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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발행인 조종건 |
법치국가에서 억울한 일을 당한 시민에게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법적으로 다투면 되지 않는가.” 행정기관의 처분이 부당하다면 이의를 제기하고, 정보를 주지 않으면 정보공개를 청구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국민권익위원회에 민원을 제기하거나 행정심판을 청구하고, 마지막에는 법원에 행정소송을 제기하면 된다고 말한다.
틀린 말은 아니다. 대한민국은 시민에게 여러 권리구제 절차를 마련해 놓고 있다. 그러나 나는 묻고 싶다. 그 길을 실제로 걸어본 적이 있는가. 한 장의 공문에서 시작된 일이 수십 장의 서류가 되고, 하나의 불허처분을 다투기 위해 몇 년 전의 회의록과 공문을 찾아야 하며, 법률용어를 이해하기 위해 밤을 새워야 하는 사람의 처지에 서 본 적이 있는가. 법적으로 다툴 권리가 있다는 것과 실제로 다툴 수 있다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절차는 열려 있는데 시민은 왜 포기하는가
행정기관과 시민의 싸움은 처음부터 같은 조건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행정기관에는 담당 공무원이 있다. 법무부서가 있고, 조직의 기록이 있으며, 필요하면 변호사의 도움도 받을 수 있다. 근무시간에 사건을 검토하는 것 자체가 업무다.
그러나 시민에게는 어떠한가. 시민은 생업을 마치고 밤에 공문을 읽는다. 행정기관이 제시한 법조문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인터넷을 뒤진다. 정보공개청구를 하고, 답변을 기다리고, 다시 이의를 제기한다. 행정심판 청구서를 작성하고, 그래도 해결되지 않으면 소송을 고민한다. 변호사를 선임하면 비용이 든다. 직접 소송하면 시간을 쏟아야 한다. 증거를 확보하려면 또 다른 절차를 거쳐야 한다. 몇 달이면 끝날 것 같았던 일이 1년, 2년으로 이어지기도 한다.
그래서 형식적으로는 똑같이 법 앞에 서 있어도 실제 싸움의 조건은 전혀 같지 않다. 한쪽에는 조직·예산·전문성·시간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자기 삶 하나를 걸고 싸우는 시민이 서 있다. 이것을 단순히 “법대로 해결하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오늘의 여리고 길은 행정절차 속에도 있다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에서 한 사람이 예루살렘에서 여리고로 내려가다가 강도를 만난다. 강도들은 그의 것을 빼앗고 상처를 입힌 뒤 길에 버려둔다.
오늘의 강도 만난 자는 반드시 피를 흘리며 길가에 누워 있지 않다. 어떤 사람은 불허처분 앞에 쓰러진다. 어떤 사람은 영업정지나 철거명령 앞에서 무너진다. 어떤 사람은 변상금과 과징금 통지서를 들고 밤잠을 이루지 못한다. 어떤 사람은 자신에게 불리한 결정이 왜 내려졌는지 확인하려고 정보공개를 청구하지만 비공개 결정이라는 또 하나의 벽을 만난다. 그리고 어떤 사람은 마지막 희망으로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을 시작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돈과 체력과 마음이 먼저 소진된다. 그래서 나는 오늘의 여리고 길이 어디인지 묻고 싶다. 어쩌면 그것은 행정기관의 현관에서 법원의 계단까지 이어지는 길일 수도 있다.
“소송하면 되지”라는 말의 잔인함
우리는 억울하다는 시민에게 너무 쉽게 말한다. “소송하세요.” 그러나 이 말은 때로 잔인하다. 소송을 시작한다는 것은 단순히 소장을 한 장 제출한다는 의미가 아니다. 처분의 근거를 찾아야 한다. 사실관계를 정리해야 한다. 증거를 확보해야 한다. 상대방의 답변서를 분석하고 반박해야 한다. 기일에 맞춰 서면을 제출하고, 때로는 몇 년을 견뎌야 한다.
그 사이 시민의 삶은 계속된다. 월세도 내야 하고, 가족도 돌봐야 하고, 일도 해야 한다. 행정기관의 담당자는 바뀔 수 있다. 담당자가 인사이동을 하면 사건은 다음 사람에게 넘어간다. 그러나 시민에게 사건은 인계되지 않는다. 그 사람의 삶에 그대로 남는다. 행정기관에는 하나의 사건번호일 수 있지만 시민에게는 생업이고, 재산이며, 명예이고, 때로는 인생 전체다. 바로 이 차이를 보지 못하는 법치는 약자를 더욱 외롭게 만든다.
법 앞의 평등만으로 충분한가
헌법은 법 앞의 평등을 선언한다. 그러나 진정한 평등은 문을 똑같이 열어두는 것만으로 완성되지 않는다. 100m 앞에 법원이 있다고 하더라도 한 사람은 자동차를 타고 가고, 다른 사람은 무거운 짐을 지고 맨발로 걸어가야 한다면 “길은 모두에게 열려 있다”는 말만으로 공정하다고 할 수 있는가.
지난 ⑦회에서 말했던 아스팔트 위의 스케이트가 여기에서도 등장한다. 행정기관과 시민 모두에게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이라는 길이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전문지식도, 돈도, 시간도 없는 시민에게 그 길이 아스팔트라면 어떠한가. 그 시민에게 “당신도 달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권리를 보장하는 것이 아니다. 달릴 수 없는 바닥을 그대로 둔 채 개인에게 더 열심히 달리라고 요구하는 것이다.
절차가 정의를 대신할 때
더 위험한 것은 행정기관이 절차를 지켰다는 이유만으로 정의까지 실현했다고 생각하는 순간이다. 통지했다. 답변했다. 이의신청 기회를 주었다. 행정심판을 청구할 수 있다고 안내했다. 그러면 행정의 책임은 끝난 것인가. 아니다. 절차는 정의를 실현하기 위한 수단이지, 시민을 포기하게 만드는 장벽이어서는 안 된다. 아무리 적법한 형식을 갖추었더라도 시민이 이해하기 어려운 이유를 제시하고, 필요한 정보에 접근하기 어렵게 만들고, 실질적인 의견제출 기회를 주지 않는다면 그 절차는 껍데기만 남는다. 더구나 행정이 잘못했을 가능성이 있는데도 “불복하려면 소송하라”고 말한다면 책임의 방향이 뒤집힌다. 행정의 잘못을 바로잡는 비용까지 시민에게 떠넘기는 셈이기 때문이다.
선한 행정은 시민과 싸워 이기는 행정이 아니다
여기서 행정의 존재 이유를 다시 생각해야 한다. 행정은 시민과의 소송에서 승소하기 위해 존재하는 조직이 아니다. 행정은 시민의 권리를 보호하고 공익을 실현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렇다면 좋은 행정의 기준도 달라져야 한다. “우리 처분이 법원에서 취소되지 않았는가”만 물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결정 때문에 한 시민이 부당하게 무너지지는 않았는가”를 물어야 한다. 행정이 잘못했다면 소송까지 가기 전에 스스로 고쳐야 한다. 새로운 사실이 확인되면 다시 검토해야 한다. 시민의 주장이 합리적이라면 담당 부서의 체면보다 시민의 권리를 먼저 생각해야 한다. 그것이 행정의 패배가 아니다. 오히려 법치행정의 승리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무엇을 해야 하는가
그렇다면 행정의 벽 앞에서 쓰러진 시민에게 누가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상처에 기름과 포도주만 붓는 사람이 아니다. 정보공개청구서를 함께 작성해 주는 사람이다. 복잡한 공문을 시민의 언어로 풀어주는 사람이다. 회의록과 처분 근거를 함께 읽는 사람이다. 이의신청과 행정심판의 길을 알려주는 사람이다. 필요하다면 변호사와 전문가를 연결하고 소송비용을 함께 부담하는 공동체다. 교회도 할 수 있다. 시민사회도 할 수 있다. 대학의 법률지원 조직도 할 수 있고, 변호사와 법률가도 할 수 있다. 언론은 행정기관의 보도자료만 받아쓰는 데서 멈추지 않고 왜 한 시민이 그토록 오랫동안 싸워야 했는지를 물을 수 있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도 부족하다. 사마리아인이 계속 같은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한다면 언젠가는 물어야 한다. “도대체 이 길에서는 왜 계속 사람이 쓰러지는가.” 한 사람을 구하는 것이 이웃사랑이라면, 계속 사람이 쓰러지는 길을 고치는 것은 정의다.
권리구제의 문이 아니라 ‘도달할 수 있는 길’을 만들어야 한다
정보공개청구, 이의신청, 국민권익위원회 민원, 행정심판, 행정소송은 민주주의가 만들어낸 중요한 권리구제 장치다. 없애야 할 것이 아니라 더욱 실질적으로 작동하게 만들어야 한다. 중요한 것은 제도가 존재한다는 사실이 아니다. 시민이 실제로 그 제도에 도달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법률지원은 더 가까워져야 한다. 행정기관의 설명의무는 강화되어야 한다. 정보공개는 예외가 아니라 원칙이어야 한다. 명백한 행정 오류는 시민에게 소송을 요구하기 전에 행정 스스로 시정하는 문화가 자리 잡아야 한다. 경제적 능력 때문에 권리구제를 포기하지 않도록 공공 법률지원도 촘촘해져야 한다. 권리가 종이에만 존재하면 그것은 약속일 뿐이다. 권리는 시민이 실제로 행사할 수 있을 때 비로소 권리가 된다.
다시 여리고 길에서
강도 만난 사람 곁을 제사장도 지나갔고 레위인도 지나갔다. 그들에게도 이유는 있었을 것이다. 바빴을 수도 있다. 자신이 책임질 일이 아니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다른 사람이 도와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다.
오늘 우리 역시 말한다. “담당 부서가 알아서 하겠지.” “권익위에 가면 되겠지.” “법원이 판단하겠지.” 그러나 그 말을 하는 동안 시민 한 사람이 행정의 벽 앞에서 지쳐 쓰러지고 있다면 우리는 정말 그 사람의 이웃인가. 예수의 질문은 2천 년이 지나도 피할 수 없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오늘 그 질문은 이렇게 바꾸어 물을 수 있다. 법적으로 다툴 권리는 있지만 실제로 다툴 힘이 없는 시민에게, 우리는 어떤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강도 만난 자는 길가에만 쓰러져 있지 않다. 그는 오늘도 공문 한 장을 손에 들고 행정의 벽 앞에 서 있다. 그리고 어쩌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은 그에게 다시 한번 “소송하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혼자 싸우지 않아도 되는 사회를 만드는 것인지도 모른다.
▶ 다음 회차 예고 ⑨
법대로 했다는 말은 정의의 답이 될 수 있는가
― 적법한 행정과 정의로운 행정은 언제 갈라지는가
행정기관은 종종 “법과 절차에 따라 처리했다”고 말한다. 그러나 적법하다는 사실만으로 모든 행정이 정의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⑨회에서는 재량권, 비례원칙, 평등원칙, 신뢰보호, 이유제시, 의견제출과 행정의 자기시정 책임을 통해 ‘법대로 했다’는 말 뒤에 숨어 있는 또 하나의 문제를 살펴본다. 법은 행정의 방패인가,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기준인가. 그리고 적법성과 정의가 충돌하는 순간 행정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를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