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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탐사: 법의 지배는 가능한가》(3)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 법형식주의 아래 무너진 공정성

조종건 | 편집인 겸 발행인, 한국시민사회재단 상임대표


법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이 물음은 오늘날 대한민국의 핵심을 겨눈다. 법은 본래 모두를 위해 존재해야 하지만, 현실에서는 소수의 기득권을 위해 작동하며 다수를 배제한다. 겉보기에는 공정해 보이지만 실제 적용과 해석은 불평등과 편향을 강화한다. 우리는 법의 형식만 남고 정의의 정신은 사라진 시대에 살고 있다.

통제의 도구로 변질된 법

한국 사회에서 법은 여전히 강력한 통치 수단이다. 정치 권력은 이를 반대 세력을 억압하는 무기로 삼고, 언론은 법치라는 외피를 씌워 정치적 행위를 합리화한다. “법을 지키자”는 말은 더 이상 정의 추구가 아니라 통제와 위협의 언어로 변질됐다. 특히 검찰 권력이 행사하는 선택적 정의는 법을 공정한 기준이 아닌 정치적 무기로 바꾸었다.


론 풀러의 법적 도덕성과 한국의 현실

하버드 법철학자 론 L. 풀러(Lon L. Fuller)는 『법의 도덕성 The Morality of Law』에서 “법은 단지 선언되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공정하게 집행되고, 예측 가능하며, 내부 모순이 없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나 한국의 법체계는 이러한 기준을 외면한다. 법은 선포되지만 일관성과 공정성이 결여돼 있으며, 정치적 편의가 예측 가능성을 왜곡한다.

대표적 사례가 최근 검찰·사법 권력의 남용이다. 윤석열 대통령 정부를 비판하는 언론과 인사들은 신속히 수사·기소되지만, 집권 세력과 가까운 이들은 법 기술을 이유로 수사가 지연되거나 무산된다. 이는 선택적 정의의 전형이며, 국민의 법 신뢰를 무너뜨린다.

풀러의 핵심 조건 요약
법은 공정하게 집행되어야 하고(Fair Application), 시민이 내일을 예측(Predictability)할 수 있을 만큼 안정성과 명확성을 갖추어야 하며, 법규 내부에 모순이 없어야(Freedom from Contradiction) 한다. 다시 말해, 누구나 지킬 수 있고, 앞을 내다볼 수 있으며, 일관되게 적용될 때 비로소 법은 정의에 부합한다는 것이다.

법 위의 법관들?

사법부 내부 인사들이 편향의 상징으로 비칠 때 시민들의 불신은 더욱 깊어진다. 조희대 대법원장은 정치적으로 민감한 사건, 특히 전직 대통령 윤석열 관련 재판 지연 논란에도 침묵으로 일관했다.

더 큰 논란은 윤 대통령 내란 사건을 맡은 지귀연 판사다. 그는 ▲구속기간 산정 조작, ▲반복적 불출석에도 구인영장 미발부, ▲중요 재판기일에 이유 없는 휴가, ▲정치적 연계가 의심되는 인물로부터 향응 수수 의혹 등 중대한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지 판사는 이를 “판사에 대한 뒷조사”라며 일축했고, 이는 사법부의 오만과 불투명성을 드러내며 신뢰를 무너뜨렸다.

문제는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조희대 대법원장 역시 민주주의의 근간을 훼손했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대통령 후보 교체를 시도했다는 의혹과 함께, 전례 없는 ‘신속 재판’을 내세워 단 9일 만에 대법원 판결을 내린 것이다. 더구나 이재명 대통령 후보의 선거법 위반 사건을 갑작스럽게 전원합의체에 붙여 파기환송한 잘못과 전원합의체에 회부된 사건 기록 7만 쪽을 불과 이틀 만에 검토했다는 주장은 상식적으로 납득하기 어렵다.

국민들은 묻는다. 과연 7만 쪽 기록을 제대로 읽고 판결을 내린 것인가? 로그 기록 공개 요구조차 거부하는 것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기록을 충실히 검토하지 않았다면, 내 재판도 과연 제대로 되고 있는 것인가?

조희대 대법원장은 이러한 의혹에 대해 설득력 있는 해명을 내놓지 못하고 있다. 그 결과 사법부에 대한 신뢰는 근본적으로 흔들렸다. 현 대법원장이 사법부의 수장으로 있는 한, 독립성과 공정성의 회복은 요원하다는 것이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실체적 진실 규명이다. 의혹을 명확히 밝히고 재판 과정의 투명성과 정당성을 검증하는 절차 없이는 사법부에 대한 국민적 신뢰를 회복할 수 없다. 민주주의와 법치주의를 지키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진상 규명이 우선되어야 한다.

일상 속의 불공정

공정성의 붕괴는 법정에만 머물지 않는다. 교육 현장에서도 공정은 흔들린다. 수능 사회탐구 영역은 9과목 중 2과목을 선택해 치르는데, 시험지는 한 과목씩만 책상 위에 놓아야 한다. 그러나 무심코 두 과목 시험지를 함께 올려놓는 순간 수능 전체 점수가 0점 처리되는 경우가 매년 발생한다. 문제는 이 규정의 집행 여부가 감독관의 재량에 따라 달라진다는 점이다. 시험 직전 꼼꼼히 확인하는 감독관이 있는가 하면, 대충 넘어가는 경우도 있다. 결국 학생들의 운명이 ‘규정’이라는 이름 아래 천국과 지옥을 오간다. 이는 맥락을 상실한 공정의 전형적 사례이며, 실질적 정의가 실종된 현실을 보여준다. 형식은 갖췄지만 누구도 납득하기 어려운 결과는 결국 법과 제도에 대한 신뢰를 무너뜨린다.

임금 격차, 구조적 불평등의 거울

노동시장에서도 불공정은 뚜렷하다. 동일한 병원 안에서 일하는 의사와 간호사, 그리고 회사에서의 정규직과 비정규직 노동자 간 임금 차이는 단순한 ‘역할 분담’의 문제가 아니다. 그것은 사회 전반에 깊숙이 뿌리내린 구조적 불평등의 산물이다.

의사와 간호사의 경우가 대표적이다. 국세청과 보건복지부 통계에 따르면 전문의의 연평균 소득은 2억~3억 원에 이르며, 대학병원 봉직의조차 1억5천만 원 이상의 연봉을 받는다. 반면 임상 간호사의 평균 연봉은 3천만~5천만 원 수준에 불과하다. 같은 공간에서 환자를 살리기 위해 함께 일하면서도, 간호사의 연봉은 의사의 3분의 1에서 10분의 1에 머문다. 이는 단순한 전문성 차이가 아니라 성별 편중, 과도한 노동 강도, 낮은 사회적 인정이 겹쳐 만들어낸 격차다.

의료현장 임금 격차의 3가지 배경
1. 성별 편중
  • 간호사의 다수는 여성 → 구조적 성별 임금 격차 반영.
2. 과도한 노동 강도
  • 교대근무·장시간 노동·감정노동 등 과부하, 그러나 보상 미흡.
3. 낮은 사회적 인정
  • 의사 협력 파트너이며 환자 돌봄 핵심임에도 의사 보조로 축소 평가, 사회적 지위·보상 불균형.

정규직과 비정규직 간 임금 차이 역시 심각하다. 통계청에 따르면 2023년 기준 정규직 노동자의 월평균 임금은 약 390만 원, 비정규직은 약 200만 원이다. 즉 비정규직 노동자는 정규직의 54% 수준의 임금을 받는 데 그친다.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면서도 고용 형태에 따라 절반 이하의 보상을 받는 현실은 이미 오래된 문제이자 한국 노동시장의 고질적 모순이다.

국민들은 묻는다. 왜 동일한 병원에서, 동일한 현장에서, 동일한 업무를 수행하고도 이토록 큰 임금 격차가 발생하는가? 법과 제도는 이를 정상적인 ‘시장 질서’로 승인하고 있지만, 이는 사실상 제도화된 차별일 뿐이다. 공정성을 회복해야 할 법이 오히려 불평등을 공고히 하는 장치로 전락한 것이다. 의료 현장의 불평등, 고용 형태에 따른 차별적 대우를 그대로 방치한다면 법과 제도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더욱 무너질 수밖에 없다.

따라서 지금 필요한 것은 “시장 논리”라는 가면 뒤에 숨은 불평등의 실체를 드러내는 일이다. 임금 격차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단순히 노동자의 생계 문제가 아니라, 우리 사회가 진정으로 공정과 정의를 회복할 수 있는가에 대한 시금석이다.

정의 없는 합법성(Legality Without Justice)

정치철학자 한나 아렌트(Hannah Arendt)는 “합법성의 외피가 오히려 부정의를 영속시킬 수 있다”고 경고했다. 법의 형식이 구조적 악을 정상화할 수 있다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의 선거제도, 공직 인사, 노동 분쟁, 언론 규제 문제는 아렌트의 경고가 과거의 교훈이 아니라 현재의 현실임을 보여준다.

공정성 상실의 대가

법의 정당성은 예측 가능성과 형평성에 기반한다. 그러나 법적 결과가 정치 성향, 사회적 지위, 자본 권력 또는 노조의 압박에 따라 달라진다면, 국민은 정의에 대한 신뢰를 잃을 수밖에 없다. “법은 강자를 편들고 약자를 벌한다”는 말은 더 이상 냉소가 아니라 현실의 체험이다. 이것은 ‘법의 지배’가 아니라 ‘법에 의한 지배’다.

법을 되찾기 위하여

다시 묻는다. 법은 과연 누구를 위한 것인가? 진정한 법치는 지위나 영향력과 무관하게 모든 이에게 동일하게 적용될 때만 가능하다. 권력자에게 유리하게 해석되고 정의 회피의 수단으로 쓰인다면, 법은 공정의 장치가 아니라 지배의 도구일 뿐이다.

지금 필요한 것은 법의 형식 보존이 아니라 법의 정신 회복이다. 이를 위해서는
투명한 사법 절차,
법조인의 정치적 중립성,
시민 참여 감시제도
가 절실하다.

마지막 질문

법은 누구의 목소리를 반영하고, 누구의 고통을 외면하는가? 이 질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법은 권력자의 것이 아니라 시민의 것이다. 지금이야말로 법을 시민의 손에 되돌려줄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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