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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건 칼럼연재 ㉕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교육을 책임진 사람은 누구를 인간으로 보았는가 ― ‘민중은 개·돼지’ 발언, 파면 취소와 교육행정의 책임

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 본지 발행인


▲  교육정책을 책임지는 고위공직자의 인간관과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달라지는 아이들의 출발선을 대비했다. 더 좋은 장비를 마련하는 경쟁보다 중요한 것은 모든 아이가 안전하고 공정하게 달릴 수 있는 교육환경을 만드는 일이다. 국가는 아이들을 동등한 시민으로 바라보고 있는가. [AI 재구성=주간시민광장]
 ※ 이미지는 실제 사건 현장 사진이 아닌 칼럼의 주제를 표현한 상징적 이미지입니다.


2016년 대한민국 교육부의 한 고위공직자가 기자들과 식사하는 자리에서 국민을 두고 “민중은 개·돼지”라는 취지의 말을 했다.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도 함께 알려졌다. 그 사람은 당시 교육부 정책기획관 나향욱이었다. 이 사건이 충격적이었던 것은 한 공무원이 부적절한 말을 했기 때문만은 아니었다. 그가 몸담았던 곳이 교육부였기 때문이다.

교육은 사람에게 자신의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일이어야 한다. 가난한 집에서 태어난 아이도, 부모에게 물려받은 자산이 없는 아이도, 지방에서 태어난 아이도 교육을 통해 삶의 가능성을 넓힐 수 있어야 한다.

그런 교육정책을 설계하는 고위공직자의 입에서 사람을 위와 아래로 나누는 듯한 말이 나왔다. 그렇다면 우리는 묻지 않을 수 없다. 교육을 책임지는 사람은 과연 국민을 어떤 존재로 보아야 하는가.

법원도 그 발언이 옳다고 하지 않았다

이 사건의 법적 경과부터 정확하게 볼 필요가 있다. 당시 중앙징계위원회는 공직사회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하고 고위공직자로서 품위를 크게 손상했다며 나향욱 정책기획관을 파면했다.

나 전 기획관은 이에 불복해 행정소송을 제기했다. 법원도 그의 발언에 문제가 없다고 하지 않았다. 1심 재판부는 해당 발언이 공무원의 품위유지의무를 위반한 징계사유라고 인정했다. 국민의 봉사자인 공무원이 해서는 안 될 발언이며, 공무원 전체에 대한 신뢰를 훼손하고 국민의 공분을 일으켰다고 지적했다.

그런데 법원은 다른 결론을 하나 더 내렸다. 잘못은 인정되지만 파면은 지나치게 무겁다는 것이었다. 2심도 같은 취지로 판단했고, 교육부가 대법원에 상고하지 않으면서 2018년 파면 취소가 확정됐다. 그는 공무원 신분을 회복했다.

이후 정부는 징계를 다시 해 파면보다 낮은 강등처분을 내렸다. 그는 다시 강등도 과하다며 다퉜지만, 2020년 서울행정법원은 강등 처분은 정당하다고 판단했다.

그러므로 사실관계는 분명하다. 법원이 그의 발언을 정당화한 것은 아니다. 징계사유를 부정한 것도 아니다. 파면이라는 최고수위의 징계가 비위 정도에 비해 과중하다고 판단했을 뿐이다.

그런데 교육공무원의 말은 그냥 ‘말’인가

법률적으로 보면 이것은 ‘징계비례의 원칙’에 관한 사건이다. 국가는 잘못을 저지른 공무원에게도 필요 이상으로 무거운 처분을 내려서는 안 된다. 그 원칙 자체는 중요하다. 여론이 분노한다고 해서 국가가 마음대로 한 사람의 신분을 박탈할 수 있다면 그것 또한 위험한 사회다.

그러나 법원의 판단을 존중하는 것과 그 판단에 질문을 던지는 것은 다른 문제다. 나는 여기에서 묻고 싶다. 교육을 책임지는 고위공직자가 사람을 계층으로 나누고 국민을 낮춰 보는 듯한 세계관을 드러냈다면, 그것을 일반적인 품위손상 사건과 똑같은 저울에 올려놓아도 되는가.

교육행정에는 특별한 성격이 있다. 교육부는 학교 건물과 예산을 관리하는 부처가 아니다. 어떤 아이에게 어떤 교육의 기회를 줄 것인가. 대학입시는 어떤 기준으로 운영할 것인가. 교육격차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가난한 가정의 아이에게도 올라갈 사다리를 만들어줄 것인가. 장애가 있거나 학업이 뒤처지는 아이를 어떻게 보호할 것인가. 이런 문제를 결정하는 곳이다. 그렇다면 교육정책을 책임지는 고위공직자에게 요구되는 것은 단순한 행정능력만이 아니다. 인간을 바라보는 관점이다.

교육은 사람에게 신분을 벗어날 사다리를 주는 일이다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이 특히 무거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교육이 존재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사람이 태어난 환경에 의해 자신의 삶 전체가 결정되지 않도록 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부모가 가난하다고 자녀까지 가난해야 하는가. 부모가 대학을 나오지 않았다고 자녀도 좋은 교육을 받지 못해야 하는가. 서울에서 태어나지 않았다고 교육기회가 적어야 하는가. 부모가 아파트와 금융자산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이유로 아이의 출발선까지 뒤로 밀려야 하는가.

교육은 바로 그 질문에 “그래서는 안 된다.”고 대답해야 하는 제도다. 그런데 교육정책을 책임지는 사람이 신분사회를 당연하게 여기는 것처럼 들리는 말을 했다면, 시민이 느낀 충격은 막말에 대한 불쾌감보다 깊을 수밖에 없다. 교육을 통해 신분의 벽을 낮춰야 하는 사람이 오히려 신분의 벽을 이야기했기 때문이다.

입시지옥은 한 사람이 만들지 않았다

여기에서도 사실을 과장해서는 안 된다. 한국의 입시경쟁을 나향욱이라는 한 사람이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다. 오늘의 입시지옥은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졌다. 대학서열이 있다. 학벌에 따른 노동시장의 보상격차가 있다. 서울과 지방의 격차가 있다. 정규직과 비정규직,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임금격차가 있다. 집값과 교육환경이 결합되어 있다. 부모의 경제력이 사교육에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를 경쟁에서 떨어뜨리지 않으려고 더 많은 돈과 시간을 투입한다. 그 결과 교육은 사람을 자유롭게 하는 사다리가 아니라 때로는 다음 계층으로 올라가기 위한 생존경쟁이 된다. 이 구조는 한 사람의 책임이 아니다. 역대 정부와 교육행정, 대학, 기업의 채용구조, 부동산과 지역격차, 그리고 우리 사회 전체가 함께 만들어온 것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교육행정 고위관료의 책임은 오히려 더 무겁다. 그 구조를 완화해야 할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법원은 무엇을 저울에 올렸는가

법원은 개인에게 가해지는 파면의 불이익을 무겁게 고려했다. 파면은 공무원 신분을 박탈한다. 향후 공무원 임용에도 제한이 생긴다. 퇴직급여에도 불이익이 따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사법부가 파면을 엄격하게 심사하는 것은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나는 시민의 입장에서 다른 쪽 저울도 바라본다. 교육행정에 대한 국민의 신뢰는 얼마나 무거운가. 한 명의 고위공무원이 받게 되는 불이익만큼, 수백만 학생과 학부모가 국가의 교육정책을 믿을 수 있는가의 문제도 무겁지 않은가. “저 사람들이 우리 아이를 동등한 인간으로 보고 있는가.” “가난한 집 아이와 부잣집 아이를 똑같은 시민으로 보고 있는가.” “정말 교육을 통해 삶의 기회를 넓혀주려고 하는가.” 이런 의문이 생기는 순간 교육행정의 신뢰 자체가 흔들린다.

따라서 이 사건의 질문은 “파면이냐 강등이냐”에서 끝나지 않는다. 더 큰 질문이 있다. 국가가 교육을 맡길 사람에게 어떤 인간관을 요구할 것인가.

공무원의 권리를 보호하는 법은 필요하다

여기에서 공무원의 신분보장을 공격해서는 안 된다. 오히려 공무원의 신분보장은 민주주의에도 필요하다. 정권이나 상급자의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공무원을 마음대로 해고할 수 있다면 공직사회는 권력에 종속될 수 있다. 부당한 징계를 받은 공무원에게 소청심사와 행정소송의 길을 열어두는 것도 당연하다.

문제는 그것이 아니다. 그렇게 촘촘하게 보호받는 공직자의 권리만큼 시민이 국가로부터 받는 상처와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도 법과 제도가 충분히 무겁게 보고 있는가라는 것이다. 이것은 공무원의 보호를 약화시키자는 질문이 아니다. 시민의 보호 역시 그만큼 강화하자는 질문이다.

강도 만난 사람은 길가에만 쓰러져 있지 않다

나는 계속해서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오늘의 사회에 묻고 있다. 강도 만난 사람은 언제나 여리고로 내려가던 길가에만 쓰러져 있는 것이 아니다. 학교에서 쓰러질 수 있다. 입시경쟁에서 쓰러질 수 있다. 가난 때문에 교육기회를 잃을 수 있다. 부모의 재산 때문에 이미 출발선에서 밀려날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나는 이 사회에서 동등한 사람으로 대접받고 있는가.”라는 질문 앞에서 쓰러질 수 있다. 그때 국가와 교육행정은 지나가는 제사장과 레위인이 되어서는 안 된다. 가장 먼저 멈춰야 한다.

교육의 첫 번째 교과서는 교과서가 아니다

아이들은 교과서만 보고 민주주의를 배우지 않는다. 어른들이 서로를 어떻게 대하는지를 보며 배운다. 교사가 학생을 어떻게 대하는가. 학교가 약한 학생을 어떻게 대하는가. 교육청이 학부모를 어떻게 대하는가. 교육부가 국민을 어떻게 바라보는가. 법원이 시민의 신뢰를 얼마나 무겁게 보는가. 이 모든 것이 아이들에게는 살아 있는 시민교육이다.

그래서 교육의 첫 번째 교과서는 책이 아닐지도 모른다. 국가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다. 사람을 개·돼지로 보는 사회와 사람을 시민으로 존중하는 사회는 전혀 다른 교육을 한다. 말로는 민주주의를 가르치면서 제도와 권력이 사람을 계층으로 나눈다면 아이들은 교과서보다 현실을 더 빨리 배운다.

내 아이만 살리는 교육은 결국 내 아이도 살리지 못한다

여기에서 다음 질문이 나온다. 우리 부모들은 어떠한가. 국가와 교육제도가 공정하지 못하다고 느낄수록 부모는 자기 아이를 지키기 위해 더 많은 사교육을 시킨다. 더 좋은 학교를 찾는다. 더 비싼 지역으로 이동한다. 더 많은 정보를 확보한다. 부모로서는 자연스러운 행동일 수 있다. 누구도 자기 아이에게 불리한 조건을 물려주고 싶지는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든 부모가 자기 아이만을 위해 경쟁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운동장의 아스팔트는 그대로인데 우리는 자기 아이에게 더 좋은 스케이트를 신기기 위해 경쟁한다. 어떤 아이는 최고급 스케이트를 신고, 어떤 아이는 낡고 불편한 스케이트를 신는다. 부모의 경제력과 정보력에 따라 장비의 차이는 점점 벌어진다.

하지만 더 근본적인 문제는 따로 있다. 아이들이 달려야 할 운동장 자체가 스케이트를 타기에 적합하지 않은 거친 아스팔트라는 사실이다. 우리는 내 아이의 스케이트를 바꾸는 데는 온 힘을 쏟으면서도, 왜 모든 아이가 이런 운동장에서 경쟁해야 하는지는 좀처럼 묻지 않는다.

더 좋은 스케이트를 사주는 것은 부모가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내 아이도 끝내 안전할 수 없다. 경쟁이 치열해질수록 더 좋은 장비에는 더 많은 돈이 필요하고, 오늘의 최고급 스케이트도 경쟁의 기준이 높아지면 더 이상 특별한 장비가 아니다. 결국 부모들은 더 많은 비용을 지출하지만 아이들의 불안은 줄이지 못한다. 서로 뒤처지지 않으려고 경쟁적으로 투자하면서 모두의 부담만 커지는 ‘교육의 군비경쟁(educational arms race)’에 빠지는 것이다.

그렇다면 진짜 부모의 책임은 어디까지인가. 내 아이에게 남보다 더 좋은 스케이트를 사주는 데서 끝나는가. 아니면 내 아이를 포함한 모든 아이가 안전하게 달릴 수 있도록 운동장의 바닥 자체를 바꾸는 데까지 나아가야 하는가.

나는 후자가 결국 내 아이를 지키는 길이라고 생각한다. 내 아이만 빠르게 달릴 수 있는 사회보다, 넘어져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드는 사회가 내 아이에게도 더 안전하기 때문이다. 좋은 스케이트를 사주는 것은 부모의 사랑일 수 있다. 그러나 운동장을 바꾸는 것은 부모들이 시민으로서 함께 해야 할 일이다. 바로 그 질문을 다음 글에서 이어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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