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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호 연재소설 (제7회)-4】 노량에 피는 꽃

소설가 현종호

(제7회)-4


  정유년(1597년) 7월 21일, 맑음.
  점심을 먹고 나서 노량에 이르니, 거제현령 안위와 영등포만호 조계종 등 열 명이 또 와서 통곡하고, 패잔병들과 백성들까지도 울부짖으며 통곡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 경상 우수사 배설은 보이지 않았다.

  정유년(1597년) 8월 3일, 맑음.
  이른 아침에, 뜻밖에도 선전관 양호가 임금의 교서와 유시를 들고 나를 찾아왔다. 이제부터 삼도수군통제사를 겸하라는 내용의 왕명서였다. 나는 교서 두루마리에 절하고 잘 받았다는 서장을 선전관 양호에게 써 주었다. 그날로 나는 ‘두치’를 거쳐 가는 길을 떠났다.
  석주(구례군 토지면 송정리)에 이르니 복병하여 석주관성(石柱關城)을 지키고 있던 구례 현감 이원춘과 유해가 적을 토벌할 일을 많이 말하였다. 어두워져서 구례현에 이르렀으나 인적 끊어진 구례 전역은 쥐죽은 듯 그저 고요하기만 하였다.

  뜻밖에도 명나라 선전관 양호가 교서(敎書)를 들고 오랫동안 폐허로 방치된 진주 아전 손경례의 집에 머무는 이순신을 직접 찾아온 것이다. 양호는 명나라 천자의 천병을 관리하고 감독하는 명군 총책임자였다. 원균이 칠천량에서 참패하였다는 보고를 접하고 내려보낸 교서가 열흘이 지나서 도착한 것이었다. 모친상을 치르는 그를 삼도수군통제사로 재임용하는 내용의 왕명서였다.

  “……지난번 자네의 직함을 갈고 자네를 백의종군케 한 것은 짐의 생각이 어질지 못해서 생겨난 일이로다. 그리하여 오늘 이와 같은 패전의 욕됨을 겪고 있으니, 짐이 자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上何言哉)…… 짐이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上何言哉))…….
  이제 짐은 자네를 상복을 입은 채로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기용하노니……”

  오락가락하는 연안의 날씨 못지않게 변화무쌍한 임금의 변덕이었다. 그는 졸지에 다시 조선 수군 총사령관이었다. 그는 이제 다시 전라 좌수사요 삼도수군통제사인 거였다. 허깨비 길삼봉에 눈이 멀어 무고한 선비들을 닥치는 대로 무수히 죽인 임금이 아니던가.
  적들이 포르투갈에 의존해 조총을 만들어내는 동안에 임금과 신료들은 성리학에 갇혀 탁상공론에만 신물 나도록 몰두했었다. 적들의 조총에 속수무책일 수밖에 없는 활의 문제점을 깨닫고 무수한 시행착오를 거쳐 조총에 대적할 ‘정철 총통’을 정사준(鄭思竣)과 같이 만들어 계사년(1593년) 5월 12일에 비변사로 속히 올려보냈어도 한 번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임금이 아니었던가.
  군사들의 희생은 다만 헛되고 무의미한 죽음이었을 뿐이고, 승군들과 의병들이 흘린 숭고한 피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저주로 바뀌는 웃지 못할 현실이 그는 개탄스러웠었다. 후궁 출신의 서자로서 직계가 아닌 반계로 왕위에 오른 탓이었을까…… 강한 신하의 강한 권력이 그만큼 임금도 두려웠던 때문이었을까…….
  나라를 위해 목숨 걸고 싸운 의병장들을 임금은 역도로 몰아서 죽였다. 강력해진 신하들을 임금이 몹시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대신들의 만류에도 임금이 고집하며 피난길에 오르는 바람에 백성들의 임금에 대한 원망은 극에 달해 있었고, 비겁한 왕 선조보다 이순신이 백배는 더 낫다는 풍문이 연안 포구와 내륙 곳곳으로 걷잡을 수 없이 퍼져나갔다. 전라 좌수사 이순신은 임진년 5월에 처음 출전한 옥포에서 적선 26척을 격파하였고, 사천 당포해전에선 33척을 격파하였으며, 한산도에서 왜군 주력 59척을 또 격파하며 백성들을 기어이 살려냈고, 부산포에서 다시 적선 135척을 격파함으로써 백성들의 신망은 날로 두터워지고 명망(名望)은 더 높아져, 비겁한 임금을 몰아내고 이순신이 장차 조선의 왕이 될 거란 소문이 항간에 이미 퍼져 있었으니 강해진 신하에 대한 임금의 두려움은 아마도 극에 달했을 것이었다.
  단아하고 청렴한 선비와도 같았던 의병장 김덕령은 이순신이 마음 깊이 존경하던 젊은이였다. 나라가 쓰러져가는 판국에도 행운유수(行雲流水), 음풍농월(吟風弄月)이나 일삼는 사대부들보다 김덕령은 이 나라 조선이 백배 천배는 더 필요로 하는 사람이었다. 의병장으로서 영남의 여러 고을을 꿋꿋이 지켜낸 김덕령은 충신이었다. 그런 단아한 선비 김덕령은 충신이었으나 임금에게 탐탁지 않은 무리 의병은 언젠가 반드시 쳐 죽여야 할 껄끄러운 대상이었다.
  의병 행세를 하며 충청도 부여에서 난을 일으켰던 이몽학이 부하의 칼에 맞아 죽고 반란군이 흩어지자 임금은 ‘이몽학의 난’을 진압하러 갔던 김덕령을 즉각 잡아들였고, 이몽학과 내통했다는 누명을 씌워서 세력화된 그를 서둘러 때려죽였다. 김덕령과 가까웠다는 이유로 같은 충신 곽재우까지 어떻게든 엮어서 싸잡아 죽이려 혈안이 돼 있던 임금이었다. 임금의 부름에 응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한때 정도전과 같은 삼봉(三峯)이라는 호를 썼던 진주의 청렴한 선비 최영경을 또 붙잡아다가 임금은 사지를 갈기갈기 찢어 죽였다. 파죽지세로 왜군이 들이닥치자 무기를 모두 한강에 버리고 민간인 옷으로 갈아입고 자신의 군졸들을 버려둔 채 달아난 배신자 도원수 김명원의 거짓 장계에 넘어가 양주 해유령(蟹踰嶺)을 필사적으로 지켜낸 부원수 신각(申恪)까지도 국가를 배신한 장수로 몰아 단칼에 목을 베어버린 임금이 아니던가. 천출 누구든 양민의 신분으로 높여주겠다는 면천(免賤)을 약속해놓고 쓰러져가는 나라를 일으켜 세운 의병들을 갖은 누명을 씌워 무참히 죽인 임금이었다. 임금에겐 어쩌면 천하 모두가 적이었을 것이었다.
  나관중의 『삼국지』를 제대로 읽어내지도 못하고 책 속에 숨겨진 작가의 의도 또한 전혀 이해하지도 못한 임금이었다. 그런 임금의 칼에 허망하게 죽어갈 수는 없었다(통제사에 오른 뒤로 이순신은 임금을 향해 단 한 번도 망궐례를 올리지 않는다). 임금의 칼질이 미치지 못하는 곳에 그는 자신의 진정한 충(忠)과 숭고한 무(武)가 세워지기를 바랐다.

  선전관 양호가 지필묵을 그 앞에 꺼내놓고 물러가 동헌에서 답신을 재촉하고 있었다. 천하포무(天下布武)의 요란한 깃발을 펄럭이며 적들이 떼로 몰려오는 소리가 그에게 환청으로 거듭 또렷이 들려왔다. 식은땀이 줄곧 흘러내렸다. 때아닌 한기에 몸이 자꾸 떨려왔다. 신열과 오한과 토사곽란으로 신음하며 이순신은 숨 막히는 전율로 몸을 줄곧 떨었다. 해가 기울 때까지 그는 줄곧 혼자 앉아 있었다. 선전관 양호가 종을 보내 답신을 재촉했다. 장고 끝에, 붓을 들어 이순신은 마지막에 한 줄을 추가해 답신을 갈무리한다.

  “……신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은 우리를 결코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 전하…….”

【편집부 해설|제7회-4】

이 대목은
•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한 이순신의 비극적 환속(還屬)
• 그러나 동시에 국가를 떠받치는 최후의 방패로 복귀하는 순간을 동시에 그려낸 장면이다.

원균의 패전과 수군 궤멸 이후,
• 국가는 리더십 공백 상태에 놓였고
• 선조는 책임 대신 “명령을 되돌리는 방식”으로 위기를 수습하려 했으며
• 명나라 군 통제체계(선전관 양호)까지 등장하면서 이순신은 정치적 희생양에서 다시 국가 최전선으로 소환된다.

교서의 표현
  “짐이 자네에게 무슨 할 말이 있겠는가(上何言哉)”는
  • 왕권의 완전한 실패 고백이자
  • 이순신 외엔 수군을 맡길 인물이 없음을 인정한 순간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순신의 시선에서 왕은 여전히
  • 의병을 억압하고
  • 충신을 숙청하며
  • 권력 불안을 폭력으로 해소하는 군주로 인식된다.

그래서 장군의 결의는 왕에 대한 충성이 아니라
  “나라와 백성에 대한 충(忠)”으로 이동한다.

마지막 답신의 한 문장
  “신이 아직 살아 있는 한 적들은 우리를 결코 업신여기지 못할 것입니다.”는
  • 개인적 비탄을 넘어선 공적 결단
  • 국가적 수치 속에서의 “책임 수용 선언”
  • 장군의 존재 자체가 조선의 마지막 억지력임을 드러내는 문장이다.

【본문 용어 해설|제7회-4】

■ 신료(臣僚) state officials / royal ministers 임금을 보좌하는 관료·정부 대신들.
■ 정철 총통(鄭哲 銃筒) Jeongcheol Chongtong (prototype firearm/cannon) 조총에 대응하기 위해 개발된 신형 화기 계열. 실험적 개량 화포를 지칭.
■ 정사준(鄭思竣) Jeong Sa-jun 군기 제작·병기 개량에 참여한 인물. 신형 총통 개발을 주도.
■ 비변사(備邊司) Border Defense Council 조선의 국가 안보·전쟁 정책 최고 의결기구.
■ 행운유수(行雲流水) drifting clouds, flowing water 현실 위기와 동떨어진 유유자적·무기력한 사대부 태도를 비판적으로 표현.
■ 음풍농월(吟風弄月) poetic leisure / sentimental refinement 시 짓고 풍류를 즐기는 태도. 국가 위기 속 현실 기피적 문인 기풍의 상징.
■ 장계(狀啓) formal military report 장수가 임금에게 올리는 공식 군사 보고 문서.
■ 천출(賤出) low-born origin / humble birth 신분이 낮은 출신. 왕권 정통성 논란의 맥락에서 사용.
■ 면천(免賤) emancipation / elevation from low status 양민 신분으로 풀어주거나 신분을 승격시켜 주는 조치.
■ 망궐례(望闕禮) bowing toward the royal palace from afar 멀리서 궁궐 방향을 향해 임금에게 예를 표하는 의식.
■ 천하포무(天下布武) “rule the realm by military strength” 무력으로 천하를 제압한다는 군사 지배 이념(도요토미 정권의 슬로건에서 유래).
■ 신열(身熱) fever / high body heat 열병 증세. 극도의 피로·스트레스 상황과 결부된 신체 상태.
■ 갈무리(—) → closing / concluding / bringing to completion 글·문서·일을 정리하여 마무리함.

문장 해설 ‘허깨비 길삼봉에 눈이 멀어 무고한 선비들을 닥치는 대로 무수히 죽인 임금’

여기서 ‘길삼봉’은 정도전(鄭道傳, 호 三峯)에서 유래한 상징적 표현으로,
  • 임금이 유교 이념·권력 정당화 논리에 사로잡혀
  • 현실 판단 능력을 잃고
  • 정치적 공포 속에서 충신·지식인·의병까지 숙청했다는 비판적 은유다.
즉, “허깨비 같은 이념과 권력 불안에 사로잡혀 실제 위기를 바로 보지 못한 군주”라는 풍자적 서술이다.

【현대적 의미|제7회-4】

이 장면은 오늘의 관점에서 보면, 위기 조직에서 실패한 권력이 전문가에게 다시 의존하는 순간, 무능한 시스템이 결국 “실력 있는 현장 리더”에게 귀속되는 장면, 정치의 실패가 전문 리더십에 의해 지탱되는 구조를 보여준다.

이순신의 복귀는
  • 승진도 아니고
  • 영전도 아니며
  “국가 붕괴 책임을 함께 짊어지는 소명적 귀환”에 가깝다.

또한 이 대목은 우리에게 묻는다.
  • 국가가 가장 필요할 때 진짜 전문가를 지켜내지 못하고위기 후에야 다시 불러 세우는 구조가 반복되고 있는 것은 아닌가?

조직·국가·공공영역 리더십 차원에서 “이순신형 리더에게 위기만 맡기는 사회”의 역설을 비판적으로 성찰하게 한다.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가련한 여인의 초상』, 『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역임
• 현재 평택 거주,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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