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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호 소설가 연재소설 (제1회) -3】 노량에 피는 꽃

소설가 현종호

 좌수사 이순신은 다시 한번 허탈하게 웃었다. 그녀 또한 그를 사뭇 다정한 눈길로 내려다보며 여전히 묘하게 웃고만 있는 것이었다. 참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 난리 통에도 넌 뭐가 그리 좋아서 계속 실실 웃기만 하는 것이냐?”
 “…….”
 그런 그녀에게서 그는 여수에 홀로 계신 어머니가 언뜻언뜻 느껴지기 시작했다. 표정을 꾸미며 이순신이 거듭 물었다.
 “그럼…… 녹도만호 정운, 아니 선산부사(善山府使) 정경달이 너를 여기로 보낸 것이냐?”
 “…….”
 그녀는 아무 말 없이 이번에도 고개를 저었다. 녹도만호 정운은 그가 ‘5관 5포’를 순시할 때마다 전쟁준비가 가장 잘 돼 있던 부하인 까닭에 누구보다 아끼는 군관이었고, 정경달(丁景達)은 벼랑 끝으로 몰린 경상도 선산(善山)을 혼자 힘으로 꿋꿋이 지켜낸 구국의 영웅이었다. 며칠 전에 우연히 만나 정운과 같이 술잔 기울이며 밤늦게까지 나랏일을 걱정했던 선산 부사 정경달의 얼굴이 갑자기 떠오른 것이었다.
 그녀의 잘록한 허리는 단 한 번의 포옹만으로도 곧 부러져버릴 것만 같았다. 정신을 자꾸 흐려지게 하는 그녀와의 갈등을 단칼에 과감히 베어버리고 그녀의 허리 또한 단번의 포옹으로 부러뜨리고픈 충동을 좌수사 이순신은 갑자기 느꼈다.
 좋아서 웃는 듯, 슬퍼서 우는 듯, 까닭 없이 곱게 찡그리는 그 여인은 희한한 미소를 입가에 살포시 물고 있었다. 가련한 그 여인네에 겹쳐, 적장을 끌어안고 촉석루에서 투신하던 기생 논개의 마지막 모습이 중첩의 파동으로 그의 칼날에 아련히 자꾸 어른거렸다.
 미천강에 한 떨기 꽃이 조용히 떨어지고 있었다. 순신의 마음은 다시 먹먹해졌다. 순신은 고개를 돌렸다. 바깥은 여전히 어둠이었다.
 그녀의 속치마 끈이 그의 눈길을 한동안 사로잡았다. 성욕과도 같은 수컷본능이 그의 몸속 깊은 심연에서 꿈틀거리며 불덩어리처럼 뜨겁게 치받고 올라왔다. 민망한 일이었다. 묘령의 여인네에게 그 또한 딱히 더 물어볼 말도 없었다. 머리를 두어 번 흔들어 아찔한 환각을 그는 다시 떨쳐냈다. 그리고 쏘는 눈빛으로 좌수사 이순신이 다시 물었다.
 “그럼…… 광양 현감 어영담이 널 이리로 보낸 거냐?”
 여인은 수줍게 웃으며 다시 고개를 저었다.
 “그럼…… 우수사 이억기가……?!”
 전라 우수사 이억기는 한가할 때면 그와 둘이서 바둑을 두며 술을 거나하게 즐길 정도로 가까운 사이였다. 그녀는 다시 고개를 저었고, 짜증을 애써 누르는 듯 이윽고 표정을 꾸미기 시작했다.
 “그럼…… 내 부하 송희립이 너를 여기로 보냈단 말이냐……?!”
 그때에서야 그녀가 고개를 끄떡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소인은 경산에서 온 진랑화라고 하옵니다, 나으리…….”
 현학금(玄鶴琴) 황진이를 무색게 하는 미색이었다. 흐르는 달빛을 받아 호리병을 든 그녀의 얼굴은 어둠 속에서도 황홀하게 빛났다. 은하수처럼 맑고 깊은 그녀의 두 눈에선 이지적인 눈빛이 반짝였다. 그녀의 몸도 그랬다. 묘령의 여인 랑화의 체취가 방안에 자욱했다. 가녀린 그 어깨로 가쁜 숨을 은밀히 몰아쉬는 그녀 랑화를 흘금거리며 좌수사 이순신은 그녀의 젖 냄새를 몸속 깊이 몇 번이고 은밀히 빨아들였다.
 “몽환적인 아름다움의 이 여자는 부하 군관 송희립의 애첩 또한 아닐 테고, 철석같이 나를 믿고 따르는 부하가 희립인데, 야밤에 하릴없이 여자를 가지고 상관의 속내를 한 번 더 떠보겠다는 괘씸한 희롱 또한 아닐 것이다. 그렇다면 아리따운 이 여자는 과연…… 누구란 말인가…….”
 관기가 틀림없었다. 그의 숙소 깊숙이 기웃거리며 흐르는 달빛엔 푸른 달의 모호한 웃음이 박혀 있는 것이다. 마른침 삼켜 불나비의 욕망을 애써 누르며 이순신이 사뭇 점잖게 물었다.
 “지휘관이 여색을 탐하면 장졸들을 통제하기 어렵다는 걸 너도 아느냐……?”
 “예…… 나으리…….”
 어머니와도 같은 그녀의 다정한 그 웃음이 자식 된 자로서의 본분을 고맙게도 그에게 인식시켰다. 숙소 창문 너머 적진의 어둠 속에서 적들이 싸리나무를 태우고 있었다. 결국엔 보이지 않아 찔러 들어갈 수 없는 왜놈들의 인후요 적들의 중심이었다.
 “통제영 휘하의 연해와 섬들에 적의 깃발들이 보란 듯이 휘날리는 꼴을 대체 언제까지 그냥 지켜만 볼 수밖에 없다는 말인가…….”
 포구에 묶인 배들은 밤새 삐걱거리고, 왜놈들이 장악한 섬들에서 왜놈들의 불빛은 어둠을 거푸 깊이 찌르고, 찔러 들어갈 수 없는 적들이 밤마다 불길과 연기로 주고받으며 교신하는 봉화의 내용은 아직도 해독해낼 길이 없는데, 푸른 달빛 아래 몸속 깊이 스며든 여인의 체취는 이리도 못 견디게 황홀하니, 참으로 기이한 밤이었다.
 아군의 방어망이 무너진 지는 이미 오래였다. 왜놈들의 봉화는 그러나 왜놈들의 통신이 여태 살아 있다는 방증이었다. 지휘관으로서 참으로 부끄러운 일이었다. 그는 연거푸 고개를 흔들어 기어코 환각을 떨쳐내고 흔들리려는 마음을 다잡았다. 뽀얗디뽀얀 그녀의 목 언저리를 한동안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이순신은 잔 숨으로 마음을 달래며 애써 점잖은 음성을 흘렸다.
 “괜찮아! 나 혼자 취해 밤새 홀로 술병 기울이더라도 난 정말 괜찮아! 희립이한테 가서 냉큼 전하거라. 호의는 마음으로만 받았느니라. 알았느냐……?”
 “예…… 나으리…….”
 “그럼…… 어서…… 나가보거라…….”
 호리병을 두 손에 받쳐 들고 그녀가 짐짓 쓰게 웃으며 돌아섰다. 야릇한 젖 냄새와 분 냄새가 섞여 아찔하게 한 번 더 그의 마음을 쿡 찔러왔다. 사뭇 서운해하는 눈빛으로 그녀가 이윽고 방을 나서고 있었다. 참으로 보기 힘든 마력(魔力)의 여인네였다. 좌수사 이순신이 고개를 들어 그녀를 갑자기 불러 세웠다.
 “멈추거라!”
 그녀가 움찔하며 멈춰섰다. 그녀 랑화의 입가에 요염한 미소가 잠시 번졌다. 랑화가 환하게 웃으며 나비처럼 살며시 돌아서더니 살포시 웃었다. 그러자 좌수사 이순신이 산채 나물로 조촐하게 차려진 술상을 턱짓으로 가리키며 타이르듯 아주 점잖게 말하는 것이었다.
 “그 술병은 놔두고 가거라!”
 “예?”
 “그 술병은 그냥 여기 놔두고 자네만 나가라니까.”
 “아…… 예…….”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베스트셀러『가련한 여인의 초상』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베스트셀러『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현재 평택 거주,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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