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 본지 발행인
법은 시민이 마지막으로 찾아가는 곳이다. 경찰의 수사가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법원에 호소할 수 있다. 검사의 주장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재판에서 다툴 수 있다. 1심 판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하면 상급심에 다시 판단을 구할 수 있다. 그래서 우리는 흔히 말한다. “억울하면 법대로 하라.”
그런데 그 마지막 문을 지키는 판사가 잘못한다면 어디로 가야 하는가. 판사가 법을 잘못 해석하는 정도가 아니라 자신의 권한을 남용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판사가 범죄의 피고인이 된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리고 판사라는 지위 때문에 오히려 진실을 밝히기 어려워진다면 누가 그를 심판해야 하는가.
1979년 영화 《…And Justice for All》은 바로 이 지점에서 시작한다. 이 영화의 주인공은 알 파치노(Al Pacino)가 연기한 형사변호사 아서 커클랜드(Arthur Kirkland)다. 그는 법을 혐오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법을 믿고 싶어 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더 고통스럽다. 법을 믿는 사람이 법 때문에 무너져가는 사람들을 계속 목격하기 때문이다.
한 젊은이가 감옥에 갇혔다
아서에게는 제프 맥컬러(Jeff McCullaugh)라는 젊은 의뢰인이 있다. 그의 비극은 거창한 범죄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자동차 후미등 문제로 경찰에 제지됐다가 자신과 같은 이름을 가진 범죄자로 잘못 지목된다. 작은 단속에서 시작된 일이 한 사람의 자유를 삼켜버린 것이다.
아서는 제프의 무고를 뒷받침할 수 있는 자료를 확보하고 그를 풀어내려고 한다. 그런데 문제가 생긴다. 증거 제출기한이다. 제프의 결백을 뒷받침할 자료가 있었지만 플레밍 판사는 그 자료가 제출기한보다 사흘 늦었다는 이유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그 결과 제프는 장기간 수감된 상태에 놓인다.
여기서 영화는 첫 번째 폭탄을 던진다. 사람을 구할 수 있는 증거가 있는데, 사흘 늦었다는 이유로 보지 않는 것이 정의인가. 물론 현실의 법정에는 기한이 필요하다. 증거규칙도 필요하다. 법관이 마음에 드는 사건마다 절차를 무시한다면 그것 역시 법의 지배(rule of law)가 아니다. 그러므로 이 장면을 단순히 ‘절차를 지킨 판사 대 정의로운 변호사’로 읽어서는 안 된다.
영화가 묻는 것은 더 깊다. 절차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는가. 절차를 지키는 목적은 공정한 재판을 하기 위해서다. 그런데 절차가 진실을 확인하는 길 자체를 막고 있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판결문에는 사건번호가 있지만 감옥에는 사람이 있다
플레밍 판사에게는 하나의 사건일 수 있다. 그러나 제프에게는 자신의 인생이다. 법원에서는 그를 ‘피고인(defendant)’이라고 부른다. 교도소에서는 ‘수감자(inmate)’라고 부른다. 서류에서는 사건번호가 붙는다. 그러나 그 번호 뒤에는 사람이 있다.
하루가 지나간다. 또 하루가 지나간다. 변호사는 법원을 오간다. 서류가 제출된다. 판사는 다른 사건을 재판한다. 법원은 정상적으로 돌아간다. 그런데 제프는 감옥 안에서 무너지고 있다.
바로 이 시간의 차이가 무섭다. 법원에게 한 달은 절차의 시간이지만, 억울하게 갇혀 있다고 믿는 사람에게 한 달은 다시 돌려받을 수 없는 생명의 시간이다.
결국 제프는 극단적인 상황으로 몰린다. 교도소 안에서 인질을 잡는 사태가 벌어진다. 아서는 그를 살리기 위해 현장으로 달려간다.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아직 방법이 있다고 설득하려 한다.
하지만 이미 너무 멀리 왔다. 제프는 총격을 받고 죽는다.
아서에게 그것은 단순한 ‘사건 종결’이 아니다. 자신이 구하려 했던 사람이 죽었다. 그리고 더 견디기 어려운 사실이 하나 있다. 제프가 죽는 동안에도 사법제도는 정상적으로 작동하고 있었다.
법원은 열렸다. 판사는 출근했다. 변호사는 서류를 제출했다. 교도소는 수감자를 관리했다. 모두 자기 일을 했다. 그런데 사람이 죽었다.
그렇다면 묻지 않을 수 없다. 제도가 정상적으로 작동했는데 사람이 파괴됐다면, 우리는 그것을 정말 정상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이번에는 또 다른 의뢰인이 무너진다
제프만이 아니다. 아서에게는 랠프 에이지(Ralph Agee)라는 또 다른 의뢰인이 있다. 아서는 랠프가 교도소에 가지 않고 보호관찰을 받을 수 있도록 중요한 수정자료를 준비한다. 자신이 직접 법정에 갈 수 없게 되자 동료 변호사에게 그 자료를 건네며 반드시 판사에게 보여주라고 당부한다. 그런데 사람이 실수한다. 동료 변호사는 법정에 늦게 도착하고, 수정된 자료를 판사에게 전달하는 것을 잊는다. 판사는 그 자료를 보지 못한 채 랠프에게 수감형을 선고한다. 그리고 불과 얼마 지나지 않아 랠프는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여기에서 영화는 제프 사건과는 또 다른 방식으로 같은 질문을 던진다. 제프에게서는 사흘 늦게 제출된 자료가 문제가 됐다. 랠프에게서는 제때 전달되지 않은 자료가 문제가 됐다. 하나는 엄격한 절차 적용이고, 다른 하나는 변호인의 실수다. 원인은 다르다. 그러나 그 결과를 감당해야 하는 사람은 제도 밖의 추상적인 ‘사건번호’가 아니라 살아 있는 인간이었다.
서류 한 장을 늦게 내는 사람과 그 서류 때문에 자유를 잃는 사람에게 시간의 무게는 같지 않다. 제프와 랠프의 비극을 함께 놓으면 영화의 질문은 더욱 선명해진다. 제도는 수많은 사건을 처리하지만, 당사자는 자신의 인생 전체를 걸고 그 제도 앞에 서 있다. 제도에는 다음 사건이 있지만, 어떤 사람에게는 그 사건이 자신의 마지막 사건일 수도 있다.
그런데 판사들도 이상하다
영화는 여기에서 관객의 시선을 판사들에게 돌린다. 플레밍만 등장하는 것이 아니다. 프랜시스 레이포드 판사(Judge Francis Rayford)도 있다. 레이포드는 아서와 비교적 가까운 관계지만 영화 속 그의 행동은 충격적이다. 법관이라는 지위와 어울리지 않을 만큼 위험하고 기이한 행동을 반복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우리가 그에게 어떤 정신의학적 진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영화가 관객에게 보여주는 것은 더 단순하다. 다른 사람의 자유와 운명을 판단하는 사람의 행동에 문제가 생겼을 때, 누가 그것을 확인하고 멈추게 하는가.
판사가 법복을 입었다는 이유만으로 그의 모든 판단이 자동적으로 안전해지는 것은 아니다. 판사도 인간이다. 실수할 수 있다. 편견을 가질 수 있다. 판단을 잘못할 수 있다. 심지어 비위를 저지를 수도 있다. 그렇다면 사법제도는 ‘좋은 판사’를 기대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그리고 상황이 뒤집힌다 ― 판사가 피고인이 되었다
영화 중반부에서 모든 것이 뒤집힌다. 그동안 다른 사람을 심판하던 헨리 플레밍 판사(Judge Henry T. Fleming)가 강간과 폭행 혐의를 받는다. 판사가 피고인이 된 것이다.
그런데 더 놀라운 일이 벌어진다. 그 판사를 변호할 사람으로 아서가 지목된다.
왜 하필 아서인가. 아서와 플레밍 사이가 좋지 않다는 사실이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플레밍 측에서는 자신과 공개적으로 충돌해 온 변호사마저 자신의 변호를 맡는다면 그것 자체가 결백하다는 인상을 줄 수 있다고 계산한다.
기가 막힌 상황이다. 자신의 의뢰인을 감옥에서 구해내려 할 때 가로막았던 판사. 그 판사 때문에 분노했던 변호사. 그런데 이제 그 변호사가 그 판사의 자유를 지켜줘야 한다.
영화는 묻는다. 법은 원수에게도 공정해야 하는가. 그렇다. 바로 그것이 법이다.
유죄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변호해야 하는가
여기서 형사변호의 본질적인 문제가 등장한다. 변호사가 의뢰인을 개인적으로 좋아해야 하는 것은 아니다. 의뢰인의 도덕적 결백을 확신해야만 변호할 수 있는 것도 아니다. 형사피고인에게는 방어권이 있고, 국가는 적법절차(due process)를 지켜야 하며, 범죄사실을 입증해야 한다. 따라서 변호사의 역할은 반드시 “이 사람은 착한 사람입니다.”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국가를 향해 묻는 것이다. “당신들은 이 사람이 범죄를 저질렀다는 사실을 법이 요구하는 정도로 입증했습니까?” 이것이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이고 무죄추정(presumption of innocence)이다. 그래서 아서도 플레밍을 변호해야 할 수 있다. 여기까지는 법률의 문제다.
그런데 사건은 여기서 멈추지 않는다.
아서가 알아서는 안 될 것 같은 진실에 가까워진다
아서가 사건을 들여다볼수록 플레밍의 결백을 믿기 어려워진다. 그리고 마침내 변호사로서 가장 견디기 어려운 상황과 마주한다. 자신이 변호해야 할 사람이 실제 범죄를 저질렀다고 믿게 되는 것이다.
이제 두 개의 의무가 충돌한다. professional duty(직업적 의무) 그리고 truth(진실). 한쪽에는 의뢰인을 보호해야 할 변호사윤리(legal ethics)가 있다. 다른 쪽에는 피해자의 진술과 자신이 알게 된 사실이 있다.
아서가 무너지기 시작한다. 그가 처음부터 영웅적인 결단을 내리는 것이 아니다. 그는 버틴다. 법률가로서 역할을 수행하려 한다. 그러나 제프가 떠오른다. 그리고 자신의 손을 떠난 서류 하나 때문에 목숨을 잃은 랠프까지 떠오른다. 법정에서 반복해서 보았던 사람들의 얼굴이 겹친다. 그리고 이제 그 법정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았던 사람이 피고석에 앉아 있다.
마지막 재판이 시작된다
마침내 플레밍의 재판이 열린다. 배심원들이 앉아 있다. 검사가 있다. 판사가 있다. 피고인 플레밍이 있다. 그리고 변호인석에 아서가 서 있다.
그에게 주어진 역할은 분명하다. Defense counsel. 피고인의 변호인이다. 아서가 배심원 앞에 선다. 처음에는 변호사답게 말한다. 정의가 무엇인지 이야기한다. “Justice is … the finding of the truth.” “정의란… 진실을 찾아내는 것입니다.”
바로 그 순간 문제가 생긴다. 아서 자신이 그 ‘진실’을 알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다. 그는 말을 계속한다. 하지만 더 이상 예정된 길로 갈 수 없다.
“Why would she lie?” “그녀가 왜 거짓말을 하겠습니까?” 변호인이 피해자의 거짓말 가능성을 공격해야 할 순간이다. 그런데 아서의 논리가 갑자기 반대 방향으로 돌아간다. 그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이 아니라면? 피고인이 거짓말을 하고 있는 것이라면? 그리고 자신이 그 사람을 변호하고 있다면? 법정의 공기가 달라진다. “You’re out of order!” 재판장이 아서를 제지한다. 법정질서를 지키라는 것이다. 그 순간 아서가 폭발한다. “You're out of order!” “커클랜드 변호사, 법정질서를 어기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어진다. “The whole trial is out of order!” “잘못된 것은 나만이 아닙니다. 이 재판 전체가 잘못됐습니다!” 영화에서 가장 유명한 순간이다.
여기서 order라는 단어가 두 개의 의미로 갈라진다. 재판장이 말하는 order는 법정의 절차적 질서다. 아서가 말하는 order는 정의의 질서다.
법정의 절차는 정상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배심원도 있다. 판사도 있다. 검사도 있다. 변호인도 있다. 그런데 아서는 외친다. 형식은 정상인데 정의가 무너졌다면 그것을 정상적인 재판이라고 부를 수 있는가.
그러나 아서가 옳다고만 할 수도 없다
여기에서 이 영화를 단순한 영웅담으로 읽으면 중요한 것을 놓친다. 아서 역시 변호사다. 변호사에게는 의뢰인에 대한 비밀유지의무(confidentiality)가 있다. 의뢰인을 충실하게 대리해야 할 직업적 의무도 있다. 자신이 의뢰인을 싫어한다고 해서 마음대로 배신할 수는 없다. 의뢰인이 범죄를 저질렀다고 생각한다고 해서 법정에서 검사의 역할을 대신할 수도 없다.
따라서 아서의 마지막 행동을 법률적으로 그대로 정당화하기는 어렵다. 그렇기 때문에 오히려 더 무서운 질문이 생긴다. 한 변호사가 자신의 직업윤리와 양심 가운데 하나를 깨뜨려야 한다고 느낄 정도가 될 때까지, 그 전에 제도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영웅이 필요해졌다는 사실 자체가 제도의 실패를 보여주는 것은 아닐까.
오판과 비위와 범죄는 다르다
여기에서 선을 분명하게 그어야 한다. 판사가 잘못된 판결을 내렸다고 해서 곧바로 부패한 판사가 되는 것은 아니다. 법관도 법률을 잘못 해석할 수 있다. 증거를 잘못 평가할 수도 있다. 사실관계를 잘못 판단할 수도 있다. 그래서 상소제도가 있다. 이것은 judicial error, 즉 재판상 오류의 문제다.
그러나 법관이 이해관계를 숨기거나 부적절한 접촉을 하거나 직위를 사적으로 이용하는 문제는 judicial misconduct, 즉 법관비위의 영역이다.
그리고 판사가 폭행·성범죄·뇌물 같은 범죄를 저질렀다면 그것은 또 별개의 criminal conduct, 형사책임의 문제다.
법관의 독립은 법관의 무책임을 뜻하지 않는다
오늘날 미국 연방법원에는 판결 자체의 오류를 다투는 상소절차와 별도로, 연방법관의 일정한 비위(judicial misconduct)나 직무수행에 영향을 미치는 장애(disability)에 대해 신고하고 심사하는 ‘Judicial Conduct and Disability’ 절차가 존재한다.
여기서 말하는 법관비위에는 예컨대 법관의 직위를 이용해 친척이나 지인에게 특별대우를 받게 하는 행위, 사법직과 관련해 뇌물·선물 또는 개인적 편의를 받는 행위, 사건의 한쪽 당사자나 변호인과 부적절하게 비공개로 접촉하는 행위(ex parte communication), 소송당사자·변호사·법원 직원 등을 현저하게 모욕적이거나 적대적으로 대하는 행위, 성희롱·성폭력을 포함한 원치 않는 성적 행위, 의도적인 차별, 비위 신고자나 증인 등에 대한 보복 등이 포함될 수 있다. 미국 연방법원은 이 목록이 모든 비위 유형을 망라하는 것은 아니라고 설명한다.
그러나 여기서 중요한 경계선이 있다. 판사가 잘못 판단한 것과 판사가 비위를 저지른 것은 같은 문제가 아니다. 자신에게 불리한 판결이 내려졌거나 판사의 법률적 판단이 잘못됐다고 생각한다는 이유만으로 비위신고 절차를 이용할 수는 없다. 판결의 옳고 그름은 상소절차(appellate review)를 통해 다투고, 법관의 비위는 별도의 ‘법관비위 및 직무수행장애(Judicial Conduct and Disability) 절차’에서 다룬다. 이 절차는 원래 사건의 판결을 변경하거나 뒤집기 위한 또 하나의 상소심이 아니다.
따라서 세 가지를 구별해야 한다. 오판은 상소로 바로잡고, 비위는 신고·조사·징계절차를 통해 책임을 묻고, 범죄가 있다면 형사사법절차에 따라 수사하고 재판해야 한다. 법관의 독립(judicial independence)은 판결에 대한 외부의 부당한 압력을 막기 위한 원칙이지, 법관 개인을 모든 책임으로부터 면제한다는 뜻은 아니다.
《…And Justice for All》이 던지는 질문도 바로 이 경계에서 시작된다. 판사의 판단이 잘못됐다면 상소할 수 있다. 그렇다면 문제가 단순한 오판을 넘어 법관 자신의 비위나 범죄에 있다면 누가 그것을 조사하고, 누가 책임을 묻는가. 법관의 독립을 지키면서 동시에 법관의 권한을 통제하는 장치는 충분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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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And Justice for All》이 던지는 질문은 판결의 옳고 그름을 넘어선다. 법관의 독립을 보장하면서도 그 권한이 잘못 사용됐을 때 책임을 물을 장치는 작동하고 있는가. AI 재구성 |
판사를 누가 심판하는가
좋은 판사라면 스스로에게 물을 것이다. 내가 틀렸을 가능성은 없는가. 내 편견이 개입하지 않았는가. 당사자 양쪽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는가. 내 판단으로 한 사람에게 돌이킬 수 없는 피해를 주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자기성찰은 중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하지 않다. 법의 지배(rule of law)는 좋은 판사의 양심에만 의존하는 제도가 아니기 때문이다. 판사가 반성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판사가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판사가 자신의 권한을 이용해 잘못을 감춘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결국 우리는 질문해야 한다. Who judges the judges? 판사를 누가 심판하는가.
제프에게 필요했던 것은 좋은 판사의 동정이 아니었다
나는 다시 제프에게 돌아가고 싶다. 제프에게 필요했던 것은 판사가 자신을 불쌍하게 여기는 일이 아니었다. 자신의 무고를 뒷받침하는 자료를 적시에 제대로 심사받을 수 있는 제도였다. 랠프에게 필요했던 것도 특별한 선처가 아니었다. 자신의 자유를 좌우할 수정자료가 법정에 제대로 전달되고 판사가 그것을 읽는, 너무나 평범한 절차의 정확성이었다. 플레밍 사건의 피해 여성에게 필요한 것도 판사의 양심이 아니었다. 판사도 다른 시민과 마찬가지로 수사받고 재판받을 수 있다는 원칙이었다. 아서에게 필요했던 것도 법정에서 모든 것을 걸고 절규해야 하는 영웅적 순간이 아니었다. 그가 그렇게 절규하지 않아도 진실을 확인하고 잘못에 책임을 묻을 수 있는 사법제도였다.
제프와 랠프와 피해 여성과 아서를 함께 놓으면 하나의 공통점이 보인다. 누군가의 선의가 우연히 작동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제도라면, 그것은 충분히 안전한 제도가 아니다. 좋은 사람이 필요한가. 물론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다. 좋은 사람이 없어도 최소한의 정의가 작동하도록 만드는 것이 제도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사람을 일으켜 세웠다
나는 다시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로 돌아간다. 길가에 사람이 쓰러져 있었다. 제사장이 지나갔다. 레위인도 지나갔다. 사마리아인은 멈췄다. 가까이 갔다. 상처를 싸맸다. 비용을 지불했다. 그것이 이웃사랑이다.
그러나 현대사회에서 우리는 한 걸음 더 가야 한다. 오늘 한 사람이 같은 길에서 쓰러졌다. 우리가 일으켜 세웠다. 내일 또 한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쓰러졌다. 다시 일으켜 세웠다. 모레 또 사람이 쓰러진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계속 상처만 싸맬 것인가. 아니면 물어야 하는가. 왜 사람들은 계속 이 자리에서 쓰러지는가. 여기에서 자비와 정의가 만난다.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자비라면, 같은 자리에서 또 다른 사람이 쓰러지지 않도록 길을 고치는 것은 정의다.
좋은 판사를 기다리는 사회를 넘어
좋은 판사는 필요하다. 공정한 판사도 필요하다. 자신의 판단을 의심할 줄 아는 판사는 더욱 필요하다. 그러나 좋은 사회는 좋은 판사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사회여서는 안 된다. 선하지 않은 사람이 판사가 되더라도, 판사가 실수하더라도, 판사가 자신의 권한을 남용하더라도, 그 잘못을 발견하고 바로잡고 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한다. 오판을 바로잡는 제도. 법관비위를 조사하는 제도. 범죄를 처벌하는 제도. 피해를 회복시키는 제도. 그리고 무엇보다 그 과정이 다시 권력자의 자의에 좌우되지 않도록 하는 제도. 그것이 법의 지배다. 권력이 이어지는 곳에는 그 권력을 다시 살펴보는 검증의 장치도 이어져야 한다.
Justice for All ― 정말 모두를 위한 정의인가
영화 제목은 미국 충성서약(Pledge of Allegiance)의 마지막 표현을 가져왔다. “…with liberty and justice for all.” “…모두에게 자유와 정의를.” 하지만 영화를 끝까지 보고 나면 이 말은 선언보다 질문처럼 들린다.
정말 정의는 모두를 위한 것인가. 돈 있는 사람에게도. 돈 없는 사람에게도. 피해자에게도. 피고인에게도. 검사에게도. 변호사에게도. 그리고 판사에게도. No one is above the law. 누구도 법 위에 있지 않다.
그렇다면 당연히 한 문장이 따라와야 한다. Not even a judge. 판사도 예외가 아니다. 판사의 잘못을 묵인하는 것이 사법독립은 아니다. 판결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판사를 공격하는 것도 사법책임은 아니다.
우리가 만들어야 할 것은 그 둘 사이의 어려운 길이다. 판결의 독립은 철저하게 보장하면서도, 오판은 다시 심사하고, 비위는 독립적으로 조사하며, 범죄에는 법에 따라 책임을 묻는 제도. 그것이 법관을 약하게 만드는 일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시민이 사법부를 믿을 수 있게 만드는 길이다.
그래서 《…And Justice for All》을 보고 내가 마지막으로 묻고 싶은 것은 이것이다. 경찰을 통제하는 제도가 있고, 검사의 주장을 판단하는 법원이 있다면, 판사의 권한이 잘못 사용되었을 때 그 판사를 실질적으로 통제할 제도는 충분한가.
그리고 여기에서 다음 질문이 시작된다. 판사가 경찰과 검사의 판단을 검증해야 한다면, 그보다 앞선 단계에서 경찰의 확신은 누가 검증하고 검사의 확신은 누가 다시 의심해야 하는가. 그리고 이 질문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질문과 만난다. 누가 쓰러진 사람의 이웃인가. 쓰러진 사람에게 다가가는 사람이다. 상처를 싸매는 사람이다. 비용을 부담하는 사람이다.
그러나 거기서 끝나서는 안 된다. 왜 그 사람이 쓰러졌는지 묻는 사람, 책임을 물어야 할 곳에 책임을 묻는 사람, 다음 사람이 같은 자리에서 쓰러지지 않도록 길을 고치는 사람도 그의 이웃이다. 법정의 가장 낮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에게만 법을 지키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법정의 가장 높은 자리에 앉아 있는 사람도 법 아래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사람이 법을 벗어났을 때 필요한 것은 그의 양심이 돌아오기를 기다리는 일이 아니다. 잘못을 밝혀내고, 피해를 회복시키고, 책임을 묻고, 다시는 같은 일이 반복되지 않도록 만드는 제도다. 그것이 자비를 넘어 정의로 가는 길이다. 그리고 바로 그때 비로소 영화 제목의 마지막 문장을 선언할 수 있을 것이다. Justice for All. 모두를 위한 정의. 판사까지 법 아래 있을 때, 법의 지배는 비로소 완성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