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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현종호 소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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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날을 비가 와준 덕분에 눈 앞에 펼쳐지는 세상이 아주 맑았다. 구름장 마침내 걷힌 하늘이 마치 그림처럼 아름다웠다. 먼지만 풀썩이는 논두렁, 밭고랑에 주저앉아서 한숨만 내쉬던 농부들에게 메마른 땅에 여러 날 내린 단비는 참으로 고마운 존재였을 것이다. 사정없이 쏟아져 물속 깊이 꽂히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 바다는 못 견디게 끓어오르고, 수루에 혼자 올라 이른 아침부터 근면히 포효하는 바다를 바라보는 그의 기분은 그러나 무척이나 심란하고도 착잡했다. 일성호가(一聲胡笳)는 오늘도 어김없이 환청으로 귓전을 연방 쑤셔오고, 적선마다 불법(佛法)의 그 요란한 깃발을 내걸고 아득한 물마루 너머 적의 바다 저 멀리서부터 물살을 거슬러 적들이 노 저어 다시 몰려오는 것만 같아 그는 불안하기 이를 데 없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망망대해 저 멀리 뜨거운 입김을 연달아 뿜어내며 혀를 찼다.
조선의 활은 적들의 조총 앞에선 무용지물이었다. 적들이 당도하여 포구로 몰려와 싸워보기도 전에 각 고을의 수령들은 지레 겁을 먹고 무기마저 팽개쳐버린 채 꽁무니 빠지게 달아났었다. 조선의 군대가 상비군이 아니라, 적이 쳐들어오고 나서야 군사를 모으는 제승방략 예비군 체제였다손 치더라도 너무나도 빠른 적들의 진공(進攻)이었다. 소임을 망각한 수령들의 줄행랑은 그러나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다. 부산진성, 동래성이 차례로 으깨어지고 믿었던 신립(申砬)의 탄금대마저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자 임금은 백성들을 버렸고, 불과 20여 일만에 마침내 한성이 함락되니 어가(御駕)는 평양을 거쳐 압록강 가까이 의주까지 달아나야만 했었다. 삽시간에 폐허로 변해버린 국토와 졸지에 쑥대밭이 돼버린 백성들의 농토는 회복될 기미가 아예 없었고, 한 가닥 희망은커녕 절망만이 가득했었다. 승패가 엇갈리는 치열한 전쟁의 뒷전에서, 굶주리고 아프고 여전히 고통받는 건 부쳐 먹을 땅도 없고, 힘없고, 가진 것 없는 저 불쌍한 백성들이었다.
外無匡扶之柱石, 內無決策之棟樑(외무광부지주석, 내무결책지동량)
밖에는 나라를 바로잡을 주춧돌 같은 인물이 없고, 안에는 제대로 계책을 세울 버팀목 기둥 같은 인재가 없는 현실이 이순신은 그저 한탄스러울 뿐이었다. 왜국이 포르투갈에 굽신거리며 조총이라는 신무기를 만들어낼 때, 조선은 고리타분한 성리학에나 빠져 외세의 침략에 대비하긴커녕 탁상공론에만 몰두하며 나라의 앞날은 늘 뒷전이지 않았던가. 썩을 대로 썩고 거미줄처럼 얽히고설킨 당파의 연결고리를 대체 언제, 누가 제대로 끊어버릴 수 있다는 말인가.
사정이 이럴 때, 십만양병설을 꾸준히 주장하며 조선의 허술한 방비 태세를 시종 질타했던 종친 율곡 이이라도 살아 있으면 좋으련만 왜란이 발발하기도 전에 그는 이미 세상을 떠났고, 류성룡 한 분만이 살아남아서 나랏일을 그래도 제대로 걱정하고 있으니.
적들이 포진한 가덕도 해역을 한 번 휙 둘러보고 나서 그는 본영으로 돌아와 잠시 눈을 붙였다. 숙영 밖이 한참 시끄러웠다. 장졸들을 풀어 해안 곳곳을 샅샅이 뒤진 끝에, 통제영을 이탈해 뭍으로 도망하던 병사를 군관이 잡아 온 것이다. 전염병으로 인한 사망자가 이순신의 조선 수군 6천여 명 가운데 벌써 600명이 훨씬 넘었다. 뱃멀미 말고 무슨 골칫거리가 있겠는가 싶었는데, 설사와 구토를 해대는 장졸들은 갈수록 점점 늘어나고 있었다. 선실마다 고약한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악취 자욱한 선실에선 기절하는 장졸들이 속출하고 퀴퀴한 냄새로 가득한 선실 안은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누구도 손 쓸 수 없는 상황이 이어지고, 고열에 시달리며 연일 헛소릴 해대고, 살기를 스스로 포기하는 병사들도 설상가상으로 점점 늘어만 갔다. 그들의 증세는 두말할 것도 없이 이질이었다. 악취 가득한 선실은 날마다 토사물과 배설물로 넘쳐나니 심각한 문제였다. 마땅한 약도 없었다. 전염병이라 감염된 환자들을 일단 격리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었다. 이순신은 그런 이질에 다행히 아직 걸리지 않고 있었으나 사령관이라고 해서 이질의 고통에서 쉽게 벗어날 순 없었다. 그 역시 요의(尿意)를 느끼고 먹고 마시며 배설하는 사람이 아니던가. 병력 부족에 날마다 시달렸으니 도망병을 잡아 오는 일은 이제 일상사가 되어 있었다.
병사는 흠씬 두들겨 맞아 잔뜩 일그러진 얼굴에 군데군데 터진 입술로 해안가 자갈밭에 무릎 꿇려진 채, 손바닥이 닳도록 싹싹 비벼대고 있었다. 두 눈은 움푹 들어간 데다 병사의 입안에선 모래알들이 서걱거렸다. 그가 입을 벌리자 촘촘히 박힌 옥니가 볼썽사납게 드러났다. 오래 주린 듯 탈영병은 피골이 접한 몸으로 시종 울먹이고 또 울먹이며 통제사 이순신 앞에서 목숨을 누차 구걸하였다.
“도망할 생각은 추호도 없었습니다, 나으리! 갑자기 혼자되신 어머니랑 자식들 생사만이라도 확인하고 나서 저는 기필코 병영으로 다시 돌아오려고 했습니다, 사또! 곤장은 얼마든지 맞을 터이니 목숨만이라도…… 제발…… 사…… 사…… 살려주십시오, 통제사 나으리…….”
통제사 이순신이 그에게 친히 물었다.
“수군이 수영을 함부로 이탈하면 어찌 되는지 너는 그걸 정녕 몰랐단 말이냐?”
“왜놈들의 칼을 맞아 아버님이…… 열흘 전에 돌아가셨고, 불효자식 소인은 돌아가신 아버님의 장례도 아직 치르지 못했습니다, 나으리. 갑자기 혼자되신 어머니마저…… 요즘 몹시…… 편찮으시다는 말을 전해 듣고…….”
병사는 자갈밭에 무릎 꿇려진 채로 시종 울먹이며 말끝을 흐렸다. 병사의 눈빛은 진실을 말하고 있었다. 얼마 전에 가까이 여수 정대수 장군의 집에 모셔다 놓은 어머니 초계변씨의 얼굴이 그의 눈앞에 퍼뜩 떠올랐다가 점점 서서히 멀어져갔다. 그도 안다. 생명은 미물에게조차도 소중하다는 것을.
탈영병을 우수사 이억기와 같이 잡아 온 군관 나대용이 통제사 이순신의 눈치를 슬금슬금 살피며 물었다.
“어찌하오리까, 통제사 영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은 고개를 돌려 병사의 시선을 피했다. 그리고 그는 단호한 어조로 명했다.
“집행하라!”
그의 머리는 대나무 장대에 꽂혀 일벌백계(一罰百戒)로 진중(陣中) 맨 꼭대기에 세워졌다.
역사 해설 (편집부)
• 국가 시스템의 붕괴와 현장의 절망: 전염병·보급난·지휘체계 혼란이 한꺼번에 덮친 상황이 구체 감각으로 재현됩니다.
• 군율과 인간적 연민의 충돌: 탈영병 처형 장면은 ‘조직 유지’와 ‘개인 사정’ 사이의 비극적 충돌을 보여줍니다.
• 문장 속 사료 어휘(外無匡扶之柱石[외무광부지주석] 內無決策之棟樑[내무결책지동량])로 당시 엘리트의 자기반성과 사상적 갈등을 드러냅니다.
현대적 의미 (편집부)
1. 보건·안보 일체성: 전염병이 전장 판도를 바꾼다는 사실—오늘의 팬데믹 경험과 직결.
2. 규율과 인권의 경계: 비상상황일수록 절차와 연민의 균형 감각이 필요.
3. 책임의 문제: 중앙 무능의 대가를 늘 가장 약한 이들이 치른다는 구조적 현실.
본문 핵심 한자어·성구 해설 (편집부)
• 일성호가[一聲胡笳]: 오랑캐(변방)의 피리 소리 한 가락→ 쓸쓸하고 불길한 정조를 비유하는 문학적 표현.
• 불법[佛法]: 불교의 가르침. 본문에서는 적선의 깃발에 적힌 종교 표어 맥락.
• 물마루(한자 없음 / 순우리말): 수평선 근처 물결 윗부분.
• 진공[進攻]: 공격해 들어감(공세).
• 신립[申砬]: 조선 장수 신립(인명 한자).
• 탄금대[彈琴臺]: 신립이 왜군과 싸운 지형 명칭(지명 한자).
• 어가[御駕]: 임금이 타는 가마, 혹은 임금의 행차 자체.
• 外無匡扶之柱石[외무광부지주석]: 밖에는 나라를 바로잡아 떠받칠 기둥돌이 없다.(외부 구원 세력 부재의 탄식)
• 內無決策之棟樑[내무결책지동량]: 안에는 결단·계책을 세울 버팀목(기둥)이 없다.(조정 핵심 리더십 부재)
• 통제영[統制營]: 삼도수군통제사의 본영(사령부).
• 요의[尿意]: 소변이 마려운 느낌.
• 일벌백계[一罰百戒]: 한 사람을 벌하여 여러 사람의 경계로 삼음.
• 진중[陣中]: 군대가 진을 치고 있는 안, 진영 내부.
• 제승방략[制勝方略]: 승리를 제어(통제)하는 방책→ ‘유사시 각지 병력을 모아 방어’하던 조선의 군사 운용 개념.
• 울궈먹듯(속어)·꽁무니 빠지다(속담)→ 한자 성어 아님(구어·관용 표현).
• 샅샅이→ 순우리말(한자 표기 관례 없음).
• 자갈밭→ 순우리말.
• 옥니[玉齒 | 옥치]: 어근에서 ‘옥같이 가지런한 이’ 뜻. 본문은 ‘촘촘히 박힌 옥니’로 비유적 사용.
• 나대용·이억기·정대수(인명)→ 고유명. 문헌별 한자 표기가 상이해 본문에는 한글 그대로 표기.
문장별 포인트 해설 (편집부)
• “…御駕는 … 의주까지”: 어가(임금의 행차) 피난→ 국가 최고 지도부의 후퇴를 함축.
• “外無… 內無…”: 상·하 문장을 짝지어 국가 역량의 외·내 동시 붕괴를 압축적으로 표현.
• “一罰百戒로 … 맨 꼭대기에 세워졌다”: 군율 엄정과 지휘권 확립 장면. 당시 전시체제의 냉혹함을 드러냄.
• “制勝方略 예비군 체제”: 상비군 부재 속 ‘사변 시 동원’ 체계의 한계를 지적.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가련한 여인의 초상』, 『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역임
• 현재 평택 거주,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