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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직자의 신분은 세밀하게 보호하면서, 생계가 무너지는 시민의 존엄은 얼마나 무겁게 재고 있는가?” [AI 재구성=주간시민광장] |
법원은 나향욱 전 교육부 정책기획관의 발언이 정당하다고 판단하지 않았다. 2016년 그가 기자들과의 식사 자리에서 했던 “민중은 개·돼지”,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발언은 국민의 봉사자인 공무원이 해서는 안 될 말이었다. 법원 역시 그 발언이 공무원 전체에 대한 국민의 신뢰를 훼손하고 공분을 초래했다는 점을 인정했다.
그런데도 법원은 파면이 지나치게 무겁다고 판단했다. 2017년 1심 법원은 발언의 경위와 비위 정도 등을 고려할 때 파면은 비례원칙에 어긋난다고 보았다. 항소심도 파면 취소 판단을 유지했다. 교육부가 대법원 상고를 포기하면서 2018년 3월 파면 취소가 확정됐다. 이후 정부는 징계수위를 강등으로 조정했고, 나 전 기획관은 같은 해 8월 교육부 산하 중앙교육연수원으로 복귀했다. 2020년에는 강등 처분마저 취소해 달라는 그의 청구가 1심 법원에서 기각됐다.
법률적으로 설명하면 징계재량과 비례원칙의 문제였다. 법원은 발언의 잘못을 부정한 것이 아니라, 그 잘못에 비해 파면이라는 제재가 과도한지를 심사한 것이다. 나는 이 법률적 구별을 인정한다. 그러면서도 법률책을 덮고 시민의 자리에서 다시 묻고 싶다. 그 저울에는 무엇이 올라가 있었는가.
한 공무원의 신분과 수천만 시민의 신뢰
파면은 무거운 처분이다. 직업과 공무원 신분을 잃고, 퇴직급여 등에도 불이익이 발생할 수 있다. 국가가 여론에 따라 공무원을 함부로 파면할 수 있다면 그것 역시 위험한 사회다. 법원이 징계권의 한계를 엄격하게 심사해야 하는 이유다.
그러나 저울의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었는가. 교육정책을 책임지는 고위공직자가 국민을 개와 돼지에 빗대고 신분제를 공고화해야 한다는 취지의 말을 했다는 사실이다. 이는 개인의 부적절한 발언에 그치지 않는다. 국민을 동등한 존엄의 주체로 대해야 할 공직자의 인간관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특히 교육행정은 모든 아이가 출신과 가정환경에 관계없이 존중받아야 한다는 원칙 위에 서 있다. 그런 행정의 책임자가 국민을 계층으로 구분하고 신분질서의 고착을 말한다면, 시민은 교육정책의 공정성을 어떻게 신뢰할 수 있겠는가. 물론 법원도 공직사회에 대한 신뢰 훼손을 인정했다. 그러므로 법원이 시민의 존엄을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정확하지 않다.
문제는 그다음이다. 한 공무원이 직업을 잃는 불이익과 공직자가 훼손한 국민의 신뢰를 비교할 때, 법원은 그 공적 신뢰의 무게를 충분히 반영했는가.
이것은 판사의 마음을 추측하는 질문이 아니다. 사법판단의 기준과 그 판단이 시민에게 어떻게 설명되는지를 묻는 질문이다. 법은 개인의 권리를 보호해야 한다. 동시에 공직의 책임과 공공기관에 대한 신뢰도 보호해야 한다. 그 가치들이 충돌할 때 법원은 무엇을 어떻게 비교하고 판단했는지 시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해야 한다.
자영업자가 문을 닫을 때도 같은 저울을 사용하는가
나는 이 판결을 보면서 자영업자를 떠올렸다. 공무원이 파면되면 법원은 징계가 과도한지, 비례원칙에 맞는지, 근무경력과 비위의 경중을 어떻게 평가해야 하는지 심사한다. 징계가 지나치게 무겁다고 판단되면 처분이 취소되고 신분을 회복할 수도 있다. 나 전 기획관 역시 파면 취소 판결이 확정된 뒤 공무원 신분을 회복했다. 당시 보도에 따르면 파면 이후 강등 처분 전까지의 급여를 받을 수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그렇다면 자영업자가 문을 닫을 때는 누가 그 사람의 삶을 이처럼 세밀하게 살펴보는가.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했다. 새벽부터 문을 열고 밤늦게까지 손님을 맞았다. 가족의 생계가 그 식당에 달려 있었다. 그러나 매출이 줄고 임대료는 감당하기 어려워졌다. 대출이자는 쌓여갔다. 결국 문을 닫는다.
누가 묻는가. “20년 동안 성실하게 일하지 않았습니까.” “처음 실패한 것 아닙니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줘야 하지 않습니까.” “한 사람의 생업이 이렇게 무너지는 것을 사회는 지켜보기만 해도 되는 것입니까.”
법 앞에서 모든 시민은 평등하다. 그러나 삶이 무너지는 순간에도 국가는 모든 시민을 충분히 보호하고 있는가. 자영업자를 위한 지원과 재기제도가 없는 것은 아니다. 채무조정과 정책금융, 폐업지원과 재취업 지원 등 여러 장치가 존재한다. 문제는 그러한 제도가 오랫동안 쌓아온 노동과 생계의 붕괴를 예방하거나, 실패한 뒤 다시 일어설 기회를 제공하기에 충분한가 하는 것이다. 법원은 공직자의 파면이 지나치게 가혹한지 심사한다. 그렇다면 우리 사회는 시민의 생계가 무너지는 현실이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은지 누가, 어떤 기준으로 살피고 있는가.
공무원의 파면은 ‘너무 무겁다’는데 시민의 폐업은 무엇인가
공무원의 파면과 자영업자의 폐업은 법적으로 전혀 다른 사건이다. 하나는 국가가 내리는 징계처분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결과다. 따라서 두 사건에 동일한 법적 심사기준을 적용할 수는 없다. 그 차이를 인정해야 논의가 정확해진다.
그럼에도 인간의 삶이 무너진다는 점에서는 같은 질문을 던질 수 있다. 한쪽의 신분상실에 대해서는 국가가 비례원칙에 따라 처분의 정당성을 세밀하게 심사한다. 반면 다른 한쪽의 생계상실은 상당 부분 개인이 감당해야 할 경제적 위험으로 남는다. 자영업자는 가게를 잃는다. 소득을 잃는다. 권리금을 회수하지 못할 수도 있다. 사업을 정리한 뒤에도 대출채무는 남을 수 있다. 임금근로자와 달리 퇴직금이 당연히 발생하는 것도 아니다. 자영업자 고용보험에 가입하지 않았다면 그 제도를 통한 실업급여를 받을 수도 없다.
그래도 우리는 말한다. “사업이 안 됐으니 어쩔 수 없다.”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시장은 국가와 무관하게 존재하는 자연현상이 아니다. 상가임대차제도와 금융정책, 조세와 사회보험, 지역경제 정책은 모두 자영업자의 생존조건에 영향을 미친다. 정부가 모든 사업의 성공과 실패를 결정하는 것은 아니지만, 시장의 위험을 어떻게 분담할 것인가는 분명한 정책적 선택의 영역이다.
국가가 개입하지 않는 선택도 시민의 삶에 영향을 미친다. 그렇다고 모든 폐업을 정부의 위법한 부작위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 법적 책임과 정책적 책임은 구별해야 한다. 그러나 그 구별이 국가의 책임을 묻지 말아야 한다는 뜻은 아니다. 공직자의 신분을 박탈할 때는 그 처분이 지나치게 가혹한지 묻는 국가가, 시민의 생업이 무너질 때는 그 위험을 줄이기 위해 무엇을 했는지 스스로 묻고 있는가. 우리가 폐업을 오직 개인의 실패로만 설명한다면, 그 실패를 더 고통스럽게 만드는 제도의 책임은 끝내 보이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시민을 ‘개·돼지’로 보는 것인가
여기에서 가장 조심해야 할 질문이 나온다. 판사가 시민을 개나 돼지로 생각했기 때문에 그런 판결을 했다고 말할 수는 없다. 판사의 내면을 확인할 수 없으며, 그러한 추측은 정당한 판결 비판의 근거가 될 수 없다.
그러나 시민은 판결의 결과와 이유를 놓고 질문할 권리가 있다. “이 판결에서 시민의 존엄과 공직사회에 대한 신뢰는 충분히 무겁게 다루어졌는가.” 그리고 더 나아가 물을 수 있다. “우리의 법과 제도는 국가권력 안에 있는 사람의 신분을 보호하는 데 익숙한 만큼, 국가권력 밖에서 살아가는 시민의 생계와 존엄에도 세심한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가.”
여기서 중요한 것은 사법부만의 책임이 아니다. 공무원 징계의 적법성을 심사하는 법원과 자영업자의 생계안전망을 설계하는 입법부·행정부의 역할은 다르다. 그러나 그 모든 제도는 시민의 존엄을 보호한다는 헌법적 가치 아래 존재한다. 우리는 신분제를 부정하는 민주공화국에 살고 있다.
그렇다면 국가가 제공하는 보호의 두께가 시민의 직업과 지위에 따라 얼마나 달라지는지도 질문해야 한다. 법적 지위에 따른 합리적인 차이는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차이가 인간의 존엄을 보호하는 데 지나친 격차로 이어진다면, 민주주의는 이를 외면해서는 안 된다.
판사를 모욕하는 것과 판결을 비판하는 것은 다르다. 판사의 독립을 침해하는 것과 사법부의 책임을 묻는 것도 다르다. 민주주의에서 판결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존중받는 판결이라고 해서 시민의 질문으로부터 면제되는 것은 아니다.
판사의 독립은 판사의 무책임을 뜻하지 않는다
대한민국 헌법은 법관의 독립을 보장한다. 헌법 제103조는 법관이 헌법과 법률에 의해 양심에 따라 독립하여 심판하도록 규정하고 있다. 제106조 제1항은 법관이 탄핵 또는 금고 이상의 형의 선고에 의하지 않고는 파면되지 않도록 정하고 있다. 법관징계법에 따른 징계처분은 정직·감봉·견책 세 종류다. 일반 국가공무원의 징계에 파면·해임·강등 등이 포함되는 것과 구별된다.
이처럼 법관에게 강한 신분보장을 부여한 이유는 분명하다. 정권이 마음에 들지 않는 판결을 했다는 이유로 판사를 내쫓을 수 없어야 하기 때문이다. 여론이 격앙됐다는 이유만으로 법관의 신분이 흔들려서도 안 된다. 사법독립은 판사의 특권을 위해서가 아니라 시민의 자유와 권리를 지키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다른 질문이 필요하다. 독립이 강할수록 그 권력이 행사되는 과정에 대한 책임성과 투명성도 중요해지는 것 아닌가. 판결의 이유는 충분히 설명됐는가. 어떤 권리와 공익이 충돌했는가. 당사자의 사정은 어떻게 고려됐는가. 사법절차에 접근하기 어려운 시민의 현실은 제도적으로 충분히 반영되고 있는가. 법관의 책임을 묻는다는 것은 불리한 판결을 내렸다는 이유만으로 판사를 징계하자는 뜻이 아니다. 법관의 법률해석과 증거판단은 원칙적으로 상소 등 사법절차를 통해 다투어야 한다. 징계나 탄핵은 각각 법률과 헌법이 정한 요건에 따라 판단되어야 한다.
그와 별개로 판결의 이유를 시민이 이해할 수 있도록 공개하고, 사법행정의 운영과 법관의 직무상 비위에 대한 책임 절차를 투명하게 만드는 것은 사법부에 대한 신뢰와 직결된다. 판사의 독립을 지키는 일과 사법부의 책임을 강화하는 일은 서로 반대되는 목표가 아니다.
판결문 속의 인간은 누구인가
법률은 때로 추상적인 언어로 말한다. 비례원칙. 재량권 일탈·남용. 징계수위. 고의와 과실. 절차적 적법성. 모두 필요한 개념이다. 이러한 기준이 없다면 재판은 감정과 여론에 흔들릴 것이다. 그러나 그 법률적 판단의 결과를 살아내는 것은 추상적인 개념이 아니라 사람이다. 한 공무원에게 파면은 직업을 잃는 일이다. 그래서 법원은 그 불이익을 무겁게 본다.
그렇다면 한 시민에게 폐업은 무엇인가. 한 청년에게 평생 일해도 마련하기 어려운 집값은 무엇인가. 한 노인에게 생계를 감당하기 어려운 연금은 무엇인가. 한 부모에게 아이의 교육기회가 경제력에 따라 달라지는 현실은 무엇인가. 한 피해자에게 수년 동안 계속되는 재판은 무엇인가.
물론 법원이 모든 사회문제를 하나의 판결로 해결할 수는 없다. 판사는 법률과 증거에 따라 판단해야 하며, 입법과 정책의 영역을 대신할 수도 없다. 그러나 법이 허용하는 판단의 범위 안에서 인간의 삶을 얼마나 충실하게 이해하고 설명하는지는 사법부가 시민의 신뢰를 얻는 데 중요한 문제다. 판결문 속에 법률관계만 있고 그 법률관계를 살아내는 인간이 보이지 않는다면, 시민은 법이 자신의 삶과 얼마나 가까이 있는지 의문을 품게 된다.
사법개혁은 판사를 통제하는 일이 아니라 책임 있는 독립을 완성하는 일이다
사법개혁을 말하면 판사를 정치권력 아래 두자는 주장으로 오해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사법개혁은 그렇게 이루어져서는 안 된다. 정치권력이 판결의 내용을 이유로 법관을 압박하고, 다수의 여론이 재판 결과를 결정하는 사회는 결코 정의로운 사회가 아니다.
사법개혁은 오히려 독립된 법원이 시민의 신뢰를 얻을 수 있도록 제도를 개선하는 일이어야 한다. 판결문에 대한 시민의 접근성을 높일 수는 없는가. 판결의 이유를 보다 명확하게 설명할 수는 없는가. 법관의 직무상 비위와 사법행정의 잘못에 대한 책임 절차를 더 투명하게 운영할 수는 없는가. 경제적 여건 때문에 소송을 포기하거나 재판 과정에서 충분히 자신의 주장을 펼치기 어려운 시민을 위한 지원은 충분한가. 또한 재판이 지연되는 동안 생계와 일상이 무너지는 사람들에게 사법제도는 어떤 책임을 지고 있는가.
이 질문들은 판사의 독립을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 아니다. 시민이 법원을 마지막 권리구제의 장소로 신뢰할 수 있게 만들기 위한 것이다. 검찰도 개혁의 대상이 될 수 있다. 경찰도 그렇다. 행정부와 국회도 시민의 감시와 비판을 받아야 한다. 법원 역시 민주주의의 제도라면 예외일 수 없다. 어떤 국가기관도 자신은 판단하는 기관이므로 시민의 판단을 받을 필요가 없다고 말할 수는 없다.
강도 만난 자에게 법원은 누구인가
다시 선한 사마리아인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강도 만난 사람에게 가장 절박한 것은 무엇인가. 자신이 사람으로 보이는 것이다. 자신의 고통이 숫자가 아니라 고통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자신의 억울함이 절차 하나로 지워지지 않는 것이다. 누군가는 행정기관을 찾아갔다가 돌아선다. 누군가는 경찰과 검찰을 거쳐 법원의 문을 두드린다. 누군가는 평생 모은 재산을 지키기 위해, 누군가는 빼앗긴 권리를 되찾기 위해 법정에 선다. 그들에게 법원은 단순한 국가기관이 아니다. 자신의 말을 들어줄 마지막 제도적 통로일 수 있다.
그렇다면 법원은 시민에게 어떤 이웃이어야 하는가. 법률적으로 정당한 판결을 내리는 것은 법원의 기본적인 책무다. 그러나 시민이 그 판단의 이유를 이해하고, 자신의 주장이 충분히 검토됐다고 받아들일 수 있도록 하는 일 역시 중요하다. 법은 어느 한쪽의 편을 들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법을 어기면서까지 약자를 승소시키는 일이 아니다. 힘없는 사람의 말도 힘 있는 사람의 말과 같은 무게로 듣고, 그 사람의 권리와 존엄을 법이 정한 기준에 따라 성실하게 판단하는 일이다. 그것이 시민이 법원에 기대하는 공정함이다.
법원도 스스로 물어야 한다
“민중은 개·돼지”라는 취지의 말을 한 교육부 고위공직자는 파면 취소 판결이 확정된 뒤 공무원 신분을 회복했다. 이후 강등 처분을 받았고, 그 처분을 취소해 달라는 소송에서도 2020년 1심에서 패소했다. 법원은 그의 발언을 정당하다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공직자로서 해서는 안 될 발언임을 인정했다. 다만 파면은 비위 정도에 비해 지나치게 무겁다고 판단했다.
나는 그 판결의 법률적 의미를 인정하면서도 다시 묻고 싶다. 누구에게 너무 무거웠는가. 파면당한 공무원에게는 너무 무거웠을 수 있다. 그렇다면 그 발언을 들은 시민의 모멸감과 교육행정에 대한 신뢰의 훼손은 얼마나 무거웠는가. 오늘 가게 문을 닫는 자영업자의 삶은 얼마나 무거운가. 일자리를 잃은 노동자의 삶은 얼마나 무거운가. 주거비 때문에 미래를 계획하기 어려운 청년의 삶은 얼마나 무거운가.
이 모든 문제를 하나의 판결에 책임지라고 요구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국가가 시민의 권리와 삶을 보호하는 여러 제도를 운영할 때, 그 저울이 누구에게 얼마나 세심하게 작동하는지 묻는 것이다. 시민은 법원에 이렇게 물을 권리가 있다. “판사님, 당신의 저울 위에서 우리의 삶은 몇 그램입니까.” 사법개혁은 판사를 끌어내리는 일이 되어서는 안 된다. 판사의 독립을 지키면서도 그 독립에 상응하는 책임과 설명을 요구하는 일이어야 한다. 그리고 그 저울 위에 시민의 존엄과 삶의 무게를 더 정확하게 올려놓는 일이어야 한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려면 법원도 예외일 수 없다. 법은 사람을 심판하지만, 민주주의는 그 법이 사람을 어떻게 대했는지를 다시 묻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