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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박사 연재칼럼(6)】 재미학개론에 대한 견해















-조하식(수필가•시조시인, Ph.D.)-

이따금 유튜브 동영상을 통해 만나는 김정운 님의 강의에는 남다른 점이 있다. 그는 초장부터 주제를 자극적으로 펼친다. 상당 부분이 귀를 솔깃하게 하거나 새로운 표현도 많은 편이다. ‘삶은 순서를 바꾸는 게임’이라며 좌중을 휘어잡는 재주가 출중하다. 나는 언제쯤이나 저리해 보나 부럽기까지 하다.
  하긴 자신을 가리켜 문화심리학자라는 소개부터 눈길을 끌었다. 대학원에서 여가정보학을 가르친 적이 있다고 했다. 단도직입적으로 그건 먹고 놀라는 부추김이란다. 너무들 일에 몰두하는 게 화근이라는 진단이었다. 내 안에 있는 개미 콤플렉스를 과감히 버리라는 채근이나 다름없다. 동화 속에 나오는 베짱이처럼 배짱을 부리며 살라는 주문이다.

  물론 다음과 같은 말들은 어디서 들어본 이야기 유(類)다. 인간이란 약점을 보강하기보다는 강점을 보완해야 한다는 둥,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자 기회의 점철이라는 말 등이 그것이다. 과연 그럴까? 사람에 따라서는 그렇게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필자는 후자에는 동의하지 않는다. 인생은 우연의 연속이 아닐뿐더러 결정적 기회란 그리 쉽게 오지 않기 때문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라는 말에 방점을 찍고 싶다. 다만 그건 각자의 몫이다. 어차피 인생은 저마다 깜냥대로 사는 게 자연스럽다는 생각이다. 필자 역시 고집이라면 한 고집하지만 그걸 가치관이라고 뭉뚱그려도 된다. 범주를 좁혀 인생관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따지고 들면 둘은 포함관계에 지나지 않는다. 굳이 상•하위 개념을 따지는 건 샌님들이 즐기는 놀이 중 하나다.

  그가 빌린 어느 철학자 말마따나 사는 동안 인간에게 끊임없이 발생하는 불안은 인간존재의 본질이다. 그는 거창하게 해석학적 순환을 우연적인 과거의 시간대를 필연적인 것으로 해석하고, 그 해석의 틀에 따라 다시 행동하는 인식과 행위의 순환과정이라고 풀었다. 솔직히 이건 퍽 현학적이다. 이걸 대뜸 무슨 소리인지 알아차리면 똑똑한 편이란다.
  그 순간 필자의 뇌리를 스치는 질문이 있었다. 당신은 방금 대중을 순환 논리에 빠뜨리고 있다는 불만이었다. 그 오류의 핵심에 신은 누가 만들었냐는 추궁이 있다. 좌중의 분위기가 다소 딱딱해졌다고 느낄 때 그가 냉큼 대령하는 구절도 있다. 대나무의 마디야말로 키가 크디큰 빈 통을 견디게 하는 힘이라는 따위다. 지속 가능한 사람은 워라밸을 아는 자요, 휴테크를 실천하는 자가 오래 산다는 비유다.
  개중에는 더러 진부한 줄거리도 섞는다. 나와 달리 생각하는 사람을 적으로 만들지 말라는 얘기 등이다. 그러나 이는 그런 인간을 가까이하라는 당부에 가깝다. 무릇 역사의 변증법이란 시대를 발전시킨 동력이로되 다음 세대의 발목을 잡았다는 말도 뇌리에 박혀있다. 수단적 가치인 근면과 성실을 궁극적 가치인 재미와 행복으로 바꾸자는 제안이기도 하다. 이때 노벨경제학상을 받은 다니엘 카네만을 소환한 건 그래서다. 하루의 삶 속에서 기분 좋은 시간이 길면 길수록 행복한 사람이라고 했단다.

  말하자면 자기만의 공간이 절대 필요하다는 제청이다. 이는 내가 유독 폐쇄된 서재를 좋아하는 이유이기도 했다. 거기서는 숨을 깊숙이 쉴 수 있기에 그런 거란다. 주저 없이 한국 남자보다 여자가 오래 사는 까닭을 감정 표현에서 찾았다. 메마른 남성일수록 적개심이 쌓이고 스트레스를 풀기 어려운 여건에서 허덕인단다. 그런 삶일수록 호르몬 배출이 안 된다는 경고이자 경종이다. 그냥 노후건강을 위한 심리치료라고 해도 무방하다. 이는 우리 집부터 벤치마킹이 절실한 지점이다. 나란 사람은 여자가 수다를 떨면 자리를 피해버리기 일쑤다.
  식상한 대목도 있다. 돈은 최소한의 조건일 뿐이라는 잔소리다. 상대적 결과론이로되 김정운 님의 행복론은 행복추구에 얽매일수록 영원히 행복할 수 없다는 역설이다. 일종의 모순적 마니아가 되라는 일깨움으로 들린다. 창의적 사고를 지닌 다빈치였기에 묘한 표정의 눈썹 없는 여인을 그려냈다는 거다. 곧 괴물 같은 얼굴의 조합에 대한 호평이다. 오늘날 데이터베이스에 깔린 창의력이야말로 재밌게 놀 때 생긴다는 감성적 접근이었다.
  감동이나 감탄이 칭찬과 매한가지라는 건 알고 보면 이성조차 감성의 반열에 있다는 반전이다. 그러고 보니 나 역시 대화 중에 우물쭈물하다가 감정이나 지적 발동의 적기를 놓친 게 다반사였다. 이를테면 유인원은 구부리고 다니는 바람에 입안에 공간이 없어져 언어를 얻지 못했다는 건데, 그에 따르면 시제 구분의 여부가 인간과 동물의 차이를 낳았다는 풀이다.

  그는 결론적으로 창조는 편집이고 재미는 창조이므로 창조는 방법론이라고 주장한다. 이에 대한 나의 반론은 진정한 창조란 무에서 나온 유가 아니면 창의 내지는 창발이라는 쪽이다. 여기에 관해서는 세상 자체가 편집되어 있어서라고 선을 긋는다. 현대사회는 지식 편집의 시대라는 게 그의 지론이었다. 고로 다가올 미래는 그 강도를 더할 뿐이란다.
  거기에 다소 알쏭달쏭한 덧말을 붙였다. 스스로 맥락적 사고를 키울 줄 알아야 삶의 줄기가 생긴단다. 즉, 생애 주기별 자극에 얽매이지 말고 새로운 정보를 투입함으로써 삶의 흐름을 바꾸면 전혀 다른 사람이 된다는 주문이다. 인간은 재미를 행복으로 착각할 때 큰다는 큰소리다. 끝으로 뭇 사람이 자꾸 과거를 찾는 걸 두고는 싫은 기억을 지우려는 몸부림으로 규정했다.

  김정운 님의 강의를 나름대로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모름지기 완결성의 원리를 터득하면 공부는 응당 흥미롭기 마련이다. 내가 좋아하는 분야에 관한 공유야말로 정서적 최고선이다. 풍자를 보고 흉내라고 치부하는 건 초보자들의 사고다. 소통하고 공감하는 자가 리더십을 갖는 법이다. 나의 관심사가 나를 설명할 수 있어야 지도자로서 자격이 있다.
  고로 메타언어를 카드에 정리하는 게 능력이다. 나의 기록장이 재산인 까닭이다. 재미와 의미가 교차하는 지점에서 백 세 인생을 마무리하여라. 생애의 종착역에서 “더 베풀걸, 더 용서할걸, 더 재밌게 살걸”하고 후회해 봤자 헛일이다. 재미가 있으면 남을 용서할 마음이 생기고 절로 베풀게 된다는 것이 김정운의 철학이다.

  그렇다면 나는 어떻게 살아갈 셈인가? 세상에 발붙이고 있는 한 재밌게 살아야 한다는 데는 원론적으로 수긍한다. 다만 저마다 의미를 두고 살아가는 영역이나 방법론에는 간극이 있을 수밖에 없다. 필자의 세계관은 이 세상이 끝이 아니라고 보아서다. 기실 유한한 인생사에서 죽음으로써 모든 것이 끝나버린다면 삶 자체가 무의미해지지 않겠는가. 굳이 생로병사를 반복하면서까지 대를 이어 살아낼 이유가 없다는 말이다.
  곰곰이 따져볼수록 영혼을 가진 인간이라면 사후세계를 상정할 때라야 유의미한 삶을 꾸릴 수 있다는 생각에서다. 이는 기후위기로 인해 지구촌의 생태계가 위태로워졌다는 경고음과도 무관하지 않다. 얼마 전 어느 중학생의 돌발성 질문을 잊을 수 없다. “어차피 죽을 건데 애는 왜 낳아야 하죠?” 하루하루 죽을 날을 기다리며 살 연유는 없지 않겠냐는 원초적 반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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