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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 본지 발행인 |
행정기관에는 퇴근시간이 있다. 그러나 행정과 다투는 주민에게는 사건의 퇴근시간이 없다. 공무원에게 한 장의 공문은 수많은 업무 가운데 하나일 수 있다. 결재를 받고 발송하면 다음 업무로 넘어간다. 담당자가 바뀌면 다른 사람이 기록을 이어받는다. 행정기관에는 담당부서가 있고 법률자문을 받을 조직도 있다.
그러나 주민에게 날아온 한 장의 공문은 전혀 다른 무게를 가질 수 있다. 사용기간 만료, 변상금, 건물인도, 강제집행 같은 낯선 단어가 자신의 삶으로 들어오는 순간부터 사건은 업무가 아니라 일상이 된다. 밤늦도록 법률용어를 검색하고, 수십 장의 서류를 읽고, 변호사를 찾아다니고, 행정심판과 소송을 준비한다. 잠자리에서도 사건을 생각한다.
난곡난향마을관리사회적협동조합 김경완 이사장과 주민공동체의 문제를 바라보면서 내가 이번 글에서 묻고 싶은 것은 바로 이것이다. 법 앞에서는 양쪽 모두 당사자일 수 있다. 그러나 그 법을 견뎌야 하는 무게까지 양쪽이 같은가.
누구도 강도가 아니어도 누군가는 쓰러질 수 있다
이 질문은 중요하다. 나는 관악구를 ‘강도’라고 규정하려는 것이 아니다. 김경완 이사장과 협동조합의 모든 주장이 옳다고 미리 결론내리려는 것도 아니다. 자유민주주의 사회에서 시민과 행정기관이 다투는 것은 이상한 일이 아니다. 공유재산을 둘러싸고 법률적 판단이 달라질 수 있고,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을 통해 다툴 수도 있다. 법원의 판단 역시 존중되어야 한다.
모든 갈등에는 강도가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나 모든 갈등 속에서 우리는 이웃이 될 수 있다. 갈등이 정상적이라는 이유로 그 과정에서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고통까지 당연한 것으로 여겨서는 안 된다. 중요한 것은 누가 악인인가를 먼저 결정하는 것이 아니다. 실제로 상처가 존재하는가. 그 상처는 누구에게 더 무겁게 집중되는가. 그리고 누가 그 사람 곁에 멈추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가 오늘 우리에게 던지는 질문도 바로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오늘의 상처에는 붕대 대신 행정문서를 읽어줄 사람이 필요하다
예수의 비유에서 사마리아인은 길가에 쓰러진 사람에게 먼저 가까이 갔다. 상처를 보았다. 싸맸다. 자기 짐승에 태웠다. 주막으로 데려갔다. 비용을 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2천 년이 지난 오늘, 상처의 모습은 달라졌다. 오늘의 누군가는 행정기관의 공문 앞에서 막막해진다. 변상금 고지서를 받고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 당황한다. 소장을 받고 법률용어 앞에서 주저앉는다. 강제집행이라는 말을 처음 접하고 두려워한다.
그렇다면 오늘의 이웃이 하는 일도 달라져야 한다. 공문 한 장을 같이 읽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행정심판 재결서를 함께 살펴보는 사람이 필요하다. 정보공개청구를 도와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회의록을 찾아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사실관계를 시간순으로 정리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변호사나 행정전문가를 연결해주는 사람이 필요하다. 때로는 당사자에게도 말해주어야 한다. “이 주장은 사실과 다릅니다.” “이 부분은 법적으로 어렵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는 끝까지 따져볼 필요가 있습니다.” 이웃이 된다는 것은 무조건 편드는 것이 아니다. 한 사람이 제도의 무게를 혼자 감당하지 않도록 하는 것이다.
법률적 패배가 인간적 고립까지 의미해야 하는가
법에는 승패가 있다. 원고와 피고가 있고, 인용과 기각이 있다. 누군가는 이기고 누군가는 질 수 있다. 그러나 공동체는 판결문 마지막 장에서 끝나지 않는다. 패소한 사람도 다음 날 아침 다시 그 동네에서 살아야 한다. 같은 길을 걷고, 같은 시장을 이용하고, 다시 행정기관을 찾아가야 한다. 함께 살아가야 할 사람들 사이의 관계는 판결 이후에도 계속된다.
그래서 행정이 해야 할 일과 법원이 해야 할 일은 완전히 같을 수 없다. 법원이 권리관계를 판단한다면 행정은 그 판단 이후의 공동체까지 바라볼 필요가 있다. 공간을 반환받아야 한다면 반환받을 수 있다. 법적 요건에 따라 변상금을 부과해야 한다면 그렇게 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 과정에서도 물을 수 있다. 충분히 설명했는가. 충분히 들었는가. 다른 합법적인 대안은 없었는가. 공동체가 완전히 해체되지 않을 연착륙의 길은 없었는가. 법률관계를 정리하는 것과 사람의 관계까지 정리해 버리는 것은 같은 일이 아니다.
강제집행은 법의 언어지만 이웃에게는 삶의 언어다
강제집행은 법치국가에 필요한 제도다. 판결이 집행되지 않는다면 법질서 역시 유지되기 어렵다. 그러나 행정기관이 사용하는 ‘강제집행’이라는 네 글자와 주민이 받아들이는 그 네 글자의 무게는 같지 않을 수 있다. 행정기관에는 하나의 집행절차일 수 있다. 당사자에게는 오랫동안 활동했던 공간을 떠나야 할지도 모른다는 현실이다.
바로 여기에 제도의 비대칭이 있다. 행정기관에는 사건이 업무의 일부이지만, 한 사람에게 사건은 삶의 전부가 되기도 한다. 그렇기 때문에 법이 강한 힘을 행사할수록 행정의 태도는 오히려 더 신중해야 한다. 법적으로 할 수 있는가만 묻는 것으로 충분하지 않다. 그 전에 대화와 설명, 중재와 대안이라는 다른 언어를 충분히 사용했는지도 물어야 한다. 강제집행은 법이 가진 가장 강한 언어다. 그렇기 때문에 주민을 상대하는 행정에서는 가장 마지막 언어여야 한다.
이웃사랑은 왜 비용인가
나는 요즘 어려움을 호소하며 찾아오는 사람들과 함께 행정문서를 읽고, 소송자료를 검토하고, 사실관계를 정리하는 일이 많아졌다. 그 과정에서 한 가지를 배웠다. 사람의 곁에 서는 일은 생각보다 많은 비용을 요구한다. 시간이 든다. 수십 장의 자료를 읽어야 한다. 법률과 제도를 공부해야 한다. 전문가에게 물어야 한다. 때로는 행정기관에 불편한 질문을 해야 한다. 반대로 도와주고 있는 당사자의 주장이 잘못됐다면 그에게도 불편한 말을 해야 한다. 그래서 연대는 행사장에서 축사하고 기념사진을 찍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
선한 사마리아인 역시 말로만 불쌍하다고 하지 않았다. 멈추었다. 가까이 갔다. 자기 시간을 사용했다. 자기 짐승을 내놓았다. 자기 돈을 지불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이웃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비용이고, 책임이다.
이 연재의 방점은 ‘강도’가 아니라 ‘이웃’이다
이 연재를 읽으면서 누군가는 물을 수 있다. “행정과 시민 사이에서 흔히 발생하는 갈등에 왜 굳이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가져오는가.” 중요한 질문이다. 비유는 사실을 대신해서는 안 된다. 시민이라고 언제나 약자인 것도 아니며 행정이라고 언제나 가해자인 것도 아니다. 갈등이 있다고 자동으로 ‘강도 만난 자’가 만들어지는 것도 아니다.
그래서 사실을 먼저 확인해야 한다. 법률관계를 살펴야 한다. 당사자의 주장뿐 아니라 행정기관의 설명도 들어야 한다. 비유는 질문을 만들 수 있지만 사실을 대신할 수 없다. 신학은 질문의 방향을 줄 수 있지만 언론은 그 질문을 사실로 검증해야 한다.
그럼에도 선한 사마리아인의 질문은 여전히 유효하다. 왜냐하면 예수가 마지막에 물은 것은 “누가 강도였느냐”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이 차이가 중요하다. 이 연재의 방점은 처음부터 ‘강도’를 찾아내는 데 있지 않았다. ‘이웃’이 누구인지를 묻는 데 있었다.
누가 끝까지 이웃으로 남을 것인가
이사장 김경완 박사와 난곡난향 주민공동체를 둘러싼 법률적 판단은 법과 증거에 따라 이루어져야 한다. 잘못된 주장이 있다면 바로잡아야 하고 행정의 판단이 정당하다면 그것 역시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으로 모든 질문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사건이 끝난 뒤에도 사람이 남는다. 공간이 반환된 뒤에도 사람이 남는다. 변상금 문제가 정리된 뒤에도 사람이 남는다. 판결이 끝난 뒤에도 사람이 남는다.
그때 누가 그 곁에 있을 것인가. 행정도 이웃이 될 수 있다. 원칙을 지키면서도 설명하고 대안을 찾는 행정이라면 그렇다. 시민사회도 이웃이 될 수 있다. 어느 편을 먼저 정하지 않고 사실을 확인하면서 혼자 싸우는 사람의 옆자리를 채운다면 그렇다. 교회도 이웃이 될 수 있다. 기도만 하는 것이 아니라 공동체 안의 법률가·행정전문가·교수·기자들의 전문성을 고통받는 사람에게 연결한다면 그렇다. 언론도 이웃이 될 수 있다. 당사자의 말을 그대로 받아쓰지도 않고 행정의 보도자료만 옮기지도 않으며, 기록을 확인한 뒤 권력에 질문한다면 그렇다. 그리고 평범한 시민도 이웃이 될 수 있다. 공문 한 장을 같이 읽어주는 사람. 행정기관에 혼자 가지 않도록 동행하는 사람. 전문가 한 명을 소개해주는 사람. 그리고 모두가 지나갈 때 잠시 멈추는 사람. 이웃은 거창한 사람이 아니다. 지나가지 않는 사람이다.
그래서 난곡난향 사건을 놓고 내가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은 누가 강도인가가 아니다. 누가 끝까지 이웃으로 남을 것인가. 법에는 승패가 있다. 그러나 이웃은 승패가 끝난 뒤에도 남는 사람이다. 어쩌면 바로 그 사람이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일 것이다. 그리고 2천 년 전 예수가 던진 질문은 여전히 우리 앞에 남아 있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