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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현종호 |
(제8회)-2
적의 더듬이질만 빈번하던 가을날 1597년 9월 16일 아침, 어란포 앞바다에서 전열을 가다듬던 총 500여 척의 대선단이 이윽고 어란진을 출항했다는 보고가 임준영을 통해 급히 올라온다. 왜군의 발진에 맞춰 통제사 이순신도 서둘러 벽파진에서 발진한다.
군영은 깡그리 비워졌다. 통제사 이순신이 군막 전부를 불에 태워 없애버린 것이다. 이젠 돌아갈 고향이 없어진 조선의 군대였다. 군사들의 눈동자마다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깊이 박혀 있던 탓에 어쩔 수 없이 그가 내린 결단이었다. 조선 수군의 가장 큰 적은 군사들 눈동자에 박힌 그 두려움이었다. 바닥에 떨어진 군대의 사기 역시도 문제였다.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은 최후의 결의를 다시 밝힌다.
“나라 위해 죽어가는 한목숨, 우리에게 이제 무엇이 더 아깝겠는가…… 우리에겐 오직 죽음만이 있을 뿐이다…….”
군관들이 아군 판옥선 13척의 상태를 다시 한번 철저히 점검했다. 송희립이 이순신에게 다가와 우렁찬 목소리로 보고한다.
“발진준비 완료……!”
배설의 머리를 대장선 꼭대기에 걸고 출전하고픈 마음이 간절했으나 배설을 끝내 잡아들이지 못한 채, 그는 마침내 출항한다. 이순신이 소리쳤다.
“닻을 올려라!”
군관들이 따라 소리쳤다.
“닻을 올려라…… 닻을 올려라…… 닻을 올려라…….”
장졸들은 배추와 시래기와 무국 정도로 새벽에 겨우 배를 채웠을 뿐이고, 쌀이 부족해 밥을 충분히 퍼줄 수도 없었다. 군량이 부족한 탓에 격군들 또한 제대로 먹일 수도 없었다. 근방 읍진들의 군량 역시 이미 바닥이라 이러다간 바다에서 끼니를 먹일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삼도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의 고민은 깊어져만 갔다.
짙게 깔린 안개와 어둠을 녹이며 스멀스멀 해가 떠오르고 있었다. 적들이 드디어 오고 있음을 이순신은 살갗으로 직감한다. 적들의 봉화가 오르기 시작한다. 진도 금날산에서 피어오른 불꽃과 연기를 용장산이 급히 받았다. 연기가 눈을 찌르고, 불꽃이 군사들의 몸 구석구석을 찔러대는 듯싶었다. 용장산에서 피어오른 연기를 망금산이 끝으로 받는다.
뒤엉킨 바다의 검푸른 물살을 거슬러 적의 대선단이, 요동치는 벽파진 앞바다에서, 푸르고 육중한 몸집으로 서서히 방향을 트는가 싶더니 모두를 집어삼킬 듯 장엄하게도 출렁거리며 울돌목으로 점점 다가오고 있는 것이었다. 나무묘법연화경의 그 요란한 깃발들이 적선마다 어지럽게 펄럭거렸다.
적들은 갈매기들을 앞세우고 시종 출렁거리며 다가서고 있었다. 출렁거리며 점점 다가서는 적의 선단 위로 가을날의 햇빛은 눈 부시게도 쏟아졌다. 햇살 잔뜩 머금고 배를 따라오는 갈매기들도 물결 따라서 너울거리고 출렁거렸다. 중군장(中軍長) 김응함(金應緘)이 역류를 거슬러 선뜻 선두로 나아가자 안위는 내키지 않는 표정으로 꾸역꾸역 뒤따랐다. 이순신이 대장선에 올라 이물 쪽을 향해 외친다.
“돛을 세워라!”
군관들이 따라서 소리쳤다.
“돛을 세워라…… 돛을 세워라…… 돛을 세워라…….”
함성이 바다를 흔들었다.
밀물에 올라타 적들은 식겁하게 다가오고, 역류의 물결은 길길이 뛰면서 이물에 거듭 덤비고, 물보라가 갑자기 일어나며 돛을 연방 때려대자 격군장(格軍將)의 북소리는 점고(漸高)에서 다급한 뇌고(雷鼓)와 난타(亂打)로 바뀌며 격군들의 몸을 거듭 부러뜨렸다. 명량의 물결은 굶주린 맹수와도 같이 매서웠다. 갑자기 거세진 물결과 야속한 동남풍은 이번에도 역시 왜군의 편을 들어주는 것이었다. 패색이 짙은 바다에 몰아치는 바람은 살을 저미고 저몄다. 무심한 바람 또한 꾸준히 적의 편을 들어주고 있는 것이었다. 쉼 없이 잇달아 들이닥치는 물기둥에 온몸으로 노를 젓는 격군들의 몸은 북소리를 받아내지 못하고 거듭 으스러졌다.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은 기진맥진해진 격군들을 명량 어귀에서 다시 전원 교대시켜야 했다. 명량 어귀에서 적들이 사정권 안으로 기어이 들어올 때까지 그는 한 가닥 일자진으로 겨우 버텨가며 왜군들을 기다리고 또 기다렸다. 그의 기다림은 안쓰러웠다.
울돌목이 한눈에 들어오는 망금산 아래 해안가에 모여서 응원하던 피난민들은 일자진으로 겨우 맞서는 아군의 전선 13척이 500여 척 왜군 대선단에 겹겹이 포위돼 꼼짝달싹 못 한 채, 시종 힘겹게 버티며 쩔쩔매기만 하자 발을 동동 구르며 통곡하였다. 백성들의 애틋하고도 처절한 울음이 바다를 울렸다. 주리고 지칠 대로 지친 격군(格軍)들의 몸은 북소리를 받아내지 못한 채, 거듭 휘어지고 꺾이고 으스러졌다. 바다를 내려다보며 울부짖는 피난민들의 애절한 울음소리가 그의 마음을 뒤흔들었다. 통제사 이순신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리고 마음을 다시 오지게 고쳐먹는다. 격군(格軍)들을 다시 다그쳐 적의 함대 앞으로 혼자서 당당히 다가서며 이순신이 소리친다.
“절대 물러서지 마라! 한 치도 절대 물러나지 마라……!!!……”
이순신이 선두로 나서며 군사들이 지자총통과 현자총통을 우레로 쏴대고, 사부들이 화살을 우박으로 날리니, 적들은 그에게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정유년 9월 16일 맑음.
여러 배에 명령하여 닻을 올리고 바다로 나아가니 적선 130여 척이 우리의 전선들을 겹겹이 에워쌌다. 장수들은 대선단의 기세에 눌려 그저 도망할 꾀만 내는 것이었다. 나는 노를 재촉해 앞으로 나아가 지자, 현자 등의 총통을 사정없이 쏘아댔다. 포탄이 날아가는 것이 우레와 같았다. 화살은 우박처럼 적진에 마구 쏟아졌다. 당황한 적들은 출렁이는 바다 위에서 물결 따라 그저 출렁거릴 뿐, 내 배로 더는 다가오지 못했다. 여러 장수의 배를 돌아보니 먼바다에 물러나 있어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날 수도 없는 형편이었다. 우수사 김억추가 탄 배는 아득히 멀어져 있고, 배 안에 있는 군사들은 대선단의 위세에 눌려 서로 돌아보며 낯빛이 잔뜩 질려 있었다. 적이 비록 천 척이어도 우리 배를 더 공격하지는 못할 테니 절대로 동요하지 말고 힘을 다해 적을 쏘라고 나는 타이르듯 말하였다.
적의 기세에 얼어붙어 다급해진 사부들은 적들이 눈에 띄기라도 하면 아득히 먼 적들을 겨냥해 허공으로만 연방 활을 쏘아댈 뿐이었다. 망연자실한 병사들의 얼굴엔 좌절감이 드리워져 있었고, 사부들의 잔뜩 움츠러든 몸은 이미 바닷물에 흠뻑 젖어 있는 것이었다. 제법 큼지막한 물고기를 입에 물고 날아가던 갈매기가 잘못 날아간 화살에 맞아 날갯죽지를 푸드덕거리며 바다에 뚝 떨어졌다. 이순신이 사부들을 야단친다.
“제대로 쏴라……!!!……”
【편집부 해설|제8회-2】
제8회-2는 명량해전의 개시 직전부터 교전 초반부를 집중적으로 다룬다. 이 회차의 핵심은 전술 이전에 심리의 싸움이다. 적은 500여 척의 압도적인 물량으로 바다를 덮고, 조선 수군은 고작 13척으로 맞선다. 이순신은 전투를 앞두고 군영을 스스로 불태운다. 물리적 후퇴뿐 아니라 심리적 퇴로마저 차단한 결정이었다.
이 회차에서 반복적으로 강조되는 것은 ‘두려움’이다. 굶주린 격군들, 사기가 바닥난 병사들, 지휘관조차 흔들리는 순간들 속에서 이순신은 홀로 전열의 맨 앞에 선다. 그는 기다림을 선택한다. 조급한 공격이 아니라, 물길이 바뀌는 순간까지 버티는 인내가 전략이 된다.
특히 봉화가 금날산–용장산–망금산으로 이어지는 장면은, 단순한 신호 전달을 넘어 조선 수군과 백성이 함께 전쟁을 감당하고 있음을 보여주는 집단적 장면이다. 명량은 이미 전장이 아니라, 나라 전체가 짊어진 운명의 통로가 된다.
【본문 용어 해설|제8회-2】
• 사부 射夫 archer 활을 쏘는 병사. 수군에서는 근접전보다 원거리 견제가 중요해 숙련도가 전투 성패를 좌우했다.
• 읍진 邑鎭 local garrison 지방의 군사 거점. 평소에는 행정·방어를 맡고, 전시에는 군량과 병력을 지원했다.
• 금날산 金捺山 Geumnalsan Mountain 진도 인근의 산. 명량 해역을 조망할 수 있어 봉화 신호의 시작점 역할을 했다.
• 용장산 龍藏山 Yongjangsan Mountain 금날산과 망금산 사이에 위치한 중계 봉화 지점. 신호 전달의 핵심 연결고리였다.
• 망금산 望金山 Manggeumsan Mountain 울돌목을 내려다보는 산. 피난민과 군사가 함께 전황을 지켜보던 장소로, 민과 군의 경계가 사라지는 공간이다.
• 중군장 中軍長 chief of the center force 수군 편제에서 중앙 부대를 지휘하는 장수. 전열 유지와 지휘 전달의 핵심 역할.
• 대장선 大將船 flagship 통제사가 탑승한 지휘선. 전투 중 명령과 사기의 중심이 되는 배.
• 식겁하게 食怯 to be badly frightened 몹시 놀라 혼이 빠질 정도로 겁을 먹은 상태. 전투 초반 병사들의 심리를 드러내는 표현.
• 점고 漸高 gradual drumbeat 점점 빨라지는 북소리. 노 젓는 속도를 서서히 끌어올릴 때 사용했다.
• 뇌고 雷鼓 thunder drum 천둥처럼 급하고 강한 북소리. 전투 개시나 긴급 상황에서 격군을 몰아붙일 때 사용.
• 난타 亂打 chaotic beating 질서 없이 거세게 두드리는 북. 극도의 긴박함과 혼란을 나타낸다.
• 격군 格軍 oarsman 군선의 노를 젓는 병사. 체력과 호흡이 전투 지속 능력을 좌우했다.
• 지자총통 地字銃筒 Jija Chongtong cannon 조선 수군의 중형 화포. 비교적 연사력이 좋아 근접 적선을 제압하는 데 쓰였다.
• 현자총통 玄字銃筒 Hyeonja Chongtong cannon 지자총통보다 위력이 강한 화포. 적의 대형 선박을 파괴하는 데 효과적이었다.
• 낯빛 顏色 facial expression 얼굴에 드러난 감정 상태. 전투 장면에서 병사들의 공포와 동요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현대적 의미|제8회-2】
제8회-2는 오늘의 우리에게 ‘리더십은 언제 결단이 되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이순신은 모든 조건이 불리한 상황에서 병력을 늘리거나 외부 지원을 기다리지 않는다. 대신 그는 두려움의 원인을 정확히 직시하고, 그 두려움을 넘는 선택을 한다.
군영을 불태운 행위는 무모함이 아니라, 공동체를 살리기 위한 극단적 책임의 표현이다. 후퇴의 가능성을 없앰으로써 병사들에게 “살아남을 길은 앞으로 나아가는 것뿐”이라는 명확한 메시지를 던진다.
오늘날 조직·사회·국가의 위기에서도 마찬가지다. 숫자나 자원이 아니라, 판단의 방향과 책임의 깊이가 결과를 바꾼다. 제8회-2의 명량은 우리에게 말한다.
진짜 위기란 적의 규모가 아니라, 스스로 물러나고 싶어지는 마음 속에서 시작된다고.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가련한 여인의 초상』, 『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역임
• 현재 평택 거주,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