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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호 소설가 연재소설 (제1회) -2】 노량에 피는 꽃

  소설가 현종호

 흐려진 눈으로 좌수사 이순신이 다시 탄식하며 말했다.
 “연약한 여인네 하나만도 못한 장졸들을 데리고 우리가 지금 사악한 적들을 맞아서 싸우고 있구나……!”
 그러자 송희립이 갑자기 흥분하여 목소리에 힘을 주어가며 사뭇 비장한 각오를 밝혔다.
 “받은 그대로 우리도 당장 놈들에게 똑같이 돌려줘야 하는 겁니다, 영감! 왜놈들 태반이 지금 여기에 몰려 있을 때, 당장 왜놈들의 전초기지 나고야성으로 쳐들어가서 우리도 놈들의 식솔들까지 똑같이 초주검으로 만들어 복수하면 되는 겁니다. 더 지체 말고 우리도 지금 당장 나고야로 쳐들어가서 놈들을 아주 박살 내 버립시다, 좌수사 영감……!!!”
 그동안 신화와도 같은 연승을 이어온 터라 희립은 의기가 하늘을 찌를 듯 충천해 있는 것이었다. 스스로 흥분하여 신중함을 스스로 잃어버린 군관 송희립이었다. 그런 그를 흘금거리며 이순신이 타이르듯 조용히 말했다.
 “그건 아니다, 송만호. 우리는 적들보다 백 배는 더 강해지고 적들보다 천 배는 더 냉정해져야 한다. 우리의 이 전쟁은 일시적인 감정으로 치르는 싸움이 결코 아니란 말이다, 송희립 장군…….”
 “…….”
 “…….”


 빗물 흠씬 머금은 매화 나뭇가지에 걸린 달은 이토록 휘영청 밝고, 혼곤한 몸에 슬며시 감겨오는 꽃향기 또한 여전히 맑고, 파도 소리가 귓전을 파고들 때마다 꽃향기 스며든 포말(泡沫)은 하얗게 연달아 수려한 꽃을 피우고, 달빛 몽환적으로 아롱진 내아(內衙) 숙소에 홀로 앉아 조용히 술잔 기울이며 잠 못 이루고 쓸쓸히 지새우는 이 밤. 특별한 안주와 풍악도 없이 혼자서 마시는 술이라 속은 이리 쓰리고 쓰린데, 짝 잃은 기러기는 달빛에 젖어 까닭 없이 밤하늘 높이 홀로 날아가는구나.
 달빛에 촉촉이 젖은 꽃잎을 간간이 스쳐 가는 향기로운 바람. 신묘하게 푸른 달은 숙소 깊숙이 슬며시 찾아와 이유 없이 칼날에 어른거리고, 조총과 검으로 무장한 잔악한 적들이 요란한 깃발을 적선마다 높이 걸고 바다를 휘저으며 몰려오는 소리가 아직도 귓전을 환청으로 찔러오니, 갖가지 근심이 가슴에 치밀어 불안감을 오늘도 나는 떨쳐낼 길이 없구나.

 좌수사 이순신은 술을 조용히 넘기고 넘기며 착잡한 기분을 오롯이 그렇게 거듭 달랬다. 밤새 뒤채다 오늘도 닭이 울고 나서야 선잠을 잤던 탓에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왔다. 해가 기울고 땅거미가 내려앉아 지칠 대로 지친 몸이 무지근해질 때면 어김없이 찾아들어 결리던 어깨를 쑤셔대는 통증은 쓸쓸한 이 밤에도 기어코 찾아와 그 아픔은 여전하건만 그러나 씻어낸 듯 정신은 오히려 맑아지고 있으니, 도대체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사천해전에서 뼛속 깊이 박혔던 적의 탄환은 살 속을 후벼 파서 그날 바로 빼내 어쨌든 죽음은 면했지만 지긋지긋한 이 통증은 고단해진 몸속을 어김없이 돌아다니며 허전한 이 밤에도 사정없이 곳곳을 콕콕 쑤셔대고 있으니.
 잠을 잘 수가 없는 밤이 허다했다. 닥쳐올 가상의 적들과 한바탕 싸움을 벌이고 나면 그는 늘 코피를 쏟았다. 코피를 한 되씩 쏟고 나면 이상한 불안감에 휩싸여 머릿속은 이내 멍해지고, 오한으로 밤새 몸을 떨고, 기진맥진해진 몸은 끝을 모르고 가라앉았다. 온백원 여러 알을 복용하고 나서야 몽롱한 기분으로 겨우 잠이 들고, 잠을 자면 현실에서 보았던 참상들이 꿈속에서 되살아났다.

 화살과 포탄을 우박 퍼붓듯이 퍼부어대며 피 터지게 격렬했던 전쟁의 뒷전에서, 뙤약볕 아래 바다는 펄펄 끓었다. 목이 베이고 코와 귀가 잘려나가 물 위에 흩어졌다가 밀물에 실려 와 해안을 온통 뒤덮던 사체들. 해안가에 흩어진 시체들 주변으로 파리들은 늘 떼로 날아들며 윙윙거렸다. 피비린내 머금고 풍진(風塵)에 덮여 쉴 새 없이 꿈틀거리는 주검들 위에선 구더기들이 항상 끓고 있었다. 눈을 뜬 채로 목이 잘려서 물 위에 둥둥 떠다니다가 갯벌에 처박혀 물오징어 썩어가는 냄새를 역하게 풍기며 원망 어린 그 죽은 눈으로 사령관 자신을 줄곧 쳐다보던 얼굴들. 목이 잘리고, 코와 귀까지 잘려나가 피아(彼我)를 식별할 수도 없는 시체들로 뒤덮여 새빨간 물결 넘실거리는 경상 해안 곳곳은 송장 썩어가는 냄새로 언제나 진동했었다. 푸성귀와 나무껍질을 찾아서 산야를 떠도는 백성들. 여염집 어미는 굶어서 죽어 있고, 문지방을 기어서 넘다가 굶어 죽은 그 어미의 젖꼭지를 물고 줄곧 빨아대며 울던 아이. 다시는 꾸고 싶지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도 않은 그 악몽들.

 장지문 밖에서 갑자기 인기척이 느껴졌다. 그는 바짝 긴장하여 내아 벽 앞 시렁에 걸어놓은 환도를 올려다보며 물었다.
 “누구냐?”
 “…….”
 잠시 후, 여자 목소리가 나직이 들려왔다.
 “술을 더 가져왔습니다, 나으리…….”
 “들어오거라!”
 호리병을 가녀린 두 손에 받쳐 들고 미모의 한 여인이 방안으로 들어와 그 앞에 다소곳이 허리를 굽혔다. 여인의 미동에 분 냄새가 아찔하게 풍겨왔다. 은하수처럼 맑은 두 눈망울, 이지적인 눈매에 몽환의 눈빛, 잘록한 허리, 밤이슬에 함초롬히 젖은 올림머리, 백옥처럼 뽀얀 살결에 소담스러운 젖가슴, 그리고 곱게 다문 여인의 붉은 입술엔 타오르는 조바심이 사뭇 요염하게 배어 있는 것이었다. 그녀의 타고난 미모는 어둠 속에서 더욱 빛났다. 나비와도 같은 그녀의 사뿐한 움직임이 그의 시선을 오래 사로잡았다. 눈을 살짝 치떠서 곱게 흘기는 그 간드러진 표정에 무딘 사내 이순신의 가슴이 갑자기 쿵쾅거렸다.
 여색을 멀리하며 나라 지키는 본인의 임무에 늘 충실하기만 했던 조선의 장군 이순신. 그런 그에게 버들가지처럼 하늘거리는 그녀의 몸을 와락 끌어안고픈 충동이 갑자기 일고 있다니, 참으로 기이한 밤이 아닐 수 없었다. 마른침을 잇달아 삼키며 이순신이 다시 물었다.
 “넌 누구냐?”
 “…….”
 “왜놈들이 날 잡아 오라고 너를 이리로 보낸 거냐……?”
 “…….”
 “이도 저도 아니면 그럼…… 넌 대체 누구란 말이냐……!?”
 “…….”
 번쩍이는 눈빛으로 거듭 그가 추궁하였으나 여자는 여전히 아무 말이 없었다. 여자는 그저 살포시 웃기만 하는 것이었다. 여자의 몸에서 오래도록 잊었던 야릇한 젖비린내가 몇 번이고 훅 끼쳐왔다. 환장할 노릇이었다. 매일 밤 혼자서 취해 지긋지긋한 환영에 시달리는 것보다 젊은 여자를 품는 일이 두말할 나위 없이 행복할 것이었다. 스치기만 해도 전율이 돋고 손길이 닿으면 곧 녹아버릴 것만 같은 여인이 술병을 들고 지금 그 앞에 서 있는 것이다. 그는 그녀의 황홀한 체취를 몸속 깊숙이 한 번 더 빨아들였다. 황홀하게 흐르는 달빛이 아찔한 그 충동을 자꾸자꾸 부추겼다. 마른침을 한 번 더 삼키고 나서 이순신은 헛기침을 한 번 더 크게 했다. 그리고 면박을 주듯 사뭇 지엄히 그녀에게 물었다.
 “그럼…… 너 또한 조선 수군의 동정을 살피라고 적들이 보낸 세작이더냐?”
 그러자 여인이 수줍게 웃으며 얼버무리는 것이었다.
 “적적하실 것 같아서…….”
 여자의 목소리가 어딘지 어색했다. 무슨 딱한 사연이 있을 듯싶었다. 순신이 다시 물었다.
 “…… 내가 적적하다고……!? 네가…… 그걸…… 어찌…… 아느냐……?!”
 “…….”
 “…….”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베스트셀러『가련한 여인의 초상』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베스트셀러『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현재 평택 거주,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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