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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주주의는 제도가 아니라, 시민의 용기다." (사진=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제공) |
“세 번째 파국이 우리 눈앞에 와 있습니다. 사회적 파국입니다.”
김누리 중앙대 교수는 생태적 파국과 국제정치적 파국에 이어, 한국 사회가 이미 사회적 파국의 문턱에 서 있다고 진단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그는 동시에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세계가 놀라는 나라가 되었습니다. 정작 한국인만 그 사실을 잘 모를 뿐입니다.”
“한국인은 자기 나라의 위상을 가장 모르는 국민일지도 모릅니다”
김 교수는 올해만 네 차례 국제 학술대회에 참석했다. 브라질, 영국 케임브리지, 중국 베이징대, 일본 삿포로.
그는 자신이 단순한 방문자가 아니라, 독일 정부가 공식 지원하는 국제 연구 네트워크의 일원임을 설명했다.
중앙대 독일유럽연구센터는 독일 통일 이후 독일 정부가 전 세계에서 선발한 20개 핵심 연구소 중 하나다.
• 1호: 하버드
• 2호: 위스콘신
• 3호: 조지타운
• 4호: 버클리
• 이후 토론토·몬트리올
• 아시아: 도쿄대, 베이징대, 그리고 중앙대
“한국에서 7개 대학이 경쟁했는데 중앙대가 선정됐습니다. 전부 국제 공모였습니다.”
이 네트워크를 통해 그는 매년 세계 각국 학자들을 만난다.
“제가 거기서 느낀 건 하나입니다. 한국에 대한 평가가 우리가 상상하는 것과 완전히 다르다는 겁니다.”
“그들은 한국 시민을 보고 충격을 받았습니다”
김 교수는 지난 5월 브라질에서 열린 대형 국제 컨퍼런스를 떠올렸다.
“학자들이 제게 와서 묻더군요. 어떻게 그런 용감한 시민을 가진 나라가 있을 수 있느냐고.”
그들이 본 것은 한국의 시민들이었다.
• 장갑차 앞에 맨손으로 서는 사람들
• 무장 군인의 총구를 손으로 막는 보좌관
• 새벽에 여의도로 몰려든 수많은 시민들
김 교수는 말했다.
“친위 쿠데타는 성공 확률이 95%가 넘습니다. 실패하면 대부분 현장에서 사살되거나 자살합니다. 그런데 한국에서는 실패했어요.”
그는 이 장면을 본 세계 시민들이 받은 충격을 이렇게 전했다.
“그들은 민주주의의 실체를 거기서 본 겁니다.”
2016년, 세계는 민주주의의 종말을 말하고 있었다
김 교수는 2016년을 “민주주의 붕괴의 해”라고 불렀다. 미국에서는 도널드 트럼프가 대통령이 되었고, 유럽은 시리아 난민 사태 이후 극우주의가 급속히 확산됐다.
“그때 학계의 유행어가 있었습니다. The End of Democracy, 민주주의의 종언.”
실제로 정신과 의사 20명이 공동 집필한 책『The Dangerous Case of Donald Trump』가 출간되기도 했다.
“정신과 의사들이 미국 대통령의 정신 상태를 분석하는 시대가 온 겁니다.”
“그런데 그때, 세계의 끝에서 이상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유라시아 대륙의 동쪽 끝, 한반도.
토요일마다 사람들이 모여 촛불을 들었다.
50만, 100만, 150만, 200만…
김 교수는 그 장면을 이렇게 규정했다.
“시민이 평화적으로 권력을 비판하고, 의회가 탄핵하고, 헌법재판소가 인용한 것. 민주주의 교과서 그대로였습니다.”
그는 당시 독일 최고 권위의 주간지 『디 차이트(Die Zeit)』에 실린 칼럼을 언급했다.
“이제 미국과 유럽은 한국에서 민주주의를 배워야 한다.”
김 교수는 말했다.
“저는 그 글을 끝까지 못 읽었습니다. 눈물이 나서요.”
군사독재 시절, “언제 우리도 미국처럼 투표하나”를 꿈꾸던 세대에게 이 문장은 충격이었다.
세계 최고 수준으로 평가된 한국 민주주의
김 교수는 국제 민주주의 평가 지표를 소개했다.
스웨덴 예테보리대의 Varieties of Democracy Institute(민주주의 다양성 연구소).
176개국을 대상으로 2019년 발표한 종합 민주주의 지수.
한국의 순위는 12위. 그러나 그는 이렇게 덧붙였다.
“우리 앞에 있는 11개 국가는 인구 1천만도 안 되는 작은 나라들입니다. 5천만 이상 대국 중에서는 한국이 사실상 1위입니다.”
노르웨이, 스웨덴, 핀란드, 덴마크, 네덜란드, 아이슬란드, 벨기에, 룩셈부르크, 스위스…
“서울 인구보다 적은 나라들입니다.”
“한국은 3050클럽 국가입니다”
김 교수는 또 하나의 지표를 들었다.
3050클럽.
• 인구 5천만 이상
• 1인당 GDP 3만 달러 이상
“이 조건을 동시에 만족하는 나라는 거의 없습니다.”
한국은 이 기준을 충족한 세계 소수 국가 중 하나다.
“큰 나라면서 부유한 나라, 그리고 민주주의 상위권.”
김 교수는 말했다.
“이 조합은 전 세계적으로 거의 기적에 가깝습니다.”
그러나, 사회는 무너지고 있다
강연의 톤은 여기서 바뀌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이렇게 성공한 나라가 왜 이렇게 불행한가.”
그는 이것을 ‘사회적 파국’이라고 불렀다.
• 극단적 경쟁
• 고립
• 불신
• 우울
• 혐오
• 공동체 붕괴
“국제적 위상은 최고 수준인데, 사회 내부는 붕괴 직전입니다.”
김누리 교수의 진단
김 교수는 결론적으로 이렇게 말했다.
“한국은 민주주의를 제도로는 완성했지만, 삶의 방식으로는 아직 만들지 못했습니다.”
그리고 덧붙였다.
“우리는 이미 위대한 성취를 했습니다. 문제는, 그 성취를 지킬 시민 사회가 아직 충분히 성숙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기자의 시각
김누리 교수의 강연은 자화자찬이 아니었다. 그는 한국 사회가 가진 객관적 성취와 그 성취를 무너뜨릴 수 있는 내부의 사회적 붕괴를 동시에 보여주었다.
세계는 한국 민주주의를 교과서처럼 바라본다. 그러나 한국 사회는 그 민주주의 위에 지속 가능한 공동체를 아직 세우지 못했다.
연재 ⑧이 던지는 질문은 이것이다.
민주주의는 제도로 끝나는가, 아니면 삶으로 이어져야 하는가.
다음 회차에서 김 교수는 이 질문의 후반부, “왜 세계 최고 수준의 민주주의 국가가 세계에서 가장 불행한 사회가 되었는가”를 본격적으로 분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