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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호 연재소설 (제8회)-1】 노량에 피는 꽃

소설가 현종호

(제8회)-1


  정유년 8월 29일 아침, 장고 끝에 통제사 이순신은 해남의 전라우수영을 떠나 남해안 서쪽 끝 진도 벽파진으로 진(陣))을 옮긴다. 벽파진으로 적들을 유인하여 울돌목에서 섬멸하기 위한 고육지책이었다. 물러날 곳 없는 사지와도 같은 울돌목으로 쳐들어오는 적들을 12척의 배로 맞을 수 있는 벽파진 외에 그에게 뾰족한 수와 계략은 없었다.

  해남 우수영에 넘실거리는 물의 색깔은 갈수록 달라졌다. 겨울이 이제 멀지 않은 모양이었다. 연안으로 거듭 휘몰아치는 바람의 서슬은 무자비하고도 얼얼했다. 해남반도 끝에선 적의 봉화가 때때로 오르고, 잠잠하던 경상 해안 쪽의 적들이 이동해 해남반도 어란진 일대로 모여든다는 첩보가 두어 번 올라왔으나 적들이 교신하는 봉화의 내용을 이순신은 해독해내지 못한다. 승군 정탐과 망군들이 보내오는 첩보들은 가끔 헷갈리긴 하였으나 주로 믿을 만한 정보들이었다. 적들이 어란진 일대로 모여든다는 보고는 점점 사실이 되어가고 있었다. 적들의 수상한 움직임을 척후(斥候)도 가끔 포착하긴 하였으나 적의 기습은 더 없었다. 바다는 여전히 고요했다.

  배설이 제 종을 시켜서 병세가 심하니 좀 쉬어야겠다며 소지(所志)를 냈다. 얼마 전에 어란 앞바다에서 벌어진 전투 때도 혼자서만 어딘가로 도망해 있던 배설이었다. 적이 장차 쳐들어올 것이 두려워 배설은 늘 도망할 생각만 하는 자였다. 그런 비겁한 장수인 배설을 그의 부하 장수들이 찾아다니는 일이 잦았다. 이순신 또한 그의 속내를 익히 잘 알고 있었으나 드러나지 않는 그자의 꿍꿍이속을 먼저 발설하는 것은 장수가 할 도리가 아니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배설의 병가를 어쨌든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이틀 후, 동이 틀 무렵에 배설은 뭍으로 도망한다.
  허리가 아파 침을 맞아야 한다는 핑계를 거듭 지껄여대더니 배설이 결국 도망한 것이다. 쓰러져가는 나라를 버리고 줄행랑친 배신자 배설의 머리를 대장선 꼭대기에 걸고픈 마음이 그는 종일 간절했었다.

  “사막에서 바늘을 찾아내겠다는 겁니다, 나으리…….”
  도원수가 보내온 공문을 함께 읽어가던 정경달이 픽 웃으며 말했다. 배설을 잡아서 그 머리라도 보내달라는 이순신의 요청에, 조선 팔도를 샅샅이 뒤져서라도 배신자 배설을 어떻게든 붙잡아 그의 머리를 곧 보내주겠다는 도원수의 자신에 찬 회신이었다. 누굴 놀려대는 듯한 정경달의 빈정거림에 발끈했으나 치미는 화를 애써 참으며 이순신은 쏘는 눈빛으로 정경달에게 대뜸 다시 묻는다.
  “자네도 정말 그리 생각하는가!?”
  “…….”
  “…….”


  유명을 달리한 이억기를 대신하여 전라 우수사에 새로 부임한 김억추가 판옥선 한 척을 이끌고 우수영에 합류한다. 김억추의 가세로 수군의 배는 이제 13척으로 늘어나 있었으나 배를 몰아갈 군사들이 여전히 부족했고, 어렵게 준비된 함포를 쏘아댈 포병들이 모자라긴 매한가지였다. 조선의 함대라 하기엔 여전히 초라하기 짝이 없는 병력 규모인 거였다.
  싸우다 죽어가나 늙어서 죽어가나 인간이 죽어가기는 매한가지가 아니던가. 어차피 죽을 몸이라면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그리 억울해할 일도 아니었다. 생과 사의 숙명이 뒤엉켜 엎치락뒤치락 소용돌이치는 울돌목에서 목숨을 걸고 싸우는 전쟁이라면 피아(彼我) 사이에서 존망(存亡)의 피하지 못할 숙명 또한 어차피 같이 주어지게 될 것이었다. 신인(神人)이 지난밤 꿈에 나타나 일러준 대로 통제사 이순신은 결국 명량이라는 최악의 전장을 택하기로 한 것이다.
  뒷골이 자꾸 당기고 정신이 가끔 혼미해지는 듯싶더니 코에서 이윽고 피가 흐르고 있는 것이었다. 군데군데 터진 입술을 지그시 깨물며 이순신은 바다 앞에서 마침내 생각을 굳힌다.
  “일자진으로, 명량에서 내 적을 맞으리…….”

  1597년 9월 14일, 보름날을 하루 앞두고, 왜 전함 300여 척에 보급선과 협선(挾船) 등 총 500여 척의 대선단이 해남의 어란진 앞바다에 집결하였다는 두 번째 첩보가 이순신이 달마산에 심어둔 척후장(斥候將) 임준영을 통해 올라온다. 합류한 적의 배 300여 척은 왜국에서 새로 만들어 투입한 전선으로 보인다고 그는 말했다.
  아침부터 적들은 발 빠르게 움직였다. 적들은 부러진 노를 일제히 교체하였고, 말을 죽여서 적의 대장선 이물과 고물에 그 피를 바르는가 하면, 아침부터 민가로 쳐들어가거나 장독을 훔쳐와서 물을 가득 채워 배에 실었다. 적들은 붙잡아온 여자들 가운데 반반한 얼굴의 열두어 명은 포승줄로 묶어서 배에 태웠고, 나머지 여자들은 ‘나무묘법연화경’의 염불을 외며 갯벌에서 목을 잘랐다.
  적들이 이제 곧 대공세를 펼친다는 조짐이었다. 첩보는 곧 정보가 된다. 이순신은 군관들에게 명하여 해남 주변의 백성들을 망금산 위로 피신시킨다.
  정보력 좋은 이순신이 해남에 심어둔 미기(美妓) 어란의 첩보도 그와 다르지 않았다. 황진이 뺨치게 미색인 기생 어란에 따르면, 적들은 보름날쯤에 발진하여 울돌목을 통과해 전라도를 접수하고 충청도를 거쳐 임금이 있는 한양까지 진격하기로 되어 있는데, 이순신이 보유한 열두 척의 배를 먼저 모조리 깨부수고 한강을 향하는 것이 적들의 제1차 목표였다. 어란의 미색에 적장이 환장할 정도로 빠져 있었으니 그래도 믿을만한 정보였다. 전쟁은 결국 첩보와 정보의 싸움이었다. 이순신은 그제야 비로소 안도의 한숨을 연거푸 내쉬는 것이었다. 적들이 울돌목을 통과하는 것만은 이제 확실했다.

  부동자세로 연병장에 도열(堵列)한 군관들 앞에서 이순신은 결연한 어조로 ‘필사즉생(必死卽生)’의 각오를 밝힌다.
  “병법에 이르기를,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는다 하였고, 한 사람이 길목을 지키면 천 명의 적이라도 두렵게 할 수 있다고 하였는데, 이는 오늘의 우리를 두고 하는 말이다. 너희 장수들이 조금이라도 내 명령을 거역한다면 나는 즉시 너희를 군율로 다스릴 것이다……!!!……”


  정유년 9월 1일.
  한나절 내내 비가 뿌렸다. 대장선 뜸(배의 외곽 지붕) 아래에서 웅크린 채로 앉아 있으니, 심회를 걷잡을 수가 없었다.



  정유년 9월 2일.
  제주에서 온 포작 점세(占世)가 벽파정에 앉아 있는 나를 찾아와 인사했다. 이날 새벽에 배설이 도망하였다. 벽파진에서 배를 지키고 있어야 할 배설이 도망하다니, 야반도주한 배설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정유년 9월 3일.
  비가 또 퍼부었다. 배의 뜸 아래에서 머리를 웅크리고 앉아 있으니 그 심사가 어떠하겠는가…….



  정유년 9월 4일.
  북풍이 몹시 불었는데, 배(판옥선)들을 겨우 지켜낼 수 있었다. 천행이다.



  정유년 9월 9일, 맑음.
  오늘은 날짜와 달이 같은 날 중양절 명절날이다. 군사들에게 음식을 먹이려는데, 숨은 조력자 부찰사 한효순이 성심을 다해 지원해준 덕분에 마침 제주에서 소 다섯 마리가 왔다. 녹도만호 송여종과 안골포 만호 우수를 시켜 소를 잡게 하여 장수와 병사들에게 먹이고 있을 때, 적선 두 척이 감보도(진도 벽파리)로 숨어들어와 정탐했다. 영등포 만호 조계종이 뒤쫓았으나 적의 척후를 끝내 잡아들일 수는 없었다.

  벽파진을 적에게 내주는 한이 있더라도 적과 아군의 사지(死地)와도 같은 명량에서 일자진으로 적을 맞는 것만이 그나마 그에겐 한 가닥 희망의 비책이었다.


(사진=주간시민광장 제공)
【편집부 해설|제8회-1】

제8회-1은 ‘명량으로 가는 길’이다. 이순신은 전라우수영을 떠나 진도 벽파진으로 진을 옮기며, 스스로 퇴로를 끊는 선택을 한다. 이는 패배를 피하기 위한 후퇴가 아니라, 울돌목이라는 좁은 바다에 적을 끌어들여 열세를 뒤집기 위한 전략적 결단이었다.

병력은 고작 12~13척. 내부에서는 배설의 탈영이라는 배신이 터지고, 외부에서는 500여 척에 달하는 왜군 대선단이 어란진에 집결한다. 상황은 절망적이지만, 이순신은 첩보망(척후·미기 어란)을 통해 적의 진로와 시점을 정확히 읽어낸다.

그는 군관들을 도열시켜 “필사즉생”을 선언하며, 두려움에 흔들리는 군대를 하나의 의지로 묶는다. 이 대목에서 작품은 장수의 용기보다 더 중요한 것이 정보, 결단, 그리고 병사들의 마음을 붙드는 통솔력임을 강조한다.

벽파진은 단순한 지명이 아니라, “패배를 각오하고 승리를 선택한 자리”이며, 명량은 아직 싸우지 않았지만 이미 정신적으로는 시작된 전쟁터다.

【본문 용어 해설|제8회-1】

벽파진 碧波鎭 Byeokpajin(Garrison) 진도 북쪽 해안의 군사 기지. 울돌목 입구를 막는 관문으로, 좁은 물길과 복잡한 조류 때문에 소수 병력으로도 대군을 상대할 수 있는 지형이다.
울돌목 鬱突木 Uldolmok (Myeongnyang Strait) 진도와 해남 사이의 매우 좁은 해협. 물살이 하루에 여러 번 방향을 바꾸며 폭풍처럼 흐른다. 명량해전의 승부처.
봉화 烽火 Beacon fire signal 산 위에서 불과 연기로 적의 이동을 알리던 통신 수단. 당시의 ‘군사용 무선통신’ 역할.
어란진 於蘭鎭 Eoranjin 해남 반도 남쪽의 항구. 왜군 대선단이 집결한 전략 거점으로, 남해 서부 해로의 출발점이다.
척후 斥候 Scout 적의 움직임을 살피는 정찰병.
소지 所志 Written request / petition 관원이 병가·사직 등을 요청할 때 올리는 공식 문서.
대장선 大將船 Flagship 통제사가 타는 총지휘선.
사막에서 바늘을 찾아내겠다는 겁니다 Looking for a needle in the desert ‘거의 불가능한 일을 하겠다’는 뜻. 배설을 조선 전역에서 잡겠다는 도원수의 말이 현실성 없음을 비꼬는 표현.
유명 殞命 Death / passing away 목숨을 잃음.
피아 彼我 Friend and enemy / both sides 적과 아군.
존망 存亡 Survival or destruction 살아남느냐, 망하느냐의 갈림길.
신인 神人 Divine being / mysterious figure 신적인 존재. 여기서는 꿈속에 나타나 전장을 암시하는 초현실적 상징.
일자진 一字陣 Straight-line formation 배를 일렬로 세워 좁은 물길을 막는 전술.
협선 挾船 Escort / auxiliary ship 전투선 옆에서 보급·보조 임무를 하는 배.
달마산 達磨山 Mt. Dalma 해남에 있는 산. 남해 서부 해역을 감시하기 좋은 높은 지점으로 척후 거점.
척후장 斥候將 Chief scout 정찰병을 지휘하는 책임자.
이물 艏 Bow (front of ship) 배의 앞부분.
고물 艉 Stern (rear of ship) 배의 뒷부분.
나무묘법연화경 南無妙法蓮華經 “Namu Myoho Renge Kyo”불교 경전의 제목을 외우는 주문. 작품에서는 왜군의 광신성과 잔혹함을 강조하는 장치.
미기 美妓 Beautiful courtesan / spy courtesan 아름다운 기생. 여기서는 정보 수집을 맡은 첩보원.
발진 發進 Sortie / departure 군대나 함대가 출동함.
도열 堵列 Line up / formation 줄을 맞춰 정렬함.
심회 心懷 One’s inner feelings 속마음, 마음속 생각.
포작 捕作 Hunter / fisherman 섬이나 바다에서 일하는 하층 노동자 계층.
점세 占世 Jeom-se (a person’s name) 인물 이름. ‘세상을 점친다’는 뜻의 한자.
심사 心思 State of mind 마음의 상태.
중양절 重陽節 Double Ninth Festival 음력 9월 9일 명절. 장수를 기원하는 날.
부찰사 副察使 Vice governor 관찰사를 보좌하는 고위 지방 관리.
비책 祕策 Secret strategy 마지막으로 숨겨둔 전략.

【현대적 의미|제8회-1】

이 대목의 이순신은 영웅이라기보다 극한의 조건 속에서 책임을 떠안은 관리자이자 지도자에 가깝다.
• 병력 부족 → 오늘날의 인력난
• 배설의 도주 → 조직 내부의 배신과 무능
• 첩보전 → 정보전·데이터 전쟁
• 울돌목 선택 → 불리한 시장·환경에서의 ‘승부처 선택’

그는 조건이 좋아질 때까지 기다리지 않는다. 오히려 가장 불리한 장소를 스스로 전장으로 만들고, 그 안에서 승산을 설계한다.

이는 오늘날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자원이 부족할수록 전략이 필요하고, 숫자가 적을수록 방향이 분명해야 한다.”

명량으로 향하는 이순신의 선택은, 위기 앞에서 도망치지 않고 판 자체를 다시 짜는 리더십의 전형이다.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가련한 여인의 초상』, 『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역임
• 현재 평택 거주,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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