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직에 몸담고 있던 상당 기간 나는 매주 지역신문에 기고한 연재물을 모아 책을 내면서도 못다 한 학문에 대한 열망은 좀체 식을 줄 몰랐다. 교육학석사로는 성에 차지 않아 목회학석사 코스를 밟았을뿐더러, 마저 지적 허기를 메우겠다는 일념으로 문학박사 과정에 등록하고서도 여건상 더는 진척이 되지 않았다. 사실 개인적 현실을 감안하면 인문계 고등학교 도구과목을 맡은 교사의 위치에서는 다소 무리가 따르는 일이긴 했다. 어쨌든 1인 3역이 가능했던 건 나름대로 열심히 가르친 밑바탕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정년 뒤 문학에 신학을 접목한 간학문적(間學文的) 논제로 기독교 철학박사(Ph.D.) 학위를 마치고서도 또 무엇이 모자랐는지 곧이어 학업량이 만만찮은 국립 원격대학교 문화교양학과에 들어가 박사후과정을 보정(補整)하겠다고 마음먹은 데에는 그럴 만한 연유가 있었다. 이러구러 반평생을 인문학도로서 산문과 운문을 겸한 문인으로 살아왔음에도, 왜 굳이 문화와 교양에 관한 학과목을 더 배우겠다고 나선 참인가? 이는 이정호 명예교수(한국방송통신대학교 퇴임)가 제시한 지침에 일목요연하게 나와 있다.
첫째, 세상을 보다 깊게, 넓게, 두텁게 바라보기 위해서다.
둘째, 늘 자기 자신을 뒤돌아보고 반성하면서 새로운 전망을 열어가기 위해서다.
셋째, 내적 의지와 욕망, 사고와 행위 간의 간극을 균형 있게 이해하고 합리적으로 조절할 수 있는 능력을 기르기 위해서다.
넷째, 자신의 욕망과 감정을 자신 있고 유의미하게 표출하며 승화해내는 심미적•예술적 안목과 감각을 기르기 위해서다.
다섯째, 상식과 편견, 고정관념에 매몰되지 않고 합리적인 의심과 근거를 토대로 조직적으로 탐구하고 끈질기게 따지기 위해서다.
여섯째, 힘 있고 권력을 가진 자들의 목소리보다는 주변의 힘없고 가난한 이웃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고, 모든 형태의 아집과 독단, 강압과 폭력에 끝없이 저항하고 맞서기 위해서다.
일곱째, 보편적인 이론이나 위인들의 삶에서뿐만 아니라 평범한 개인의 사소하고 일상적인 경험에서도 무한한 가치와 가능성이 자리하고 있음을 감지하기 위해서다.
여덟째, 세상사의 다양성과 상대성, 중간 영역의 존재를 인정하고, 서로 다른 견해들의 특성과 차이, 근거와 목적이 가지고 있는 가치를 균형감 있게 이해하고, 공동체적 삶을 위해 선한 연대와 조화를 모색하고 실천하기 위해서다.
아홉째, 내가 미처 모르는 것이 있어 다른 사람의 피눈물이 되지 않을까 하는 지적 긴장을 보전하기 위해서다.
열째, 살아있는 것만이 흔들린다는 생각으로 역경에서도 자신을 믿고 사랑하며 소망과 용기를 잃지 않기 위해서다.
그밖에 보탤 말이 있겠는가? 하지만 나는 고대 철인이 외친 "sapientia, quae sola libertas est!", 곧 "지혜, 그 유일한 자유!"라는 구호도 좋으나 그보다는 구약성경,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되 지혜로운 자는 그의 지혜를 자랑하지 말라 용사는 그의 용맹을 자랑하지 말라 부자는 그의 부함을 자랑하지 말라 자랑하는 자는 이것으로 자랑할지니 곧 명철하여 나를 아는 것과 나 여호와는 사랑과 정의와 공의를 땅에 행하는 자인 줄 깨닫는 것이라 나는 이 일을 기뻐하노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예레미야 9:23~24)라는 계시에 더 마음이 간다.
그러므로 나는 문화교양학에서 얻은 슬기를 더해 앞으로 기독교 문필가의 길을 걷되 짐짓 재촉하지는 않을 참이다. 필자의 블로그에서 밝힌 바와 같이 현행 학제를 기준으로 한 각급 학교 졸업장은 학문 간 통섭을 위한 도정의 일환일 뿐이니까 말이다. 이를테면 갖가지 탐구 활동의 세계에서 단계별 수준을 논하려거든 인간계를 떠나 천상계로 진입하지 않는 한, 그 비밀을 알아차릴 수 없다는 게 평소 나의 지론인 셈이다. 거기에 뭇 영혼을 구원할 만한 비밀을 시나브로 녹여낸 글월을 묶어 유용한 책자로 발간한다면 더할 나위가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