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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호 연재소설 (제12회)】 노량에 피는 꽃

소설가 현종호

  무술년(1598년) 10월 9일, 맑음.
  유정의 육군이 겁먹어 이미 철수한 터라 어쩔 수 없이 도독과 함께 배를 이끌고 바닷가 정자에 씁쓸히 당도하였다.

  구릉에 계단식으로 겹겹이 둘러쳐진 성을 쌓아 방어망을 확고히 구축한 고니시의 적들을 찔러 들어가지 못하고 전전긍긍하는 자신의 무력(無力)이 오늘도 애를 태우고, 적의 한껏 머금고 시종 철썩거리는 바다를 앞에 두고 초저녁부터 퍼부어댄 명나라 독주에 취해 진린은 벌써 흐느적거리고, 상큼한 꽃향기 실어 가끔 몸에 슬며시 감겨오는 야속한 바람만이 취기를 한층 돋구었다. 코앞에 둔 적을 쉽게 제압하지도 못하는 주제에 밤마다 불려와 하릴없이 술이나 퍼부어대고 있으니, 무능한 자신이 오늘도 그는 한심스럽기 짝이 없는 것이었다. 달빛에 젖어 홀로 높이 밤하늘을 나는 기러기가 그는 오늘따라 왠지 자꾸 서글프게 느껴졌다. 진린 곁에 다소곳이 앉아 그가 비운 잔을 가끔 미소로 답하며 채워주던 묘령의 여인네 또한 그는 여전히 야속할 따름이었다.
  참으로 기묘한 인연이구나 싶었다. 눈길을 줄 때마다 수줍어 얼굴을 몹시 붉히는 여인네를 한동안 물끄러미 바라보고 나서 이순신이 마침내 입을 열었다.
  “희립이가 자넬 또 여기로 보낸 거였군.”
  뜬금없는 그 말에 랑화가 다시 얼굴을 붉혔다. 순신이 비운 잔에 술을 따르며 랑화가 속삭이듯 조용히 말했다.
  “독주는 몸에 안 좋습니다, 나으리.”
  그녀가 따라준 명나라 독주를 단숨에 비우고 나서 이순신은 쓰게 웃었다. 그리고 갑자기 말머리를 돌렸다.
  “자네가 준 땀수건은 아직도 요긴하게 쓰고 있네.”
  미모의 여인 진랑화가 구름에 가려진 달을 한 번 쳐다보고 깊은 한숨을 뽑아내더니, 흠모하는 눈빛으로 조용히 말했다.
  “술은 줄이셔야 합니다, 통제사 나으리.”
  “…….”
  “…….”

  밤이 깊어갔다. 진린은 벌써 취해 몸을 가누지 못한 채 곧 쓰러질 듯 흐느적거렸다. 시종 흐느적거리는 진린을 앞에 두고 둘은 말없이 꾸준히 술잔을 주고받고 눈빛을 주고받았다. 오래도록 그리워하던 여인을 얼떨결에 만나 초승달 가끔 쳐다보며 시종 어색한 침묵으로 지새우는 이 밤. 착잡한 기분으로 마시는 대국의 독주라 술이 오늘따라 더 쓰디썼다. 그녀는 비록 아무 말 없이 내색하지 않았으나 이순신은 그녀의 그 눈빛을 단박에 읽어낼 수 있었다. 자신이 한 몸 바쳐가며 조선을 위해 술을 따르듯 조선의 백성들이 한껏 누릴 진정한 평화를 위해 조선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은 반드시 술을 줄여야 한다는 그 간절한 몽환의 눈빛.


(제12회)

  다이묘들의 우두머리 히데요시가 졸지에 죽어버리자 명나라 점령이라는 본래 목적은 사라지고 적들은 본국으로 무사히 돌아가는 것만이 급선무였다. 고니시 유키나가 구출 작전에서 비롯된, 양측 함대 천여 척이 뒤엉켜 노량 앞바다에서 밤새 치열하게 싸운 이 전쟁은 1차 세계대전 이전 최대의 해전이었다. 남해도와 사천 등 경상 해안 곳곳에 눌어붙었던 적들이 병력 전체를 싣고 하동과 남해군 사이의 좁은 해역 노량을 통과하면서 이윽고 전쟁은 시작된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어가 적들이 철수를 서두르고 있었다는 점을 참작할 때, 다시 일어나지 않을 수도 있었던 이 전쟁에서, 이순신은 그러나 비장한 최후를 맞는다. 명나라 수군 총사령관 진린에게 통제사 이순신은 생명의 은인과 다름없는 존재가 아니었던가. 적에게 겹겹이 포위돼 위태로워진 자신의 목숨을 목숨 걸고 싸워 구해준 통제사 이순신이 전사하였다는 비보를 접하자마자 진린이 바닥에 몇 번이고 쓰러져 통곡하니, 명나라 군사들 또한 울지 않는 이가 하나 없을 정도였다.

  “아, 통제여! 원수도 크게 갚았는데, 무슨 연유로 죽음을 택하였습니까!”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이 ‘노량(露梁)’에서 최후를 맞았으므로 장군 이순신의 기록은 더 존재하지 않는다. 장군이 세상에 끝내 남기지 못한, 한 몸 기꺼이 죽어가 나라를 살리겠다던 ‘신망국활(申亡國活)’의 일기는 훗날의 역사가 대신 써 내려간다. 이것이 조선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이 남긴 마지막 기록이다.


  무술년(1598년) 11월 17일.
  어제 왜 중선 한 척이 군량을 가득 싣고 남해에서 바다를 건너올 때, 복병장 발포만호 소계남과 당진포만호 조효열 등이 한산도 앞바다까지 쫓아갔다. 왜적은 언덕을 따라 뭍으로 올라가 달아났고, 포획한 왜선과 군량은 명나라 군사에게 빼앗기고 빈손으로 돌아와서 보고하는 것이 아닌가.

  애초에 동맹을 믿은 적 없건만 조선을 지켜주기 위해 왔다는 동맹국이 수시로 행하는 도적질과 조선의 양가 처녀 겁탈 등 약소국을 무시하는 행태들은 이순신으로선 한탄스럽기 짝이 없는 작태였다.


【편집부 해설】 제12회는 노량해전을 직접 다루기 전, 전쟁의 마지막 문턱에 선 이순신의 모습을 보여준다.

히데요시의 죽음으로 일본군은 이미 침략전쟁의 목적을 상실했다. 이제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승리가 아니라 철수였다. 그러나 전쟁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순천 왜성을 지키고 있던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출하기 위해 일본군은 마지막 대규모 해상작전을 준비했고, 조선·명 연합수군은 이를 저지하기 위해 노량으로 향한다.

이 회차는 노량해전의 군사적 배경보다 이순신의 역사 인식을 보여주는 데 더 큰 의미가 있다. 그는 왜군의 위협만이 아니라 동맹국 명나라의 한계 또한 냉정하게 바라본다. 명군은 조선을 도우러 왔지만 때로는 전공을 가로채고 군량을 빼앗으며 백성들에게 피해를 주었다. 이순신은 현실을 직시했지만 감정에 휘둘리지 않았다. 그는 불완전한 동맹이라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활용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특히 작품 말미의 문장은 깊은 상징성을 지닌다.

“신망국활(身亡國活)의 일기는 훗날의 역사가 대신 써 내려간다.”

난중일기는 노량해전 직전에서 멈춘다. 그러나 이순신의 삶은 거기서 끝나지 않는다. 그의 마지막 기록 이후는 역사가 이어서 기록한다. 살아 있는 동안 그는 자신의 사명을 수행했고, 죽음 이후에는 민족의 기억이 그를 기록한 것이다.

따라서 제12회는 노량해전의 서막이면서 동시에 이순신이라는 인간의 기록이 역사 속 전설로 넘어가는 경계선이라 할 수 있다.

【본문 어구 해설 |제12회】

노량露梁 Noryang Strait : 경상남도 남해군과 하동군 사이의 좁은 해협. 1598년 11월 19일 노량해전이 벌어진 곳으로, 임진왜란 최후의 결전장이자 이순신의 순국지이다.

신망국활 身亡國活 If I Die, the Nation Lives : “내 몸은 죽어도 나라는 산다”는 뜻. 이순신의 충절과 희생정신을 상징하는 대표적 표현이다. 개인의 생명보다 국가와 백성의 생존을 우선시한 그의 삶을 함축한다.

복병장 伏兵將 Commander of an Ambush Force : 적의 예상 경로에 숨어 있다가 기습 공격을 수행하는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 노량해전 전후의 해상작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발포만호 鉢浦萬戶 Manho of Balpo Naval Base : 전라좌수영 소속 발포진을 지휘하던 수군 장교. 만호는 종4품 무관직으로 해안 방어와 함선 지휘를 맡았다. 본문의 소계남이 이 직책을 맡고 있다.

당진포만호 唐津浦萬戶 Manho of Dangjinpo Naval Base : 당진포진을 관할하는 수군 지휘관. 해안 경계, 적선 추적, 군량 보호 등의 임무를 수행했다. 본문의 조효열이 맡고 있는 직책이다.

【현대적 의미】 제12회는 오늘 우리에게 네 가지 중요한 질문을 던진다.

첫째, 국가를 위한 헌신은 어디까지 가능한가.

이순신은 자신의 억울함보다 나라의 존속을 먼저 생각했다. 그는 권력의 인정이나 개인의 명예보다 공동체의 생존을 우선했다. 오늘날 공직자와 지도자에게도 같은 질문이 던져진다. 개인의 이익보다 공공의 책임을 먼저 생각할 수 있는가.

둘째, 동맹은 신뢰가 아니라 이해관계 위에 존재한다는 사실이다.

명나라는 조선을 도왔지만 동시에 자국의 이익을 추구했다. 국제정치는 선의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오늘날 국가 간 협력 역시 감정보다 국익과 전략 위에서 이해해야 함을 보여준다.

셋째, 진정한 지도자는 감정보다 목적을 우선한다.

이순신은 명군의 횡포를 알면서도 전쟁을 끝내기 위해 협력을 유지했다. 분노를 표출하는 것보다 공동체의 미래를 지키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넷째, 역사는 죽음으로 끝나지 않는다.

“신망국활(身亡國活)”은 ‘내 몸은 죽어도 나라는 산다’는 뜻이다. 이순신은 자신의 생애로 그 말을 증명했다. 그래서 그의 마지막 일기는 끝났지만 그의 이야기는 끝나지 않았다. 역사는 그의 죽음을 기록한 것이 아니라 그의 삶이 남긴 의미를 기록해 왔다.

제12회는 결국 노량해전을 앞둔 마지막 준비의 장이자, 한 인간의 기록이 역사의 기록으로 넘어가는 순간을 보여주는 회차다. 그리고 다음 제13회는 그 모든 여정의 종착점인 노량해전과 이순신의 최후를 다루게 된다.


작가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가련한 여인의 초상』, 『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역임
  • 현재 평택 거주,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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