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에 피는 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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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롭던 삶의 터전을 졸지에 빼앗겨버린 백성들은 싱그럽던 봄날이 사무치게 그립기만 했을 것이다. 바다가 있는 쪽으로부터 소금기 머금은 바람이 한바탕 불어올 때마다 둔전에 심어진 옥수수들은 물기를 잃고 시들어가며 해풍에 종일 서걱거렸다. 뙤약볕 아래 여염집 담장에 능소화는 그래도 흐드러지게 피어나 있었다. 하늘을 향해 뒤틀려 뻗어 올라간 덩굴에 악착같이 달라붙어 사뭇 고아하게 피어난 꽃을 황홀한 눈길로 바라보며 이순신이 탄성을 흘렸다.
“내 어머니가 좋아하시는 능소화꽃이구나……!”
수시로 올라오는 정탐의 보고에 그는 안도의 한숨을 여러 번 내쉬곤 했었다. 왜적들이 갑자기 진주로 몰려가 진주성에 연일 공격을 퍼붓는다는 소문에 불안하기 짝이 없었는데, 충청 병마사 황진이 왜군들을 그래도 어쨌든 잘 막아낸다고 하니, 정말 다행한 일이었다.
첩보전에 능하고, 정보를 결코 소홀히 하지 않는 지휘관이었지만 그러나 진주(晉州)의 전황에 대해서 만큼은 엇갈리는 보고가 수시로 올라왔던 탓에 안이하게 대처할 수밖에 없었던 전라 좌수사 이순신이었다.
계사년(1593년) 음력 6월 25일.
장대비가 온종일 퍼부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 우수사 이억기와 함께 ‘운주당(運籌堂)’에 앉아 적을 칠 일을 상의하였다. 가리포첨사 구사직(具思稷)이 오고, 경상 우수사 원균(元均)도 합류해 머리를 맞대고 같이 전략을 짰다. 소문에 따르면, 진주에선 성이 포위되었는데도 감히 누구도 진격해오지 못했다고 한다. 며칠 내내 비가 내린 덕분에, 불어난 물에 막혀 적들이 미쳐서 날뛰지 못하게 한 것으로 보면 하늘이 호남지방을 도왔음이 틀림없다.
매우 다행스러운 일이다. 군량미 130섬 9말을 낙안(순천부) 고을에 나눠주었다. 순천부사 권준(權晙)이 군량미 200섬을 가져다주고 벼를 찧어 매갈이(왕겨만 벗겨내고 속겨는 벗기지 않은 쌀)를 만들었다고 한다.
새벽부터 지짐거리던 빗줄기가 어느덧 장대비로 바뀌는 듯싶더니 폭우는 한나절 내내 지겹도록 퍼부었다. 먹구름 몰려든 하늘이 번쩍거릴 때마다 천지가 진동하며 자지러지듯 무섭게도 연방 울어댔다. 갖가지 생각들이 심란한 그의 마음에 잇달아 파도처럼 식겁하게 몰려왔다.
“여수에 홀로 계신 어머니는 무탈하신지…… 아산에 있는 아내와 아이들도 무사하고 안쓰러운 조카들 또한 갑작스러운 이 장마에 그럭저럭 잘 지내고 있는지…….”
놀랍게도 애절하고 다급한 하늘의 울음이었다.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름에 걸맞게 하늘을 능멸하며 붉은 열정의 꽃을 흐드러지게 피운 능소화(凌霄花)가 그에겐 오늘따라 유난히 서글프게 다가왔었다. 비에 젖은 꽃잎마다 백성들의 고초와 불만, 원망과 눈물이 고스란히 스며 있다니, 꽃잎에 스며든 백성들의 눈물은 이순신의 가슴에 깊이 박힌 슬픔이요 아픔이었다. 아주 불길한 예감이 순간 그의 생각을 스쳤다. 그리고 머지않아 그 예감은 적중했다.
누구도 선뜻 달려와 도와주지도 않는 고립무원(孤立無援)의 가마솥 무더위 속에서, 총집결한 9만3천의 적들에 둘러싸여 고작 6천의 관군과 의병으로 사력을 다해 싸워가며 버티고 또 버텼건만 적장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의 흉계에 말려든 명나라 제독 유정은 그들을 지원할 의도가 아예 없었고, 진주성이 결국 함락되고 말았다는 비보가 빗줄기 속에서 그의 진중(陣中)으로 날아들고야 만 것이다.
부산해전으로 전함 다수를 잃어 소진된 병력을 뭍으로 수송할 능력도 떨어지고, 보급로마저 완전히 막혀 결국 약탈에 의존하는 지경에 이르자 진주성을 점령하여 조선의 백성들은 물론이고 개와 고양이, 소와 닭 할 것 없이 살아서 꿈틀거리는 생물은 모조리 죽여없애라는 도요토미 히데요시(豐臣秀吉)의 명령이 적장들에게 하달되었다. 피아간의 평화로운 공존은 이제 물 건너간 일일 수밖에 없었다. 조선 정벌을 반대했다는 이유로 다인(茶人) 센리큐(千利休)에게 즉석에서 할복을 명령했던 왜인들의 우두머리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아니던가. 적들에게 합하(閤下) 히데요시의 명은 결코 거역할 수 없는 명령이었고, 부산으로 남하하던 적들은 갑자기 진주로 몰려가 목표물을 변경하여 진주성에 밤낮으로 일주일 내내 맹공을 퍼붓는데, 제2차 진주성전투는 김시민 장군에게 굴욕을 맛보았던 1차전 참패에 대한 왜의 보복으로 치러진, 그야말로 혈전(血戰)이었다.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왜적들이 집요하게 퍼부어댄 기갑 부대의 공격에, 천혜의 곡창지대 전라도로 들어가는 관문 진주성이 계사년 여름에 이윽고 함락되고 말았다. 조선의 보고(寶庫)가 마침내 적들의 수중에 넘어갈 위기에 처한 것이다. 포구에 묶인 배들은 걷잡을 수 없이 몰아치는 바람에 쉴 새 없이 삐걱거리고, 적들이 헐떡거리며 노 저어 바다를 건너 떼로 몰려오는 소리가 좌수사 이순신에게 떨쳐낼 길 없는 환청으로 거듭 또렷이 들려왔다.
분노에 찬 눈빛으로 지도만호(智島萬戶) 송희립이 목소릴 떨어가며 보고했다.
“진주성에서 생존하여 돌아온 조선의 장수는 단 하나도 없었습니다. 성 밖 시체 더미 속에 숨어서 왜놈이 쏜 총탄에 맞아 충청 병마사 황진이 죽었고,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가 자결로 죽었고, 김해 부사 이종인과 황명보가 또 죽었고, 무려 5천 명이 넘는 관민이 으깨진 성안에서 도륙되었고, 도륙된 그 백성들의 부녀자들과 아녀자들이 놈들에게 집단강간을 당하고 무참히 죽거나 코가 잘렸습니다, 나으리…….”
황진 장군이 끝내 죽었다는 말에 이순신이 한숨을 두어 번 길게 뽑아내며 탄식했다.
“나랏일이 앞으로 정말 크게 잘못되겠구나…….”
명사수 황진(黃進) 등 무술에 출중한 장수들과 급조된 의병들만을 철석같이 믿고 진주성전투를 그저 안이하게 여겼던 자신이 좌수사 이순신은 원망스러웠다. 적들의 학살로 폐허가 되어버린 진주의 아수라가 그 앞에 몇 번이고 서글프게 펼쳐졌다.
복구 불가능한 지경에 이른 진주의 참담한 폐허가 그의 마음을 한동안 어지럽혔다. 불에 탄 마을에 버려진 우물 속에선 풀이 자라고, 우물에 그나마 남아 있던 물까지도 핏물로 변해 백성들은 마실 물조차 구할 길이 없다는 송희립의 보고가 이어졌다.
언제 비를 뿌렸냐는 듯 햇빛은 다시 군막에 쏟아져 내리고, 칼자루를 거머쥔 이순신은 굳게 다문 입술로 하늘을 올려다보며 몸을 줄곧 부르르 떨었다. 그가 빼든 서슬 퍼런 칼이 햇빛을 사정없이 튕겨대며 쇠 비린내를 강하게 풍겼다.
활활 불타는 초막 앞마당에 모여 겁탈을 일삼던 자들의 폭발하는 웃음은 좌수사 이순신에겐 조각조각으로 가슴을 저미는 아픔이었다. 선과 악이 극명하게 갈리는 현장이었다. 순진한 사람들의 순수한 아이들이 적의 칼에 무참히 죽어간 것이다. 울먹이며 고통을 호소하는 부녀자들을 집단으로 짓이기며 왜놈들은 줄곧 헐떡거리고, 꼴깍거리고, 낄낄거렸다. 가랑이 속으로 파고드는 적들에게 거부감을 드러내며 악을 쓰는 부녀자들 누구든 적들은 무자비하게 목 베었다. 아수라장으로 돌변한 성안 흙바닥에선 나신(裸身)으로 널브러져 여인네들이 통곡하고, 숨죽여 곁에서 울먹이는 아이들의 코와 귀를 왜놈들이 잘라내는 웃지 못할 아비규환의 아수라들이 좌수사 이순신의 눈앞에 아찔하게 거듭 펼쳐졌다.
적들이 잘라낸 그 코들은 소금에 절여져 전리품이자 승전 증거물로서 왜놈들의 상부에 바쳐졌을 것이었다. 그는 살기 어린 칼의 비릿한 쇠 냄새를 폐부 깊숙이 밀어 넣으며 보이지 않아 벨 수 없는 원흉을 눈앞에 다시 떠올렸다. 전쟁이 소강상태로 접어들면서 주체가 되어야 할 조선을 따돌린 채, 암암리에 명나라와 왜국(倭國)의 강화협상이 행해지는 가운데, 비겁하게 자행한 왜놈들의 학살이 결국 공분을 불러일으키고 만 것이다.
“풍신수길(豐臣秀吉), 네 이놈……!!!……”
서슬 시퍼런 이순신의 칼이 한 번 더 차갑게 울며 부르르 떨었다. 주체할 수 없는 살기가 검의 혈조(血潮)에 끓고, 통제할 수 없는 분노가 그의 칼날에서 시리게 꿈틀거렸다. 송희립의 부연설명과 보고는 그러나 계속되었다.
“진주성이 결국엔 점령당하고 촉석루로 밀려나면서까지 저항했지만 대세는 이미 기울고 난 뒤였습니다. 의병장 고종후와 창의사 김천일과 경상우병사 최경회는 북향 사배를 올리고 절벽에서 뛰어내렸고, 김해 부사 이종인은 왜놈 둘을 겨드랑이에 끼고 같이 남강에 투신하였습니다. 그리고 경상우병사 최경회의 첩실이었던 논개는 자결한 최경회에 대한 복수로, 기생으로 변장하여 적장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촉석루 아래 절벽 바위까지 꾀어내 그자를 끌어안고 함께 남강에 떨어져 죽었답니다, 나으리…….”
그의 눈앞에서 한 떨기 꽃이 유유히 흐르는 강물 위로 허망하게 떨어지고 있었다. 좌수사 이순신이 한숨을 뽑으며 흐려진 눈으로 말했다.
“참으로 안타까운 희생이로다…….”
빗방울이 군막에 똑똑 떨어지는 듯싶더니 천둥소리가 다시 요란했다. 날이 살아 있는 그의 예리한 칼은 이제 천둥소리마저 단번에 벨 기세였다. 의성 건마산(乾馬山)에 진을 치고 필사적으로 버티다 생을 마감한 의병 김치중(金致中)과 그 식솔들의 안타까운 최후가 그의 머릿속에 다시 씁쓸히 떠올랐다. 순신은 기억을 더듬었다.
적들이 몰려오자 곳곳에서 의병들이 자발적으로 조직되었다. 비댓골(比大谷)에 허수아비들을 병졸로 가장하여 세워두고 충정의 뿌리를 지켜내기 위하여 사력을 다해 저항했지만 생전 처음 보는 조총과 서슬 퍼런 검으로 무장한 적장 가토의 임진년 출병 제2군에 그러나 의병들은 속수무책으로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살 날이 얼마 안 남은 노인은 물론이고 아녀자들의 코 10만 개 이상을 산 채로 잘라 소금에 절여 상부로 보낼 만큼 적들은 무자비한 자들이었다. 너무 늙어서 안쓰럽고, 너무 어려서 가엾어 조선의 백성들을 살려 보내줄 자들이 아니었다. 파죽지세로 포구에 몰려온 왜적들은 건마산 숲속으로 숨어든 부녀자들과 아녀자들까지 모조리 잡아다가 서로 돌아가면서 윤간(輪姦)을 일삼았고, 널브러져 흐느끼는 그녀들의 목을 단칼에 베어 코와 귀를 취하고, 관아와 민가를 닥치는 대로 불태우며 충정의 고장에 한껏 피를 뿌려댔다.
김치중의 동생 김치화와 김치윤과 김치공, 그리고 그들의 숙부 김응주가 길길이 날뛰는 자들의 칼을 받아 피를 토하며 하나씩 차례로 죽어갔다. 대세가 이미 기울자 김치중은 건마산 꼭대기로 올라가 뒤를 부탁하며 ‘미천강’이 흐르는 절벽 아래로 끝내 몸을 던지고야 만다.
의성 화진포 갯벌은 목이 잘리고 코와 귀가 잘려나간 사체들과 음부가 훼손된 시체들로 섞여서 썩어가는 냄새로 연일 진동했고, 목숨이 붙어 있는 부녀자들은 적에게 욕보이기 전에 스스로 극단을 선택하였는데, 김치중의 아내 신 씨는 김치중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바위로 올라가 혼자 외로이 스러져간 남편을 자기도 따라가겠다며 종일 서글피 흐르는 그 강물에 기꺼이 몸을 던졌다. 머리를 풀어헤친 그녀의 비녀가 강물에 먼저 떨어지고, 하얀 저고리 아래로 하얀 치마가 바람에 휘날릴 때, 하늘이 비를 한껏 뿌렸다.
흐려진 눈으로 좌수사 이순신이 다시 탄식하며 말했다.
“연약한 여인네 하나만도 못한 장졸들을 데리고 우리가 지금 사악한 적들을 맞아서 싸우고 있구나……!”
그러자 송희립이 갑자기 흥분하여 목소리에 힘을 주어가며 사뭇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받은 그대로 우리도 당장 놈들에게 똑같이 돌려줘야 하는 겁니다, 영감! 왜놈들 태반이 지금 여기에 몰려 있을 때, 당장 왜놈들의 전초기지 나고야성으로 쳐들어가서 우리도 놈들의 식솔들까지 똑같이 초주검으로 만들어 복수하면 되는 겁니다. 더 지체 말고 우리도 지금 당장 나고야로 쳐들어가서 놈들을 아주 박살 내 버립시다, 좌수사 영감……!!!”
그동안 신화와도 같은 연승을 이어온 터라 희립은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 충천해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흥분하여 신중함을 스스로 잃어버린 군관 송희립이었다. 그런 그를 흘금거리며 이순신이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그건 아니다, 송만호. 우리는 적들보다 백 배는 더 강해지고 적들보다 천 배는 더 냉정해져야 한다. 우리의 이 전쟁은 일시적인 감정으로 치르는 싸움이 결코 아니란 말이다, 송희립 장군…….”
“…….”
“…….”
빗물 흠씬 머금은 매화 나뭇가지에 걸린 달은 이토록 휘영청 밝고, 혼곤한 몸에 슬며시 감겨오는 꽃향기 또한 여전히 맑고, 파도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 때마다 꽃향기 스며든 포말(泡沫)은 하얗게 연달아 수려한 꽃을 피우고, 달빛 몽환적으로 아롱진 내아(內衙) 숙소에 홀로 앉아 조용히 술잔 기울이며 잠 못 이루고 쓸쓸히 지새우는 이 밤. 특별한 안주와 풍악도 없이 혼자서 마시는 술이라 속은 이리 쓰리고 쓰린데, 짝 잃은 기러기는 달빛에 젖어 까닭 없이 밤하늘 높이 홀로 날아가는구나.
달빛에 촉촉이 젖은 꽃잎을 간간이 스쳐 가는 향기로운 바람. 신묘하게 푸른 달은 숙소 깊숙이 슬며시 찾아와 이유 없이 칼날에 어른거리고, 조총과 검으로 무장한 잔악한 적들이 요란한 깃발을 적선마다 높이 걸고 바다를 휘저으며 몰려오는 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환청으로 찔러오니, 갖가지 근심이 가슴에 치밀어 불안감을 오늘도 나는 떨쳐낼 길이 없구나.
좌수사 이순신은 술을 조용히 넘기고 넘기며 착잡한 기분을 오롯이 그렇게 거듭 달랬다. 밤새 뒤채다 오늘도 닭이 울고 나서야 선잠을 잤던 탓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내려앉아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무지근해질 때면 어김없이 찾아들어 결리던 어깨를 쑤셔대는 통증은 쓸쓸한 이 밤에도 기어코 찾아와 그 아픔은 여전하건만 그러나 씻어낸 듯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고 있으니,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천해전에서 뼛속 깊이 박혔던 적의 탄환은 살 속을 후벼 파서 그날 바로 빼내 어쨌든 죽음은 면했지만 지긋지긋한 이 통증은 고단해진 몸속을 어김없이 돌아다니며 허전한 이 밤에도 사정없이 곳곳을 콕콕 쑤셔대고 있으니.
잠을 잘 수가 없는 밤이 허다했다. 닥쳐올 가상의 적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나면 그는 늘 코피를 쏟았다. 코피를 한 되씩 쏟고 나면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여 머릿속은 이내 멍해지고, 오한으로 밤새 몸을 떨고, 기진맥진해진 몸은 끝을 모르고 가라앉았다. 온백원 여러 알을 복용하고 나서야 몽롱한 기분으로 겨우 잠이 들고, 잠을 자면 현실에서 보았던 참상들이 꿈속에서 되살아났다.
화살과 포탄을 우박 퍼붓듯이 퍼부어대며 피 터지게 격렬했던 전쟁의 뒷전에서, 뙤약볕 아래 바다는 펄펄 끓었다. 목이 베이고 코와 귀가 잘려나가 물 위에 흩어졌다가 밀물에 실려 와 해안을 온통 뒤덮던 사체들. 해안가에 흩어진 시체들 주변으로 파리들은 늘 떼로 날아들며 윙윙거렸다. 피비린내 머금고 풍진(風塵)에 덮여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주검들 위에선 구더기들이 항상 끓고 있었다. 눈을 뜬 채로 목이 잘려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다가 갯벌에 처박혀 물오징어 썩어가는 냄새를 역하게 풍기며 원망 어린 그 죽은 눈으로 사령관 자신을 줄곧 쳐다보던 얼굴들. 목이 잘리고, 코와 귀까지 잘려나가 피아(彼我)를 식별할 수도 없는 시체들로 뒤덮여 새빨간 물결 넘실거리는 경상 해안 곳곳은 송장 썩어가는 냄새로 언제나 진동했었다. 푸성귀와 나무껍질을 찾아서 산야를 떠도는 백성들. 여염집 어미는 굶어서 죽어 있고, 문지방을 기어서 넘다가 굶어 죽은 그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줄곧 빨아대며 울던 아이. 다시는 꾸고 싶지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그 악몽들.
장지문 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바짝 긴장하여 내아 벽 앞 시렁에 걸어놓은 환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누구냐?”
“…….”
잠시 후, 여자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술을 더 가져왔습니다, 나으리…….”
“들어오거라!”
호리병을 가녀린 두 손에 받쳐 들고 미모의 한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와 그 앞에 다소곳이 허리를 굽혔다. 여인의 미동에 분 냄새가 아찔하게 풍겨왔다. 은하수처럼 맑은 두 눈망울, 이지적인 눈매에 몽환의 눈빛, 잘록한 허리, 밤이슬에 함초롬히 젖은 올림머리, 백옥처럼 뽀얀 살결에 소담스러운 젖가슴, 그리고 곱게 다문 여인의 붉은 입술엔 타오르는 조바심이 사뭇 요염하게 배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타고난 미모는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났다. 나비와도 같은 그녀의 사뿐한 움직임이 그의 시선을 오래 사로잡았다. 눈을 살짝 치떠서 곱게 흘기는 그 간드러진 표정에 무딘 사내 이순신의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렸다.
여색을 멀리하며 나라 지키는 본인의 임무에 늘 충실하기만 했던 조선의 장군 이순신. 그런 그에게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고픈 충동이 갑자기 일고 있다니, 참으로 기이한 밤이 아닐 수 없었다. 마른침을 잇달아 삼키며 이순신이 다시 물었다.
“넌 누구냐?”
“…….”
“왜놈들이 날 잡아 오라고 너를 이리로 보낸 거냐……?”
“…….”
“이도 저도 아니면 그럼…… 넌 대체 누구란 말이냐……!?”
“…….”
번쩍이는 눈빛으로 거듭 그가 추궁하였으나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는 그저 살포시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몸에서 오래도록 잊었던 야릇한 젖비린내가 몇 번이고 훅 끼쳐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매일 밤 혼자서 취해 지긋지긋한 환영에 시달리는 것보다 젊은 여자를 품는 일이 두말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전율이 돋고 손길이 닿으면 곧 녹아버릴 것만 같은 여인이 술병을 들고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황홀한 체취를 몸속 깊숙이 한 번 더 빨아들였다. 황홀하게 흐르는 달빛이 아찔한 그 충동을 자꾸자꾸 부추겼다. 마른침을 한 번 더 삼키고 나서 이순신은 헛기침을 한 번 더 크게 했다. 그리고 면박을 주듯 사뭇 지엄히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너 또한 조선 수군의 동정을 살피라고 적들이 보낸 세작이더냐?”
그러자 여인이 수줍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적적하실 것 같아서…….”
여자의 목소리가 어딘지 어색했다. 무슨 딱한 사연이 있을 듯싶었다. 순신이 다시 물었다.
“…… 내가 적적하다고……!?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
“…….”
좌수사 이순신은 다시 한번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 또한 그를 사뭇 다정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여전히 묘하게 웃고만 있는 것이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난리 통에도 넌 뭐가 그리 좋아서 계속 실실 웃기만 하는 것이냐?”
“…….”
그런 그녀에게서 그는 여수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언뜻언뜻 느껴지기 시작했다. 표정을 꾸미며 이순신이 거듭 물었다.
“그럼…… 녹도만호 정운, 아니 선산부사(善山府使) 정경달이 너를 여기로 보낸 것이냐?”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녹도만호 정운은 그가 ‘5관 5포’를 순시할 때마다 전쟁준비가 가장 잘 돼 있던 부하인 까닭에 누구보다 아끼는 군관이었고, 정경달(丁景達)은 벼랑 끝으로 몰린 경상도 선산(善山)을 혼자 힘으로 꿋꿋이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나 정운과 같이 술잔 기울이며 밤늦게까지 나랏일을 걱정했던 선산 부사 정경달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는 단 한 번의 포옹만으로도 곧 부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정신을 자꾸 흐려지게 하는 그녀와의 갈등을 단칼에 과감히 베어버리고 그녀의 허리 또한 단번의 포옹으로 부러뜨리고픈 충동을 좌수사 이순신은 갑자기 느꼈다.
좋아서 웃는 듯, 슬퍼서 우는 듯, 까닭 없이 곱게 찡그리는 그 여인은 희한한 미소를 입가에 살포시 물고 있었다. 가련한 그 여인네에 겹쳐, 적장을 끌어안고 촉석루에서 투신하던 기생 논개의 마지막 모습이 중첩의 파동으로 그의 칼날에 아련히 자꾸 어른거렸다.
미천강에 한 떨기 꽃이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순신의 마음은 다시 먹먹해졌다. 순신은 고개를 돌렸다. 바깥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그녀의 속치마 끈이 그의 눈길을 한동안 사로잡았다. 성욕과도 같은 수컷본능이 그의 몸속 깊은 심연에서 꿈틀거리며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치받고 올라왔다. 민망한 일이었다. 묘령의 여인네에게 그 또한 딱히 더 물어볼 말도 없었다. 머리를 두어 번 흔들어 아찔한 환각을 그는 다시 떨쳐냈다. 그리고 쏘는 눈빛으로 좌수사 이순신이 다시 물었다.
“그럼…… 광양 현감 어영담이 널 이리로 보낸 거냐?”
여인은 수줍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수사 이억기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한가할 때면 그와 둘이서 바둑을 두며 술을 거나하게 즐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고, 짜증을 애써 누르는 듯 이윽고 표정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럼…… 내 부하 송희립이 너를 여기로 보냈단 말이냐……?!”
그때에서야 그녀가 고개를 끄떡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소인은 경산에서 온 진랑화라고 하옵니다, 나으리…….”
현학금(玄鶴琴) 황진이를 무색게 하는 미색이었다. 흐르는 달빛을 받아 호리병을 든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황홀하게 빛났다. 은하수처럼 맑고 깊은 그녀의 두 눈에선 이지적인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의 몸도 그랬다. 묘령의 여인 랑화의 체취가 방안에 자욱했다. 가녀린 그 어깨로 가쁜 숨을 은밀히 몰아쉬는 그녀 랑화를 흘금거리며 좌수사 이순신은 그녀의 젖 냄새를 몸속 깊이 몇 번이고 은밀히 빨아들였다.
“몽환적인 아름다움의 이 여자는 부하 군관 송희립의 애첩 또한 아닐 테고, 철석같이 나를 믿고 따르는 부하가 희립인데, 야밤에 하릴없이 여자를 가지고 상관의 속내를 한 번 더 떠보겠다는 괘씸한 희롱 또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따운 이 여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관기가 틀림없었다. 그의 숙소 깊숙이 기웃거리며 흐르는 달빛엔 푸른 달의 모호한 웃음이 박혀 있는 것이다. 마른침 삼켜 불나비의 욕망을 애써 누르며 이순신이 사뭇 점잖게 물었다.
“지휘관이 여색을 탐하면 장졸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걸 너도 아느냐……?”
“예…… 나으리…….”
어머니와도 같은 그녀의 다정한 그 웃음이 자식 된 자로서의 본분을 고맙게도 그에게 인식시켰다. 숙소 창문 너머 적진의 어둠 속에서 적들이 싸리나무를 태우고 있었다. 결국엔 보이지 않아 찔러 들어갈 수 없는 왜놈들의 인후요 적들의 중심이었다.
“통제영 휘하의 연해와 섬들에 적의 깃발들이 보란 듯이 휘날리는 꼴을 대체 언제까지 그냥 지켜만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포구에 묶인 배들은 밤새 삐걱거리고, 왜놈들이 장악한 섬들에서 왜놈들의 불빛은 어둠을 거푸 깊이 찌르고, 찔러 들어갈 수 없는 적들이 밤마다 불길과 연기로 주고받으며 교신하는 봉화의 내용은 아직도 해독해낼 길이 없는데, 푸른 달빛 아래 몸속 깊이 스며든 여인의 체취는 이리도 못 견디게 황홀하니, 참으로 기이한 밤이었다.
아군의 방어망이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왜놈들의 봉화는 그러나 왜놈들의 통신이 여태 살아 있다는 방증이었다. 지휘관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는 연거푸 고개를 흔들어 기어코 환각을 떨쳐내고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뽀얗디뽀얀 그녀의 목 언저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순신은 잔 숨으로 마음을 달래며 애써 점잖은 음성을 흘렸다.
“괜찮아! 나 혼자 취해 밤새 홀로 술병 기울이더라도 난 정말 괜찮아! 희립이한테 가서 냉큼 전하거라. 호의는 마음으로만 받았느니라. 알았느냐……?”
“예…… 나으리…….”
“그럼…… 어서…… 나가보거라…….”
호리병을 두 손에 받쳐 들고 그녀가 짐짓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야릇한 젖 냄새와 분 냄새가 섞여 아찔하게 한 번 더 그의 마음을 쿡 찔러왔다. 사뭇 서운해하는 눈빛으로 그녀가 이윽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 참으로 보기 힘든 마력(魔力)의 여인네였다. 좌수사 이순신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갑자기 불러 세웠다.
“멈추거라!”
그녀가 움찔하며 멈춰섰다. 그녀 랑화의 입가에 요염한 미소가 잠시 번졌다. 랑화가 환하게 웃으며 나비처럼 살며시 돌아서더니 살포시 웃었다. 그러자 좌수사 이순신이 산채 나물로 조촐하게 차려진 술상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타이르듯 아주 점잖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술병은 놔두고 가거라!”
“예?”
“그 술병은 그냥 여기 놔두고 자네만 나가라니까.”
“아…… 예…….”
역사 해설 (편집부)
• 능소화의 상징: 전란 속 붉게 핀 능소화는 백성과 어머니, 조국의 아픔을 상징한다.
• 진주성의 함락: 若無湖南 是無國家(약무호남 시무국가) – 호남이 없으면 나라가 없다는 절박한 현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 히데요시의 잔혹성: 센리큐를 죽인 폭군의 명령은 결국 진주성의 민간인 학살로 이어졌다.
현대적 의미 (편집부)
1. 민간인 보호– 국제 인도법의 필요성을 되새기게 한다.
2. 전쟁과 폭력의 상징성– 권력자의 명령 하나가 민중의 삶을 송두리째 앗아간다.
3. 징후와 리더십– 지도자는 작은 징후 속에서도 공동체의 미래를 읽어내야 한다.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베스트셀러『가련한 여인의 초상』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베스트셀러『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현재 평택 거주,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