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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현종호 |
(제7회)-2
정유년(1597년) 6월 1일, 비.
며칠째 장대비가 퍼부었다. 일찍 출발하여 청수역(지금의 하동 정수리) 시냇가 정자에 이르러 말을 쉬게 하였다. 저물녘에 호조 참판 박호원의 집을 찾아가 농노의 집에서 자게 되었는데, 주인이 반갑게 맞기는 하였으나 잠자는 방이 불편하여 간신히 밤을 지냈다. 밤새도록 비가 퍼부었다.
다음 날에도 비가 오다 개다 하였다. 일찍 출발하여 단계(丹溪, 산청 신등) 시냇가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늦게 삼가현(합천군 삼가면)에 당도하였으나 현감 박몽득이 자리를 비우고 백마산성으로 가 있던 터라 무너진 빈 객사에서 겨우 잠을 잤다. 고을 사람들이 밥을 지어서 먹게 했으나 더는 얻어먹지 말라고 나는 종들에게 타일렀다.
다음 날에도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아침에 길을 갈 채비하는데, 도원수의 군관 유홍이 흥양에서 와, 앞이 안 보일 정도로 비가 퍼붓는다고 하였다. 불편한 객사에서 어쩔 수 없이 하루 더 묵어야 했다. 이튿날 아침에 들으니, 종들이 고을 사람들의 밥을 얻어먹었다고 하기에 나는 사내종들에게 매질하고 밥을 한 쌀만큼을 돌려주었다.
정유년 6월 4일, 흐리다가 맑음.
일찍 채비하여 길을 가려는데, 현감 박몽득이 문안편지와 함께 노자까지 보내왔다. 낮에 합천 땅에 도착하여 관아에서 10리쯤 떨어진 괴목정 홰나무 아래에서 아침밥을 먹었다. 몹시 더워서 말을 한참 쉬게 하고, 다시 10리를 더 가니, 도원수 권율의 진(陳)이 그때에서야 모습을 서서히 드러내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저녁에 정원명의 집으로 가니, 도원수 권율이 부하 군관 권승경을 보내 상중인 그를 찾아와 조문하였다.
“상중에 피곤할 터이니 몸이 회복되시는 대로 천천히 오셔도 된다는 도원수의 지시가 있었습니다, 장군.”
군관 권승경(權承慶)은 도원수 권율의 조카였다. 영의정이었던 권철(權轍)은 권율의 부친이었고, 좌의정 이항복(李恒福)은 권율의 사위가 되고, 부하 군관 권승경이 그의 조카라니, 도원수 권율의 집안이 조선의 요직을 차지하고 정치 권력의 힘으로 조정을 쥐락펴락하는 꼴이었다.
도원수는 영의정을 지낸 권철(權轍)의 막내아들로 가문의 화려한 내력과 좌의정에 오른 사위 이항복의 권세를 등에 업고 무소불위(無所不爲)의 정치 권력으로 전쟁을 수행하는 자였다. 하늘이 그런 그를 그래도 도운 덕분이었을까…….
환갑의 나이에도 그는 이치에서 이겼고, 수원에서 적들을 아주 쉽게 물리쳤고, 행주에서도 싸워서 크게 이겼다. 배려심이 부족해 장졸들을 무자비할 정도로 다루는 것을 지휘관의 용맹으로 여기며 폭력을 은근히 즐기는 권율 도원수였다. 비변사의 계속된 반대에도 불구하고 영의정 류성룡과 이순신 자기가 여러 번 조정에 천거하여 어쨌든 무탈하게 도원수에까지 올랐던 만큼 그래도 자기를 은인으로 배려해주는 듯싶었으나 도원수의 그런 배려가 이순신은 몹시 불편할 뿐이었다. 8척의 키에 걸맞게 기골이 장대한 권율 역시 우둔하게 늙어서 정보가 없기는 마찬가지였고, 여색을 밝히고, 군관들을 통솔하는 능력이 그 역시도 모자라는 육군 총사령관이었다. 연일 보채고 울먹이는 임금의 처지를 생각해서인지 명나라 군관들 앞에서 그는 밑도 끝도 없이 작아지고 움츠러들었다. 왜적에게 분개한 나머지 붙잡혀온 포로의 배를 갈라 간을 끄집어내 그 자리에서 질겅질겅 씹어댈 정도로 분노를 조절하지 못하는 총사령관이 또한 권율 도원수가 아니던가.
저녁엔 수령 우치적이 찾아오고, 정사준이 이순신을 또 찾아와서 통제사 원균의 망령됨을 낱낱이 고하였다. 전라 병마사 이복남이 아침 식사 전에 다시 찾아와 원균을 씹어대며 혀를 찼다. 정원명이 한산도에서 돌아와 흉악한 자 원균의 소행들을 다시 들려주며 탄식하였다. 그다음 날엔 흉악한 그 원균이 놀랍게도 편지를 보내 조문하였는데, 그것 역시 도원수의 지시가 있었음이 틀림없었다. 중죄인 이순신은 간사하기 이를 데 없는 원균이 그저 괘씸할 뿐이었다.
그날 저녁 무렵엔 이경신이 한산도에서 찾아와선, 원균이 부하의 아내에게 한눈에 꽂혀서 교역을 구실삼아 뭍으로 보내놓고 사통하려다 그의 아내가 발악하며 고함을 지르자 결국 그만두었다며 또 혀를 찼다. 전 광양 현감 김성(金惺)까지 그를 찾아와서 항간에 떠도는 소문들을 또한 전하는데, 하나같이 원균에 관한 일들이었다. 대역죄인(?) 이순신은 한나절 내내 어처구니가 없고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남원의 정탐이 돌아와서 전하기를, 권율 도원수가 명나라 총병 양원(楊元)을 영접할 일로 전주로 급히 달려갔다고 했다. 이런저런 이유로 늘 쓸데없이 바쁘기만 한 권율 육군 총사령관이었다. 본인의 행색이 아주 엉망이라 이순신은 정탐 앞에서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체찰사 이원익이 구례로 군관을 보내 모친상을 당한 그를 조문하고 나서 저녁에 보자고 했다. 여드레 동안 퍼부어진 고문 후유증으로 벌써 판단이 흐려진 때문이었을까, 체찰사 또한 자신이 역모를 꾀했는가를 조사하기 위해 임금이 내려보낸 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언뜻언뜻 들기도 하였으나 그것은 분명 오해일 것이었다. 순신은 씁쓸히 기억을 더듬었다. 그는 의금부 형틀에서 죽어가는 자신의 목숨을 구해주었을 정도로 진정한 은인이 아니었던가.
세력화된 장군 이순신을 서둘러 죽여 없애야 하는데, 이틀이 걸려도 형 집행을 할 수 없으니 임금은 그저 기가 막힐 따름이었다. 체찰사 이원익이 요지부동인 때문이었다. 전시 직무 총사령관 도체찰사 이원익의 권한은 막강했다. 문무백관 200명 모두가 역적 이순신을 당장 죽여야 마땅하다고 외쳐댔으나 전시 상태의 모든 권한을 쥐고 있는 체찰사 이원익의 승낙 없이는 임금으로서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시간은 치닫고, 거듭되는 선조의 형 집행 재촉에 체찰사 이원익이 마침내 입을 연다.
“전하께서 전시에 신을 폐하지 못하시는 것처럼 신 또한 전쟁 중에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을 해임할 수 없사옵니다, 전하!”
이원익이 소복을 단정히 차려입고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둘 사이에 한동안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이원익이 오랜 침묵을 깨더니,
“원균의 기만함과 포악함이 이리 심한데도 임금이 살피지 못하니 나랏일을 대체 어찌하겠는가…….”
라며 한숨을 연거푸 몰아쉬는 것이었다.
다음 날엔 박천군수 류해(柳海)가 그를 찾아와 의금부 감옥에 갇힌 이덕룡을 고소한 자가 세 차례나 곤장을 맞고 억울하게 형틀에서 죽어가고, 과천의 유향소 수장 안홍제(安弘濟) 등은 이상공(李尙公)에게 말과 스무 살 난 여종을 바치고 감옥에서 풀려났다며 혀를 차대니, 백전(白錢)의 돈으로 죽은 혼을 살리는 격이었다. 종군하는 이순신은 한동안 비통한 마음을 금하지 못한다.
박천군수 류해가 다음 날 아침에 한산도로 간다기에 두 수사(水使) 이억기와 배설(裵楔)에게 그는 편지로 안부를 물었다. 늦게 체찰사 이원익의 종사관 김광엽이 진주에서 구례로 들어오고, 여러 번 해전을 함께 치르며 막역한 사이였던 동지 배홍립이 구례로 온다는 소식도 있었다. 그동안의 회포를 풀 수 있어 적잖은 위안이었지만, 혼자 있는 동안 이부자리를 흠뻑 적셔대는 고질적인 그 토사곽란이 기어이 또 시작되고, 적군처럼 날개를 펼치고 식겁하게 밀려오는 비통함을 그는 이겨낼 길이 없었다.
정유년(1597년) 6월 4일, 그럭저럭 초계(지금의 합천)에 당도하였으나 임지와 직책을 부여받지 못한 채, 지리산 아래서 이순신은 절망 가득한 마을들과 폐허로 전락해 인적이 끊긴 순천의 강가 등지를 홀로 떠돈다. 상상 이상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몸으로 직접 확인하며 숨 막히는 슬픔에 잠긴다. 비에 흠뻑 젖어 주림과 추위에 떨며 방황하는 자신이 비참하고 억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진주 아전 손경례의 가옥을 그는 비에 젖어 겨우 찾아간다.
아전 손경례의 초막에 머물던 7월 16일, 수군이 거제도 북서쪽 칠천량에서 패하여 함대가 궤멸하였다는 비보가 그에게 날아온다. 전쟁발발 이틀 후였다.
일본의 『정한위략(征韓偉略)』에 따르면, 미치후키의 동생 구르시마 미치후사가 조선 수군의 전선 16여 척을 격파하였고, 도도 다카도라는 60여 척을 추가로 격파하며 이순신에게 당한 옥포에서의 참패를 그대로 설욕하였으며, 와키자카 야스하루 또한 천여 조선군 장졸들의 목을 베었으니 두말할 것 없이 조선 수군의 참패였다. 그동안 위용을 떨치던 거북선까지 모두 침몰시킨 데다 목을 베 수장시킨 조선 수군만도 수천 명에 이르니, 살아남은 병력이 없는 조선 수군의 확실한 궤멸이요 분명한 전멸이었다.
“이것이 바로 궤멸이 아니고 다른 무엇이 궤멸이란 말인가!”
조선 수군의 전멸은 이순신에겐 절망이나 다름없었다. 수군의 허망한 패배를 진작부터 예상했던 터였으나 피와 땀으로 그가 일궈낸 조선 전력의 전부를 원균이 하루아침에 수장시키다니, 그는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身亡國活(신망국활).
“백의의 몸으로 이 한 생명 허망하게 죽어가더라도 기울어가는 나라를 어떻게든 살리려 했거늘…… 속절없이 쓰러져가는 이 나라를 이제…… 누가…… 다시…… 일으켜 세운단 말인가…….”
“이순신은 안에 계시는가?”
환갑을 넘은 나이에도 그의 목소리는 청춘의 그것처럼 우렁찼다. 해가 떠오르고, 칠천량에서 수군이 궤멸했다는 소식을 접하자마자 도원수 권율이 방진 시찰의 명목으로 군관과 나졸들을 거느리고 진주 아전 손경례(孫景禮)의 남루한 초막에 머무는 그를 직접 찾아온 것이다. 쏟아지는 햇빛을 그대로 받아 도원수 권율의 갑옷과 투구는 찬란하게도 빛났다. 자기를 기소한 상관을 다시 만나보는 기분이 죄인 이순신은 실로 무척 씁쓸했었다. 임금의 출격명령을 거역한 대역죄인 이순신은 방에서 나와 도원수 권율에게 예를 갖췄다. 도원수 권율은 툇마루에 걸터앉은 채로 중죄인 이순신의 절을 받았다.
“한심한 놈! 멍청한 그놈이 나가서 제대로 한 번 싸워보지도 못하고 칠천량에서 전멸하고 말았네. 진짜 전멸이라니까, 전멸. 나…… 원…… 참…… 기가 막혀서…….”
전멸을 누차 강조하고 나서 도원수는 초토화된 한산 통제영을 다시 떠올려 보는 듯 그저 먼 산만 바라보며 깊은 한숨을 줄곧 뽑아낼 뿐이었다.
적의 새벽 기습공격에 원균의 수군이 궤멸했다는 사실을 이미 들어서 이순신 역시 잘 알고 있던 터였다. 자기에게 수군을 맡겨준다면 왜놈들을 당장 섬멸할 거라 임금께 장계를 수차례나 올리며 자신의 탄핵에 가장 앞장섰던 원균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막상 통제사에 오르고 난 뒤로는 육군의 지원을 거듭 요청하며 출전을 미루고 미루다 도원수 권율에게 곤장을 맞고 승산이 없는 전장(戰場)으로 그는 울먹이며 쫓겨났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정말 어처구니없는 비보였었다.
권율이 얼굴을 씰룩거렸다. 볼썽사납게 일그러진 도원수의 얼굴에서 이순신은 그의 속내와 살기와 감춰진 탐욕을 충분히 엿볼 수 있었다. 환갑의 나이에도 도원수 권율 역시 여색을 여전히 밝히는 사내가 아니던가.
【편집부 해설|제7회-2】
제7회-2는 ‘백의종군 이후, 국가 시스템의 붕괴와 인간 이순신의 고립’을 전면에 드러내는 대목이다.
이 장면에서 이순신은 더 이상 ‘영웅’이 아니라, 임지도·직책도 없는 중죄인, 비에 젖어 떠도는 한 개인으로 묘사된다.
1. 공적 질서의 붕괴
• 도원수 권율은 최고 지휘관이지만 정보력·통솔력·도덕성 모두에서 심각한 결함을 드러낸다.
• 명나라 장수 앞에서는 위축되고, 내부적으로는 폭력과 공포로 장졸을 다스리는 모습은 전쟁 지휘 체계가 이미 권력 중심·비합리 구조로 무너졌음을 상징한다.
2. 원균의 몰락과 구조적 참사
• 칠천량 패전은 단순한 전투 실패가 아니라, 무능한 인사·정치적 음모·견제 없는 권력이 낳은 필연적 결과로 제시된다.
• 이순신이 예견했음에도 막을 수 없었던 이유는, 전쟁이 더 이상 전략이 아니라 정치의 도구가 되었기 때문이다.
3. 이순신의 이중적 위치
• 그는 공식적으로는 ‘대역죄인’이지만, 현실에서는 모두가 찾는 최후의 책임자, 마지막 희망이다.
• “身亡國活(신망국활)”이라는 문장은 개인의 죽음과 국가의 생존이 엇갈리는 비극적 운명을 압축한다.
4. 백성의 피폐함
• 지리산 아래, 순천 강가, 버려진 객사와 초막은전쟁의 피해가 전선이 아닌 일상 전체로 확산되었음을 보여준다.
• 이는 ‘전쟁 영웅 서사’가 아니라 전쟁 사회 전체의 붕괴기라는 인식을 독자에게 각인시킨다.
【본문 용어 해설】
■ 호조 참판 박호원(戶曹 參判 朴浩源) Vice Minister of Taxation: 조선시대 재정·호구·조세를 담당하던 호조의 차관급 관료. 전시에도 국가 재정 실무를 맡은 핵심 관리.
■ 군관 유홍(軍官 劉弘) military officer: 도원수 휘하에서 명령 전달과 현장 보고를 담당한 장교급 군인.
■ 흥양(興陽) Heungyang (historic place name): 전라도 남해안 일대의 지명. 군사 이동과 연락이 잦던 전략적 요충지.
■ 괴목정 홰나무(槐木亭 槐木) scholar tree at pavilion: 관아나 정자 인근에 심어진 홰나무. 공적 공간이자 휴식·집결의 상징.
■ 수령 우치적(守令 禹致績) local magistrate Woo Chijeok: 해당 고을의 행정·사법·군정을 총괄하던 지방 수장.
■ 이경신(李慶信) Yi Gyeong-sin: 한산도와 수군 관련 소식을 전하던 인물. 원균의 비행을 증언하는 증언자 역할.
■ 교역을 구실삼아(交易-) under the pretext of trade: 겉으로는 합법적 거래를 내세우되, 실제로는 사사로운 목적이나 범법을 숨긴 행위. 이 문맥에서 “물자 거래를 하러 간다는 명분으로 육지에 보내 개인적 욕망을 채우려 함”
■ 총병 양원(總兵 楊元) Ming general Yang Yuan: 명나라의 고위 군 지휘관. 조선 전쟁에 개입하며 군사·외교적 영향력을 행사.
■ 유향소 수장(留鄕所 首長) head of local gentry council: 향촌 자치기구인 유향소를 이끌던 지방 사족의 대표자.
■ 정한위략(征韓偉略) Records of the Japanese Invasion of Korea: 일본 측에서 편찬한 임진왜란 기록서. 왜군의 시각에서 전쟁을 서술한 자료.
■ 신망국활(身亡國活) “Let the self perish so the nation may live”: 개인의 죽음을 감수하고 나라를 살린다는 결의의 문구. 이순신의 사상과 태도를 집약한 표현.
■ 방진 시찰(防陣 視察) inspection of military defenses: 진영과 병력 배치, 방어 태세를 점검하는 군사 행정 행위. 명목상 점검이나 정치적 압박 수단으로도 사용됨.
【현대적 의미|제7회-2】
제7회-2는 과거 임진왜란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오늘의 사회를 비추는 거울이다.
1. 시스템이 사람을 죽이는 순간
• 무능한 리더, 정치화된 인사, 책임 없는 권력은 결국 유능한 개인을 제거하고 공동체를 파괴한다.
• 오늘날에도 조직·국가·기업에서 반복되는 구조적 실패와 닮아 있다.
2. 책임은 아래로, 권력은 위로
• 실패의 대가는 현장과 약자에게 집중되고, 결정권자는 책임지지 않는다.
• 칠천량의 전멸은 특정 개인의 실수라기보다 집단적 방관과 권력의 오만이 만든 참사다.
3. ‘영웅’이 아니라 ‘윤리적 개인’
• 이순신의 위대함은 승리에 있지 않다.
• 백성의 고통 앞에서 느끼는 절망, 스스로를 죄인으로 인식하는 윤리적 긴장, 그럼에도 다시 일어설 책임 의식이 그의 본질이다.
4. 국가란 무엇인가
• 국가는 명령하는 존재가 아니라, 가장 힘없는 이들을 지켜내야 할 의무를 지닌 공동체임을 묻는다.
• ‘신망국활’은 오늘날에도 유효한 질문이다. “누가 희생되고, 누가 살아남는가?”
제7회-2는 ‘영웅의 몰락’이 아니라, ‘무너진 국가 속에서도 책임을 포기하지 않는 인간의 기록’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