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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선 ⑲회에서 《…And Justice for All》을 통해 “판사를 누가 심판하는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사건이 판사의 책상에 올라오기 전에 이미 수많은 판단이 내려진다. 경찰은 용의자를 특정하고, 국가는 그 사람의 유죄를 주장하며, 그 증거와 주장이 법정으로 들어간다.
그렇다면 이번에는 질문의 방향을 한 단계 앞으로 돌려보자. 판사가 국가의 주장을 판단한다면, 국가가 한 사람을 범인이라고 확신하기 시작하는 그 순간에는 누가 그 확신을 의심하는가.
1974년 10월 5일 밤, 영국 길퍼드(Guildford). 군인들이 자주 찾던 Horse and Groom 펍에서 폭탄이 터졌다. 다섯 명이 목숨을 잃었다. 폭탄은 아무런 경고 없이 터졌고, 많은 사람이 다쳤다. 영국 사회는 충격에 빠졌다. 범인을 잡아야 했다. 빨리 잡아야 했다. 또 다른 폭탄이 터지기 전에 막아야 했다. 경찰에는 엄청난 압력이 가해졌다. 시민은 불안했고 국가는 답을 내놓아야 했다.
그러나 바로 이런 순간에 수사기관이 가장 먼저 붙들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우리가 붙잡은 이 사람이 정말 범인인가?” 국가가 이 질문을 놓치는 순간, 범인을 잡기 위해 부여된 힘은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드는 힘으로 바뀔 수 있다.
1993년 짐 셰리던(Jim Sheridan) 감독의 《In the Name of the Father》는 영국 현대사의 대표적인 사법오류(miscarriage of justice) 사건인 ‘길퍼드 4인(Guildford Four)’ 사건을 바탕으로 한다. 영화적 각색은 있지만, 이 글에서는 영화가 보여주는 사건의 흐름을 따라 국가의 수사·기소·재판 과정에서 하나의 오류가 어떻게 다음 단계의 확신으로 확대될 수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한 청년이 런던으로 간다
영화의 주인공은 북아일랜드 벨파스트 출신의 젊은이 게리 콘론(Gerry Conlon)이다. 대니얼 데이루이스(Daniel Day-Lewis)가 연기한 게리는 처음부터 정의로운 영웅으로 등장하지 않는다. 철이 없다. 말썽도 피운다. 아버지에게 걱정을 끼친다. 결국 그는 벨파스트를 떠나 런던으로 간다.
그런데 런던 인근 길퍼드에서 폭탄이 터진다. 사람들이 죽었다. 경찰은 범인을 찾아야 한다. 그리고 수사의 시선이 게리와 주변 사람들을 향하기 시작한다. 게리 콘론(Gerry Conlon). 폴 힐(Paul Hill). 패디 암스트롱(Patrick ‘Paddy’ Armstrong). 캐럴 리처드슨(Carole Richardson). 훗날 이들은 길퍼드 4인으로 불리게 된다. 그리고 이들을 감옥으로 보내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한 것은 강력한 물적 증거가 아니었다. 자백(confession)이었다.
“자백했으니 범인이다”
영화에서 경찰은 게리를 집요하게 몰아붙인다. 잠을 제대로 자지 못하게 하고 폭력과 모욕, 심리적 압박을 이어간다. 게리는 자신이 폭탄테러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버티지만, 경찰은 그의 설명보다 이미 세워놓은 결론에 그를 맞추려 한다.
그러나 게리를 끝내 무너뜨린 것은 자신의 고통만이 아니었다. 아버지였다. 경찰은 아버지 주세페 콘론(Giuseppe Conlon)을 죽이겠다고 위협한다. 자신이 맞고 모욕당하는 것은 견디려 했던 게리도, 자신 때문에 아버지가 죽을 수 있다는 공포 앞에서는 무너진다. 결국 그는 자신이 저지르지 않았다고 주장해 온 범죄를 인정하는 취지의 진술에 서명한다.
여기서 영화의 첫 번째 질문이 시작된다. 자백은 곧 진실인가. 오늘날 영국 형사사건재심위원회(Criminal Cases Review Commission·CCRC)는 길퍼드 4인 등 중대한 사법오류의 역사에서 허위자백(false confession), 경찰 비위(police misconduct), 증거 미공개(non-disclosure)등의 문제가 드러났다고 설명한다. 특히 1984년 경찰 및 형사증거법(PACE) 이전에는 경찰조사가 녹음되지 않는 경우가 많아 피고인이 자백 내용을 부인하거나 강압을 주장해도 경찰의 설명을 반박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그래서 질문은 “자백했는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그 자백은 어떻게 만들어졌는가?” confession(자백), false confession(허위자백), coerced confession(강압에 의한 자백). 같은 ‘자백’처럼 보여도 그 의미는 전혀 다를 수 있다.
게리의 진실이 바뀐 것이 아니었다. 진실을 계속 말할 수 있는 인간의 힘이 먼저 무너진 것이다. 그리고 그렇게 만들어진 자백이 증거가 되고, 수사의 확신이 되고, 마침내 법정으로 들어가는 순간 한 사람의 인생을 가둘 수 있다.
한 사람을 향한 의심이 가족까지 삼켰다
사건은 게리 한 사람에게서 끝나지 않았다. 조사실에서 게리를 무너뜨렸던 것은 “아버지를 죽이겠다”는 협박이었다. 그런데 그 아버지 주세페 콘론(Giuseppe Conlon)은 얼마 뒤 협박 속의 이름이 아니라 실제 피고인이 된다.
수사의 손길은 친척 애니 매과이어(Annie Maguire)와 그 가족에게까지 뻗는다. 주세페를 포함한 7명은 손에서 니트로글리세린 흔적이 검출됐다는 감정 등을 근거로 폭발물 취급(handling explosives)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는다. 이들이 이른바 매과이어 7인(Maguire Seven)이다. 훗날 그 감정의 신뢰성에는 중대한 문제가 있었음이 드러났고 유죄판결도 파기됐지만, 주세페는 끝내 그날을 보지 못했다. 그는 1980년 감옥에서 세상을 떠났다.
한 사람을 향했던 의심이 아버지를 지나 가족 전체로 번져갔다. 그리고 여기서 더 무서운 질문이 시작된다. 증거가 사람을 가리킨 것인가, 아니면 먼저 지목된 사람에게 증거가 끌려간 것인가.
증거가 사람을 가리켜야 하는가, 사람이 증거를 끌어당겨야 하는가
수사는 원래 Evidence → Suspect(증거 → 용의자)로 가야 한다. 증거를 따라간 끝에 사람이 나타나야 한다.
그러나 먼저 범인을 확신하면 방향은 Suspect → Evidence(용의자 → 증거)로 뒤집힐 수 있다. 자신의 판단과 맞는 증거는 크게 보고, 맞지 않는 사실은 작게 보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다. 그 순간 수사는 진실을 찾는 과정에서 처음 내린 결론을 증명하는 과정으로 변한다.
그렇다면 공소 단계에서는 달라야 하지 않을까. “경찰이 그렇게 판단했다”가 아니라 “그 판단을 뒷받침하는 증거가 정말 충분한가”를 다시 물어야 한다. 공소권은 수사의 확신을 법정으로 운반하는 통로가 아니라, 그 확신을 다시 검증하는 또 하나의 문이어야 한다.
경찰의 확신이 검사의 공소가 되고, 법원의 판결이 되었다
길퍼드 4인은 결국 유죄판결을 받았다. 그들은 감옥으로 갔다. 항소도 곧바로 그들을 구하지 못했다. 처음에는 경찰의 판단이었다. 그 판단이 공소기관을 거쳤다. 법원으로 갔다. 유죄판결이 내려졌다. 항소절차에서도 바로잡히지 않았다. 그리고 사람들은 교도소로 갔다.
Police → Prosecution → Court → Prison
경찰 → 공소 → 법원 → 감옥
한 기관의 판단이 다음 기관으로 넘어갈 때마다 그 판단은 다시 검증되어야 했다. 그러나 여러 국가기관이 같은 결론을 반복할수록 오히려 그 결론은 점점 더 강한 ‘사실’처럼 보일 위험이 있다.
오판의 무서움은 바로 여기에 있다. 경찰의 판단이 검사의 확신이 되고, 검사의 확신이 법원의 유죄판결로 이어지는 순간, 처음의 잘못된 판단은 어느새 누구도 의심하기 어려운 ‘사실’로 굳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경찰이 잡았다.” “검사가 기소했다.” “법원이 유죄라고 했다.” 세 문장이 합쳐지는 순간 시민은 묻게 된다. “그런데도 무죄일 수 있는가?” 길퍼드 4인 사건은 바로 그 질문에 불편한 대답을 남겼다. 그럴 수 있었다.
그런데 기존의 유죄판결과 맞지 않는 사실들이 나타났다
시간이 흘렀다. 사건은 끝난 것처럼 보였다. 그러나 기존 유죄판결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사실이 나타났다. 이후 체포된 임시 아일랜드 공화국군(Provisional Irish Republican Army·PIRA)소속 이른바 ‘발컴 스트리트 갱(Balcombe Street Gang)’의 조직원들이 길퍼드 폭탄테러에 자신들이 관련됐다는 취지의 진술을 한 것이다.
이미 길퍼드 4인이 범인으로 유죄판결을 받아 복역하고 있던 상황에서, 이러한 진술은 기존 판결의 신뢰성을 다시 물어야 할 중대한 사정이었다. 영화는 이 복잡한 실제 과정을 조 맥앤드루(Joe McAndrew)라는 IRA 인물을 통해 압축해 보여준다.
게리는 자신이 하지 않았다고 주장해온 범죄를 다른 사람이 인정하는 상황에서도 여전히 감옥에 갇혀 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여기에서 사건은 다시 열려야 한다. 하지만 이미 판결이 내려져 있다. 국가는 범인을 잡았다고 했다. 법원도 유죄라고 했다. 사람들은 감옥에서 복역하고 있다. 영화의 긴장은 여기서 더욱 높아진다. 기존 판결과 충돌하는 중대한 사실이 나타났는데도, 이미 내려진 유죄판결은 왜 쉽게 움직이지 않는가.
국가는 자신의 오류를 얼마나 쉽게 인정할 수 있는가
개인은 말할 수 있다. “내가 잘못 봤습니다.” 하지만 국가기관의 오류는 그렇게 간단하지 않다. 수사기록이 있다. 공소가 있다. 판결이 있다. 관련 기관의 판단이 쌓여 있다. 기관의 신뢰도 걸려 있다. 그래서 형사사법에서 가장 위험한 순간은 어쩌면 국가가 이미 정답을 발표한 다음일지도 모른다.
처음에는 “이 사람이 정말 범인인가?”라고 물었다. 그러나 유죄판결이 내려지고 한 사람이 감옥에 갇힌 뒤에는 질문이 뒤집힐 수 있다. “우리가 틀렸을 가능성은 없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틀리지 않았다는 것을 어떻게 지킬 것인가?”로 바뀌는 것이다. 바로 그 순간 형사사법제도에는 기존 판단을 방어하는 힘보다 자신의 판단을 다시 의심할 수 있는 힘이 필요하다.
그리고 묻혀 있던 기록이 모습을 드러낸다
영화 후반부에서 긴장은 절정으로 향한다. 게리의 사건을 파고들던 변호사 개러스 피어스(Gareth Peirce)가 사건기록을 검토한다. 자료를 넘긴다. 또 넘긴다. 그러다 기존 사건의 그림과 맞지 않는 자료를 발견한다. 관객에게는 섬뜩한 순간이다. 피고인에게 유리할 수 있는 자료가 존재했는데, 변호인은 그것을 충분히 활용할 수 없었다. 실제 길퍼드 4인 사건에서도 증거 미공개는 중대한 문제였다.
여기서 세 개의 중요한 법률용어가 등장한다. disclosure(증거·자료 공개), non-disclosure(증거 미공개), exculpatory evidence(피고인에게 유리한 증거). 이것은 단순한 서류 문제가 아니다. 한쪽은 국가다. 경찰과 수사조직이 있다. 수많은 기록에 접근할 수 있다. 반대편에는 피고인이 있다. 자신에게 유리한 자료가 국가의 서류함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를 수 있다. 그 자료가 공개되지 않는다면 어떻게 자신을 방어할 수 있는가.
15년 가까운 시간이 흐른 뒤에야 감옥 문이 열렸다
시간은 계속 흘렀다. 1년. 5년. 10년. 그동안 사람들은 감옥에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경찰 면담기록의 신뢰성을 무너뜨리는 중대한 문제가 드러났다. 1989년 10월 19일 항소법원은 길퍼드 4인의 유죄판결을 파기했다. 1974년 체포에서 1989년 석방까지. 약 15년이다. 한 문장으로 쓰면 짧다. “15년 만에 풀려났다.” 그러나 감옥에서 15년을 살아보지 않은 사람에게 그 문장의 무게를 온전히 상상하기는 어렵다. 봄이 지나갔다. 겨울이 왔다. 다시 봄이 왔다. 그렇게 청춘이 지나갔다. 그리고 게리의 아버지 주세페는 자유를 되찾지 못한 채 수감 중 세상을 떠났다. 국가가 훗날 말한다. “판결이 잘못됐다.” 그러나 그 한마디가 지나간 시간을 돌려놓을 수 있는가.
검사는 유죄판결을 받아내는 사람인가
앞선 ⑲회에서는 판사의 책임을 물었다. 이번에는 그보다 앞선 공소의 책임을 묻고 싶다. 검사(prosecutor)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검사의 목적이 유죄판결을 받아내는 것이라면 역할은 비교적 단순해진다. 그러나 검사가 국가를 대표해 공소권을 행사하는 사람이라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국가의 목적은 승소인가. 아니면 정의인가. 대부분의 사건에서는 둘이 일치할 것이다. 진짜 범인을 정확한 증거로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받는다면 승소와 정의는 같은 방향을 향한다.
문제는 둘이 갈라지는 순간이다.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다. 자백의 신뢰성이 흔들린다. 알리바이가 나타났다. 피고인에게 유리한 자료가 발견됐다. 수사기록에 모순이 생겼다. 그 순간 검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 자신의 사건을 지켜야 하는가. 아니면, 자신의 사건부터 다시 의심해야 하는가.
검사의 가장 어려운 결정은 기소가 아니라 멈추는 것일 수도 있다
검사는 사람을 법정에 세울 수 있다. 국가의 이름으로 유죄를 주장한다. 그 권한은 크다. 그렇기 때문에 검사의 능력을 얼마나 많은 사람을 기소하고 얼마나 많은 유죄판결을 얻어냈는지만으로 판단할 수는 없다. 때로는 기소하지 않는 판단도 필요하다. 새로운 증거 앞에서 기존 판단을 다시 검토하는 결단도 필요하다.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만큼 유리한 증거도 정직하게 다루는 태도도 필요하다.
그리고 가장 어려운 순간이 있다. 자신이 틀렸을 가능성을 인정해야 하는 순간이다. 그래서 나는 형사사법권을 행사하는 사람의 책상 위에 한 문장이 놓여 있어야 하지 않을까. What if I am wrong? 만약 내가 틀렸다면? 이 질문은 권력을 약하게 만드는 질문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의 공소권을 더 신뢰할 수 있게 만드는 질문이다. 강한 권력은 한 번도 틀리지 않는 권력이 아니다. 틀렸을 가능성을 스스로 검증하고, 잘못이 확인되면 되돌릴 수 있는 권력이다.
그러나 이것은 검사만의 실패에 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여기에서 책임을 단순화해서는 안 된다. 길퍼드 4인 사건은 ‘경찰은 악했다.’ ‘검찰은 불의했다.’ ‘법원은 속았다.’라는 세 문장으로 끝낼 수 있는 사건이 아니다. 경찰수사가 있었다. 공소가 있었다. 재판이 있었다. 항소가 있었다. 그런데 바로잡는 데 거의 15년이 걸렸다.
그렇다면 더 중요한 질문은 이것이다. 왜 국가의 여러 안전장치가 연속해서 오류를 바로잡지 못했는가.
영국은 결국 이 문제를 개인의 잘못으로만 남겨두지 않았다. 길퍼드 4인(Guildford Four), 버밍엄 6인(Birmingham Six), 매과이어 7인(Maguire Seven) 등 일련의 중대한 사법오류가 이어진 뒤 형사사법제도에 대한 대대적인 재검토가 이루어졌고, 이후 「Criminal Appeal Act 1995」에 따라 독립기관인 형사사건재심위원회(Criminal Cases Review Commission·CCRC)가 설치되어 1997년 업무를 시작했다. CCRC는 일정한 요건 아래 오판 가능성이 있는 사건을 독립적으로 조사해 항소법원에 회부할 수 있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다. 국가가 자신의 오류를 바로잡는 일을 그 오류를 만들어낸 기존 기관의 선의에만 맡기지 않고, 별도의 독립적인 검토 장치를 만든 것이기 때문이다.
권력의 연쇄에는 검증의 연쇄가 따라야 한다
⑲회에서 우리는 물었다. Who judges the judges? 판사를 누가 심판하는가. ⑳회에서는 질문을 하나 더 보태야 한다. Who questions the prosecution? 공소기관의 확신을 누가 다시 검증하는가. 경찰이 용의자를 특정한다. 공소기관이 기소한다. 판사가 판단한다. 이것은 단순한 권력의 전달과정이어서는 안 된다. 각 단계가 앞 단계의 판단을 다시 검증하는 검증의 과정이어야 한다. 경찰이 확신할수록 공소기관은 증거를 더 냉정하게 보아야 한다. 공소기관이 확신할수록 법원은 더 독립적으로 검증해야 한다. 법원이 유죄를 선고했더라도 새로운 증거가 나타난다면 다시 볼 수 있는 길이 있어야 한다. 권력의 연쇄에는 반드시 검증의 연쇄가 따라야 한다. ⑲회에서 “판사도 법 위에 있지 않다”고 말했다면, 이번에는 국가도 자신의 확신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강도 만난 자는 길가에만 쓰러져 있지 않다
다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로 돌아간다. 강도 만난 사람은 길가에 쓰러져 있었다. 그러나 오늘날 사람은 제도 앞에서도 쓰러질 수 있다. 잘못된 수사로 쓰러질 수 있다. 강요되거나 신뢰하기 어려운 자백 때문에 쓰러질 수 있다. 공개되지 않은 증거 때문에 쓰러질 수 있다. 잘못된 기소와 오판으로 쓰러질 수 있다.
하지만 여기에서도 선을 분명히 해야 한다. 수사를 받는다고 모두 강도 만난 자가 되는 것은 아니다. 기소됐다고 모두 피해자인 것도 아니다. 범죄에는 실제 피해자가 있다. 국가는 범죄를 수사하고 진짜 범인을 찾아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 길퍼드 폭탄테러에서도 결코 잊어서는 안 될 사람들이 있다. 폭탄으로 목숨을 잃은 사람들과 부상자들이다. 그들의 정의를 위해서라도 진짜 범인을 찾아야 한다. 무고한 사람을 범인으로 만드는 것은 피고인에게만 불의가 아니다. 피해자에게도 또 하나의 불의다. 잘못된 사람을 감옥에 넣는 순간 진짜 범인은 정의의 심판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누가 이웃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어느 진영의 사람이었는지를 먼저 묻지 않았다. 쓰러진 사람에게 가까이 갔다. 그렇다고 오늘날 이웃이 된다는 것이 피고인의 말을 무조건 믿는다는 뜻도 아니다. 검사를 무조건 의심하는 것도 아니다. 경찰을 적으로 보는 것도 아니다. 판결을 모두 불신하는 것도 아니다.
오히려 더 어려운 일을 해야 한다. 증거를 확인해야 한다. 반대되는 증거도 보아야 한다. 자백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물어야 한다. 자신이 믿고 싶은 사실과 다른 자료도 읽어야 한다. 그리고 국가가 틀릴 가능성을 제도 안에 남겨두어야 한다. 이웃은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쓰러져 있을 때 진실이 정말 내 편인지 끝까지 확인해주는 사람이다.
한 사람을 구하는 것에서 길을 고치는 것으로
게리 콘론은 결국 감옥에서 나왔다. 그러나 아버지는 자유를 되찾지 못했다. 그렇다면 한 사람을 석방하는 것으로 정의가 완성되는가. 아니다. 왜 그 사람이 그토록 오랫동안 갇혀 있었는지를 물어야 한다. 왜 잘못된 자백을 걸러내지 못했는지. 왜 알리바이가 충분히 검증되지 않았는지. 왜 중요한 자료가 제대로 공개되지 않았는지. 왜 항소절차에서도 오류가 바로잡히지 않았는지.
그리고 가장 중요한 질문이 남는다. 다음 사람에게 같은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무엇을 바꿀 것인가. 한 사람을 감옥에서 꺼내는 것은 회복이다. 다음 무고한 사람이 그 감옥에 들어가지 않도록 제도를 고치는 것은 정의다.
가장 큰 권한을 가진 사람이 가장 자주 물어야 한다
《In the Name of the Father》를 보고 나면 내게는 거창한 법률용어보다 짧은 질문 하나가 남는다. What if I am wrong? 만약 내가 틀렸다면? 경찰이 물어야 한다. 검사가 물어야 한다. 판사가 물어야 한다. 기자도 물어야 한다. 시민도 물어야 한다. 그러나 모두가 똑같은 무게로 물어야 하는 것은 아니다. 권한이 클수록 더 자주, 더 엄격하게 물어야 한다.
평범한 시민의 잘못된 확신도 누군가에게 상처를 줄 수 있다. 그러나 국가권력의 잘못된 확신은 한 사람을 체포하고, 기소하고, 유죄판결을 거쳐 감옥에 보낼 수 있다. 틀릴 수 있다는 사실은 인간의 한계다. 그러나 틀릴 수 있는 인간에게 다른 사람의 자유를 빼앗을 권력을 주면서 그 오류를 발견하고 되돌릴 장치를 충분히 만들지 않는 것은 제도의 문제다.
그래서 검사의 정의는 유죄판결로만 완성되지 않는다. 무죄인 사람을 기소하지 않는 것. 피고인에게 불리한 증거만큼 유리한 증거도 정직하게 보는 것. 자신의 판단과 충돌하는 새로운 증거가 나타났을 때 다시 검토하는 것. 그리고 이미 유죄판결이 내려졌더라도 잘못이 확인된다면 바로잡는 것. 그것까지가 국가의 책임이다.
검사의 힘은 사람을 법정에 세울 수 있다는 데만 있지 않다. 잘못 세운 사람을 다시 내려오게 할 수 있는 데에도 있다. ⑲회의 결론은 “판사까지 법 아래 있을 때 법의 지배는 비로소 완성된다”였다. ⑳회에서는 거기에 한 문장을 더하고 싶다. 누구도 법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국가도 자신의 확신 위에 있어서는 안 된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나는 다시 예수의 질문을 듣는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국가가 유죄를 확신하는 순간에도 “만약 우리가 틀렸다면?”이라고 묻는 사람. 무죄의 가능성을 끝까지 확인하는 사람. 그리고 그 질문이 어느 한 사람의 용기에만 의존하지 않도록 검증(self-correction)의 제도를 만드는 사람. 그 사람도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