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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하식 박사, 글로 남긴 ‘뉴질랜드’ 풍경(14회)】  산악인이 남긴 교훈


- 조하식 (칼럼니스트, 기독교철학박사) - 


----------(14회)----------

  그렇다고 그대로 말 수는 없었다. 곧바로 이웃 나라의 사례를 조사한 뒤 장문의 보고서를 수상에게 보냈다. 이를 검토한 비서진은 자칫 방송을 탈 수도 있다는 데 지레 겁을 먹고 면담을 주선했다. 자초지종을 들은 수상은 그녀에게 선뜻 ‘시민고발센터장’이라는 별정직 자리를 제안했다. 그때까지 원성으로 들끓던 장소는 하루아침에 칭찬이 자자한 부서로 바뀐다. 멋지게 맡은 일을 궤도에 올려놓은 그녀에게 전격적으로 내무부 수장의 직책이 주어졌고, 장관직을 수행한 지 8년 만에 드디어 일국의 수상까지 올랐다는 스토리. 그녀는 내리 3선을 연임한다. 악몽 같은 6개월은 차라리 축복이었다. 그 반년간의 실직 기간이 아니었다면 아마 그녀는 평범한 월급쟁이로 남았을 확률이 높았을 것이다. 인생 역전 드라마의 주인공이 된 그녀의 이름은 헬렌 클라크(Helen Clark, Helen Elizabeth Clark, 1950~). 당찬 여걸은 자서전 에서 이렇게 회고한다. “행복과 불행은 문고리 하나 사이에 있다.”라고. 풀어놓은 유려(流麗)한 이야기 속으로 푹 빠져든 가운데 문득 프랑스의 정치철학자인 토크빌(Tocqueville, 1805~1859)이 던진 일갈이 떠올랐다. “어떤 국민이든지 자기들 수준에 꼭 맞는 지도자를 갖는 법이다.” 우리는 언제쯤 이런 리더십을 경험할 수 있을까?

  가이드의 상식에는 깊은 지적 배경이 있었다. 화폐에 관한 담론(談論)이 이를 증명했다. 이 나라에서 가장 인기 있는 기념품이 아이러니하게도 5불짜리 지폐란다. 이른바 돈이야말로 예술의 총화라는 논리였다. 그러기에 앞면에는 국수(國樹)인 고사리나무와 힐러리 경을, 뒷면에는 밀퍼드 사운드에 서식하는 노란 눈의 펭귄을 그려 넣었다는 설명. 전 세계를 통틀어 살아있는 사람을 화폐에 등장시킨 예가 없단다. 비록 고문 자격의 참관이었지만 생전에 87세의 나이로 남극탐험대를 격려한 일만 보아도 존경받아 마땅한 터. 그러나 필자가 맡은 그의 고매한 향기는 따로 있었다. 역사적 기록을 남기는 순간에 셰르파와 맺은 약속이 그것. 누가 꼭대기에 발을 먼저 디뎠느냐는 세기의 양보였으되 죽을 때까지 함구한 그 무거운 입술인즉슨 사안의 중대성을 감안한다면 그리 간단한 결단은 아니었을 테니까. 그 영혼이 생의 마지막 순간에 예수그리스도를 구주로 부르며 구원을 받았는지는 모를 일이나 한평생 견지한 의연함만은 후세인들에게 귀감이 될 만하다.

  가이드는 거기에 덤을 달았다. 여행의 진수를 삼등분 할진대 1/3은 자연을, 1/3은 시스템을, 1/3은 인물을 알고 가라는 조언. 그 맥락에도 힐러리 경이 있었다. 그는 천문학적인 강연료를 받아 동지인 텐진 노르게이의 고향에 병원과 학교를 세웠다. 소외된 히말라야 부족을 도우면서도 단 한 번도 사생활을 공개하지 않은 품격. 사후 추모 방송을 통해 보니 집에는 50년을 두고 쓴 고가구 다섯 점이 있을 뿐이었다. 검소하다 못해 경건한 영웅의 진면목. 놀랍게도 그가 남긴 마지막 말은 따로 있었다. “나는 한국인을 가장 좋아합니다!” 고인이 된 산악인 고상돈을 기린 칭송이었다. 무엇이 그를 감동시켰나 알아보니 실패에 좌절하지 않고 도전에 도전을 거듭하다가 끝내 죽음을 맞이한 동지에게 보내는 아쉬움이자 미안함이었다. 한국의 장례문화 가운데 사람을 맹목적으로 숭배하는 일이야말로 응당 잘못된 것이로되 각 분야의 걸인(傑人)을 허용치 않는 한 우리는 더는 세계로 뻗어 나가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경고하거니와 인생의 뚜렷한 모델이 곁에 있어야 아이들에게 생생한 교훈을 줄 수 있다는 일갈이기도 하다. 서기 1953년 5월 29일, “이제 땅이 없어 더는 못 갑니다.”라고 외쳤던 힐러리의 기개가 그래서 한층 빛나는 참이리라.

  추신이 이어졌다. 1등만이 인정받는 나라의 병폐는 생각보다 깊다는 것. 무릇 장애를 딛고 40년에 걸쳐 정복했다면 어디든 정상이라는 데 동의한다. 시도하다가 잘 안 되는 일은 실패가 아니라 성장하고 있다는 근거라고 격려한 이가 바로 그였다. 그가 취한 언행에 수많은 범인(凡人)들이 용기를 얻고 생기를 회복했다는 점에 십분 유의한다. 남극 탐험을 접은 채 좌절하고 있던 고상돈을 크라이스트처치 공항까지 나가 보듬은 그야말로 진정한 스승이었다. 훗날 상돈은 그 일을 상기하며 재기를 다졌다. ‘도전 없이 미래가 없다’는 유언을 남기고 산화한 그의 내세를 생각하면 머리가 무거우나 최선을 다한 그의 삶은 참 아름다웠다. 다만 짧은 생애를 사나이로 살다가 세상을 등진 그가 천국의 비밀을 깨달았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다시금 강조하거니와 한 인간의 마지막은 숨결이 끊어지면서 종결되는 게 아니다. 죽음이란 육신과 영혼이 분리되는 현상을 가리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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