 통하지 않았다.
방범대에는 몽골, 베트남, 필리핀 등 8개국 주민 49명이 함께했다. 국적을 초월한 연대는 마을 안전망을 세우고, 주민 간 신뢰를 쌓는 계기가 됐다.
④ 할머니 봉사대의 등판
학교 앞 봉사에 참여하지 않는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을 때, 젊은 엄마들은 교대 근무와 밤샘 노동으로 참여가 불가능했다. 대신 나선 이들은 일자리 없이 지내던 고려인 할머니들이었다. ‘사랑나눔봉사대’는 아이들의 등굣길을 지키며 세대 간 연결의 다리가 됐다.
걷기조차 힘들던 노인이 봉사를 통해 춤을 추게 되었고, 봉사대 사무실은 사랑방이 되어 음식을 나누고 한글을 배우는 공간으로 확장됐다. 아이들을 지키려 시작한 봉사는 노년층 고립을 해소하는 사회적 해법으로 이어졌다.
⑤ 영화 한 편이 불러온 사명감
대표를 끝까지 붙잡아준 건 영화 였다. 청산리 계곡을 메운 이름 없는 독립군들의 희생을 보며 그는 다짐했다. “이 아이들 중에 독립군의 후손이 있을 것이다. 진심으로 가르쳐야 한다.” 그 사명감은 지칠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성과와 공적 인정
포승 고려인 마을의 노력은 이제 외부에서 공로로 인정받고 있다.
• 대한민국 범죄예방대상 최종 후보(행정안전부 장관 표창)
• 포승고려인마을 사회적협동조합 단체상 후보(경기도지사상)
• 도곡리 푸른 자율방범대: 평택경찰서장 감사장 4장
• 사랑나눔봉사대: 평택시장상 2장
눈에 띄는 점은, 평택시의 ‘고려인 조례’가 논의되며 예산이 쓰였음에도 정작 이 마을은 예산 지원을 받은 적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에도 자발적 헌신으로 이룬 성과라는 점이 전국적 관심을 모으는 이유다.
요약 박스 : 포승 고려인 마을의 다섯 가지 기적
• 2주짜리 유치원: 우연에서 시작된 희망의 씨앗
• 꼬마 통역사: 아이들이 부모의 언어 장벽 해소
• 다국적 방범대: 언어 능력으로 범죄 대응
• 할머니 봉사대: 노년의 삶과 공동체 회복
• 영화의 사명감: 개인의 깨달음이 공동체로 확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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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박준우 포승고려인마을 이사장(좌)김설희 사무장(우) |
김설희 포승고려인마을 사무장은 말했다.
“평택시에서 고려인 조례가 제정되었다고 하지만 저희는 예산을 직접 지원받은 적이 없습니다. 그럼에도 주민들이 자발적으로 노력한 결과가 이제는 공로로 인정받고 있습니다. 범죄예방대상과 도지사상 후보, 경찰서장·시장 표창은 단순한 상이 아니라 우리가 올바른 길을 걸어왔다는 증거입니다. 앞으로도 갈등을 넘어 공존과 희망의 공동체를 만들어가겠습니다.”
박준우 포승고려인마을 사회적협동조합 이사장은 이렇게 덧붙였다.
“고려인 마을은 단순히 이주민들의 거주지가 아니라, 다문화 사회의 미래를 보여주는 실험장이자 희망의 모델입니다. 주민들이 스스로 만든 작은 기적이 지금은 지역사회와 국가로부터 인정받고 있습니다. 저희 협동조합은 앞으로도 아이들, 어르신, 청년 모두가 함께 성장하는 공동체를 만들기 위해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투명 고지|이 기사의 작성자인 조종건 기자는 일상 민주주의 실현을 위해 한국시민사회재단 상임대표를 겸하고 있으며, 지역 환경·거버넌스·법 개선을 위한 시민운동에도 참여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