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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현종호 |
제6회-1
임진년 2월 10일.
안개비가 오면서 흐렸다가 갰다 했다. 동헌에 나가서 공무를 보았다.
김인문(金仁問)이 감영에서 돌아왔다. 순찰사 이광이 보내온 편지를 보니, 통역관들이 뇌물을 많이 받고, 조선인들의 길 안내로 왜(倭)가 명을 치러 간다고 명나라에 거짓을 말하는 바람에 우리나라와 왜국이 딴 뜻을 품는 것이 아닌가 하고 명나라가 의심하게 하였으니, 흉포하고 패악한 짓거리는 언급할 가치조차 없다. 통역관들이 이미 잡혔다고는 하지만 해괴하고 분통함을 참을 수 없다.
임진년 2월 19일 맑음.
본영을 떠나 여수 백야곶의 감목관(監牧官, 목장을 맡아보던 종6품의 무관)이 있는 곳으로 가니 순천부사 권준이 그의 아우를 데리고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기생도 와 있었다.
비가 온 뒤라 푸른 산 곳곳에 활짝 피어난 진달래꽃과 화사한 봄날의 경치가 형언할 수 없이 아름다웠다. 저물어서야 이목구미로 가서 배를 타고 고흥의 여도에 이르니, 흥양 현감 배홍립과 여도권관 황옥천이 나와서 맞았다. 포구의 방비 태세를 일일이 살피고 검열했다. 흥양 현감은 다음 날 제사를 지내야 한다며 집으로 먼저 갔다.
도원수 권율과 순천부사 권준은, 굳이 따지자면, 같은 문중의 13촌 동서 관계였다. 상큼한 봄날에, 뜬금없이 그가 데려온 기생은 황진이마저도 울고 갈 미색이었다. 뽀얀 살결에 오뚝한 콧날과 반짝이는 눈망울, 이지적인 그 여인의 눈매가 이순신의 눈길을 몹시 끌었다. 아름다운 그녀의 사뿐한 움직임은 마치 나비의 날갯짓과도 같았다. 무딘 사내의 가슴이 갑자기 콩닥거리고, 하얀 수줍음으로 피어나 목련처럼 화사하게 웃는 그녀의 미소가 햇빛을 받아 그날따라 더 아름다웠다. 간만에 미인을 만나 같이 걸으며 봄의 꽃을 함께 감상하고 말을 섞기까지 하다니, 이순신은 감회가 무척 새로웠다. 칼 찬 무인 이순신은 상큼한 봄날의 시원한 대기를 몸속 깊이 거듭 빨아들이며 꽃나무 앞에서 점점 황홀한 경지로 빠져들었다. 땅끝마을 해남의 관기로 있다는 그 기생의 이름을 물으니 어란이라 했다.
임진년 2월 22일 맑음.
아침에 공무를 보고 나서 녹도로 갔다. 황숙도와 같이 갔다. 먼저 흥양 전선소로 가 배와 집기류를 직접 점검하고 나서 녹도만호 정운이 새로 쌓은 문루 위로 올라가 보니 경치가 군내에선 으뜸으로 수려했다. 녹도만호 정운의 극진한 정성이 미치지 않은 곳이 없었다. 흥양 현감 배홍립과 능성 현령 황숙도와 녹도만호 정운과 같이 거나하게 취하도록 마시고, 대포 쏘는 광경을 지켜보다가 어두워져서야 헤어졌다.
임진년 4월 13일.
동헌으로 가 공무를 보고 나서 활 열다섯 순(화살 75발)을 쏘았다.
왜적이 쳐들어왔다는 사실을 그도 이틀이 지나서야 알았다. 그동안 그가 우려했던 일이 마침내 조선에서 터지고야 만 것이다. 왜국으로 보낸 세작들이 보내오는 첩보와 왜놈들에게 납치됐다가 도망쳐 나온 도공들이 들려준 정보를 통해 언젠가는 조총으로 무장한 적들이 떼로 몰려오리라는 것을 이순신 역시도 진작부터 예상하였었다.
명종 때 왜적 7천여 명이 침입하였던 을묘왜변은 임진왜란을 예고하는 신호탄과도 같은 경고였던 것이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왜 열도의 전국시대를 갈무리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나서 좌수사에 부임하자마자 이순신은 오합지졸(烏合之卒)의 조선 수군을 혹독하게 단련시키며 1년이 넘게 전쟁준비에 박차를 가해 왔었다. 열도 통일을 놓고 자기네들끼리 피를 뿌리며 싸워대느라 육전(陸戰)에 단련된 적들은 상대편 배에 올라가 근접전을 펼치는 백병전(白兵戰)에 그만큼 능한 자들이었다.
절대적으로 유리한 상황에서 적을 상대해야 싸움에서 쉽게 이기는 법이었다. 근접전을 피하고 함포로 우선 함대를 깨부수는 것만이 상대적으로 육전에 취약한 조선 수군이 싸움에서 이길 수 있는 비결이었다. 류성룡 대감이 전에 그에게 보내온 『제손증손방략』의 전술에 적들을 물리칠 그 비책이 들어가 있었다. 고리타분한 성리학에만 취해 무턱대고 수군 철폐론까지 고집하며 적의 침입에 늘 안이하게 대처하는 조정은 그에게 초조와 불안감만 증폭시킬 뿐이었다.
이순신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적들이 아군의 전선(戰船)에 접근하기 전에 포격전으로 적함들을 일단 깨부수고 나서 한꺼번에 불살라버리는 것만이 필살기임을 깨닫고, 조정의 신료들이 동과 서로 갈라져 지겹도록 싸움을 일삼는 와중에도 우수사 이억기와 그는 교란작전을 수백 번 되풀이하며 포격전을 착실히 준비해왔었다.
임진년 4월 18일, 아침에 흐렸다.
오후 2시쯤 영남 우수사가 공문을 보내왔는데, 동래성도 함락되고 양산과 울산의 두 수령도 조방장(助防將)으로서 도우러 갔으나 모두 패했다고 하니 분통함과 원통함을 이루 다 말할 수가 없다.
정발(鄭撥)이 사수하던 부산진성이 속수무책으로 무너지자 적들은 파죽지세로 몰려와 동래성을 에워싸고 무차별 공격을 퍼부었다. 동래부사 송상현의 휘하에서 3천여 명의 관민으로 적들이 성 가까이 접근하는 것을 막기 위해 성 앞에 마름쇠(쇠꼬챙이)를 설치하고 버텼으나 중과부적(衆寡不敵)이었다. 교활한 적들은 마름쇠 위에 삼나무 널빤지를 깔고 접근하여 무지막지하게 공격을 퍼부어댔다. 수세에 몰려 무기마저 결국 바닥이 나버리자 백성들은 기왓장을 뜯어내 던지고 파를 썰어서 왜군에게 뿌려 가면서 끝까지 죽기 살기로 저항한다. 성이 끝내 함락되자 동래부사 송상현은 조복(朝服)을 가져오게 하여 갑옷 위에 입고 의자에 걸터앉아 왜적이 들이닥쳐도 미동조차 하지 않았다.
“내가 지금 여기서 이대로 죽을지언정 길을 빌려줄 수는 없느니라.”
송상현의 장렬한 죽음은 이순신에겐 가슴 저미는 슬픔이요 아픔이었다. 눈물겨웠던 그들의 저항은 훗날 ‘동래파전’의 유래로서 기억된다.
임진년 4월 27일, 좌수사 이순신은 군관들에게 여수로 집결하라는 소집 명령을 내린다. 명령에 따라 이순신 막하의 장수들이 여수 본영으로 곧 모여들었다. 이억기의 전라우수군은 그러나 며칠째 깜깜무소식이었다. 해남을 지키던 우수사 이억기의 구원선 부대가 어서 와주기만을 노심초사하며 기다리는 이순신에게 경상 우수사 원균이 율포만호 이영남을 전라좌수군 사령부로 보내 지원을 요청해온다.
임진년(1592년), 5월 1일.
날씨는 흐렸지만 비는 안 오고 남풍이 크게 불었다. 진해루(鎭海樓)에 앉아서 방답첨사 이순신, 흥양현감 배홍립, 녹도만호 정운 등을 불러들였다. 그들 모두 격분하여 제 한 몸을 걱정하지 않고 함께 끝까지 싸우기로 맹세하니 실로 의사들이라 할 만하다.
전라우수군과의 합세가 그토록 간절하건만 우수사 이억기는 곧 합류하겠다는 말만 툭 던져놓고 출전을 약속한 4월 30일이 지나도록 함대를 움직이지 않으니 복장이 터질 일이었다. 남해 현령, 미조항 첨사, 상주포 곡포 평산포 만호 등은 적이 온다는 소문을 듣자마자 지레 겁을 먹고 무기마저 팽개쳐버린 채 모두 달아난 데다 군관들마저 줄곧 시큰둥한 반응을 보이자 좌수사 이순신 앞에 무릎을 꿇고 원균의 부하 이영남이 마침내 울먹이며 호소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제발 도와주십시오, 좌수사 영감! 전라좌수군 장군들이 어쨌든 도와주셔야 벼랑 끝으로 몰린 우리 경상우수군을 구해낼 수 있는 겁니다, 좌수사 영감…….”
전라좌수영에 이미 조정의 출동명령이 내려진 상태였지만 좌수사 이순신은 그러나 요지부동이었다. 그는 출동명령을 절대 쉽게 내리려 하지 않았다. 왜선 350여 척이 부산포 어딘가에 이미 포진해 방어태세를 굳건히 하고 있고, 적들이 파죽지세로 한성을 향해 북진을 거듭하는 시점에서 그것은 무모한 지원이었다.
무모한 작전은 패배로 직결되는 법. 승부사 이순신에게 허망한 패배란 결코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적들이 부산진성, 동래성을 이미 점령하고 방어태세를 굳건히 한 악화일로의 전황에서, 그나마 얼마 안 되는 함대마저 빼돌려 하루 반나절이나 걸리는 경상도 물길이 어떤지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무턱대고 경상우수군을 지원한다는 건 참패가 불 보듯 뻔한 일일 수밖에. 군관들 또한 서로 눈만 멀뚱거리는데, 녹도만호 정운이 자리에서 갑자기 벌떡 일어나더니 망설이는 이순신에게 출동을 촉구하듯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좌중을 한껏 꾸짖어대는 것이 아닌가.
“왜놈들을 무찌르는 데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는 겁니다. 적들의 예봉(銳鋒)을 바로 꺾어버려야 전라도까지 우리가 어쨌든 지켜낼 수 있는 겁니다, 영감.”
그러나 장수들은, 우리 지역을 지켜내기도 버거운데 남의 도까지 어떻게 무턱대고 가겠느냐며 출전을 여전히 꺼렸다. 그러자 지도만호(智島萬戶) 송희립이 이순신 앞에 눈물까지 글썽이며 목소리를 한층 높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간악한 왜놈들을 쳐부수는 일에 어찌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있겠습니까, 좌수사 영감…….”
“…….”
“…….”
【편집부 해설】
제6회-1은 전쟁 전야(戰爭 前夜)의 긴장과 이순신의 인간적 면모가 교차하는 결정적 순간을 보여준다. 표면적으로는 여수–고흥–녹도로 이어지는 순찰 기록이지만, 그 안에는 세 가지 축이 긴밀히 엮여 있다.
첫째, 조선 조정의 무능과 내부 균열.
통역관들의 매수, 명나라의 오해, 신료들의 분열은 이미 조선의 안보 체계가 내부에서부터 무너지고 있음을 드러낸다. ‘을묘왜변’ 이후 누적된 경고는 무시되었고, 전쟁을 대비해야 할 조정은 학문적 논쟁과 파벌 싸움에 잠겨 있었다.
둘째, 이순신의 고독한 준비와 군인으로서의 직감.
그는 백성에게서 수집한 정보, 도공의 증언, 일본 내부 정세를 분석하며 전쟁의 도래를 이미 예견했다. 전라좌수사 부임 직후부터 조선 수군을 혹독히 단련한 것도 이 때문이다. 장수들이 동요하거나 회피하는 장면과 달리, 그는 이미 ‘결정적 전투’의 전략을 정교하게 준비해 가고 있다.
셋째, 인간 이순신의 감정.
백야곶과 여도에서 만난 봄 풍경, 아름다운 기생 어란과의 짧은 교류는 전쟁 전야의 살풍경 속에 드물게 비치는 인간적 온기를 제공한다. 그러나 그 감정의 순간조차 곧 전장의 그림자가 덮어버린다. 그 대비는 오히려 이순신이 감내해야 할 외로움과 책임의 무게를 더욱 선명하게 한다. 이 대목에서 가장 돋보이는 것은 “착실한 준비 vs 흔들리는 조선”이라는 대조다. 조선의 방비가 총체적으로 무너지는 가운데, 이순신과 정운·송희립 같은 몇몇 장수들만이 유일하게 현실을 직시하고 있다. 이 회차는 곧 이어질 옥포–사천–한산으로 이어지는 승전의 서막을 열기 전, “이순신은 애초부터 전쟁의 성패를 계산하고 있었다”는 사실을 독자에게 강렬하게 각인시킨다.
【본문 어구 해설 — 제6회 1편】
▪ 동헌(東軒, Local Government Office)— 수령이 근무하던 관청 건물. 행정과 재판이 이루어지던 곳.
▪ 김인문(金仁問, Kim In-mun)— 조선 관료로, 감영에서 파견되어 소식을 전한 인물.
▪ 감영(監營, Provincial Headquarters)— 관찰사(감사)가 주재하던 지방 행정 본부.
▪ 순찰사(巡察使, Provincial Governor)— 각 도의 행정을 총괄하던 최고 행정관.
▪ 이광(李洸, Yi Gwang)— 전라좌도 순찰사. 이순신과 공조하던 상급 관리.
▪ 백야곶(白夜串, Baegyagot Cape)— 여수 근처의 해안 마을. 감목관이 있던 목장 지역.
▪ 순천부사 권준(順天府使 權準, Mayor of Suncheon, Kwon Jun)— 순천부 행정 책임자이자 권율의 문중 친족.
▪ 여도권관(麗島權官, Yeo-do Officer)— 여도 지역의 하급 관리. 포구 방비를 담당함.
▪ 흥양 현감(興陽縣監, Magistrate of Heungyang)— 고흥 지역의 지방 행정책임자.
▪ 도원수(都元帥, Commander-in-Chief)— 육군 최고 지휘관. 전국 군사 작전을 통괄.
▪ 권율(權慄, Kwon Yul)— 도원수. 행주대첩의 영웅으로, 이순신과 협력한 장군.
▪ 황숙도(黃叔道, Hwang Suk-do)— 능성 현령. 이순신의 부대 점검에 동행한 무관.
▪ 녹도만호(鹿島萬戶, Nokdo Commander)— 녹도(현재 거문도 일대) 방어 책임 장교.
▪ 문루(門樓, Gate Pavilion)— 성문 위의 누각. 관측 및 경계용 건축물.
▪ 능성 현령(綾城縣令, Magistrate of Neungseong)— 전남 곡성·보성 인근의 지방 수령.
▪ 배홍립(裵弘立, Bae Hong-rip)— 흥양 현감. 전선과 방어태세를 점검한 인물.
▪ 정운(鄭運, Jeong Un)— 녹도만호.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한 장수.
▪ 갈무리(–, Preparation / Consolidation)— 일을 마무리하고 정리한다는 뜻. “전국시대의 끝을 갈무리하다.”
▪ 필살기(必殺技, Decisive Strike)— 반드시 적을 제압하는 전술 또는 비책.
▪ 조방장(助防將, Assistant Defense Officer)— 성을 지키는 수비 보조장교.
▪ 정발(鄭撥, Jeong Bal)— 부산진성 수비장. 초전에서 순절한 장수.
▪ 중과부적(衆寡不敵, Outnumbered)— 적이 많아 이길 수 없는 형세.
▪ 조복(朝服, Court Robe)— 조정의 예복. 벼슬아치가 공식 석상에서 입는 복장.
▪ 동래파전(東萊破戰, Battle of Dongnae /“Dongnae Pancake” legend)— 동래성 전투를 상징하는 설화적 표현. 백성의 희생을 기리는 말.
▪ 막하(幕下, Subordinates)— 지휘관 아래 부하 장수나 참모.
▪ 율포만호(栗浦萬戶, Commander of Yulpo)— 전남 보성 율포 지역의 수군 책임자.
▪ 진해루(鎭海樓, Command Pavilion of Yeosu)— 여수 전라좌수영의 누각. 수군 회의·연회 장소.
▪ 방답첨사(防踏僉使, Commander of Bangdap)— 여수 방답진의 수비 책임 장교.
▪ 남해 현령(南海縣令, Magistrate of Namhae)— 경남 남해의 지방 수령.
▪ 미조항 첨사(彌助項僉使, Commander of Mijo Port)— 남해 미조항 방어 담당 장교.
▪ 상주포·곡포·평산포 만호(尙州浦·谷浦·平山浦 萬戶)— 남해안 각 포구의 수비 책임자들.
▪ 예봉(銳鋒, Sharp Edge)— 날카로운 창끝. 군사적으로 적의 공격 기세를 비유함.
▪ 지도만호(智島萬戶, Commander of Jido)— 전남 완도 인근 지도의 수비 책임 장교.
【현대적 의미】
제6회-1의 서사는 단순한 역사 회상이 아니라, 오늘의 한국 사회가 마주한 리더십·조직·윤리의 문제와 맞닿아 있다.
1. 위기 앞에서 조직은 쉽게 흔들리지만, 개인의 준비는 흔들리지 않는다.
조선의 관료 체계가 붕괴되는 와중에도 이순신은 정보 수집–전술 개발–군대 훈련을 1년 넘게 멈추지 않았다. 오늘의 공직사회나 기업, 전문 조직이 가져야 할 태도 역시 같다. 위기는 집단 내부에서 시작되지만, 돌파는 준비된 한 사람에게서 시작되기 때문이다.
2. 눈앞의 이해관계와 파벌 싸움은 국가를 가장 먼저 무너뜨린다.
조정의 갈등, 책임 회피, 출동을 미루는 장수들… 이 장면들은 오늘의 행정·정치의 문제와 놀라울 만큼 닮아 있다. 공동체의 위험보다 ‘내 자리’를 우선할 때, 재난은 이미 시작된 것이다.
3. “우리 도와 남의 도가 따로 없다.” — 공동체의 생존 원리
정운과 송희립의 절규는 지역주의·부처 이기주의에 갇힌 오늘의 한국 사회에도 이어진다. 국가적 위기, 기후위기, 전염병, 경제 충격 앞에서 “우리 부처·우리 지역부터”라는 사고는 이미 실패한 전략이다. 협력 없이는 생존조차 없다.
4. 이순신의 감정 장면은 리더의 ‘인간다움’을 다시 묻는다.
어란의 미소 앞에서 잠시 인간으로 돌아온 이순신의 모습은 리더가 완전무결한 영웅이 아니라, 감정과 고뇌를 지닌 존재임을 보여준다. 리더십의 힘은 무오류에서 오지 않는다. 감정을 인정할 줄 아는 사람만이 결정적 순간에 올바른 선택을 한다.
5. 전쟁은 갑자기 오지 않는다. 조짐은 항상 먼저 온다.
을묘왜변·도공의 첩보·일본의 군비 강화… 징후를 알아보는 눈을 가진 사람은 위기를 이미 보고 있었다. 오늘의 사회도 같다. 안전, 환경, 안보, 기술, 양극화— 문제는 갑자기 발생하지 않는다. 문제는 대비하지 않은 순간 재앙이 된다.
핵심 메시지
“위기를 막는 것은 제도가 아니라 준비된 한 사람이다.”
이순신이 보여준 치밀한 대비와 고독한 결단은 오늘의 한국 사회가 리더에게 요구해야 할 가장 본질적 기준이다.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가련한 여인의 초상』, 『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역임
• 현재 평택 거주,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