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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 (칼럼니스트, 기독교철학박사) - |
----------(13회)----------
뉴질랜드 환경보호의 핵심은 인간을 우선적으로 배려한다는 것. 푸르른 초원에는 상록수가 어울리는 시공이로되 간간이 단풍나무를 골라 심은 혜안도 돋보였다. 금광 때문에 생긴 애로우 타운마저 그대로 남겨두었다. 도로 밑으로 흐르는 옥빛 계곡물. 길바닥은 얼었다가 녹아서인지 미끄러울 만큼 촉촉했다. 문제는 늘 안전운전 수칙을 철저히 지키는 일. 몸에 밴 나쁜 습관 탓에 젊은 기사의 과속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았다. 이어지는 와인 전용 포도밭 단지. 납작한 덩굴은 펑퍼짐한 하늘을 향해 두 팔을 벌리고, 늘어선 미루나무 행렬은 귀하디귀한 마누카의 서식지를 감싸듯 서 있다. 화산폭발을 맞은 듯한 들판의 황량함을 감미로운 애창곡이 메워주는 가운데 발라드풍의 ‘작은 새’를 필두로 김정호의 노래 모음이 연신 귓속을 파고들었다. 박토를 견디고 자라나는 떨기나무 같은 식물들. 윤기 없는 황무지를 바라볼수록 불쑥 타임머신을 타고 구약시대로 되돌아간 느낌이다. 가드레일 하나 없는 내리막길에서 그나마 위안을 삼은 건 무당골이 끼어들 틈새가 전혀 없다는 점. 그런 가운데 나는 맑은 도랑물에서 노란색 이끼류를 발견했다. 길섶 바위틈을 비집고 자라난 은화식물이라니 반갑고 부럽기 그지없었다.
잔설이 녹아내리는 골짜기를 따라 찌그러진 양철집이 보였다. 가이드에게 물으니 건초를 보관하는 창고. 또다시 이어지는 긴긴 미루나무 행렬을 지나 과일 상점을 들렀으나 그게 그거여서 바깥바람을 쏘인 일밖에 특별한 건 없었다. 눈부신 햇살이 투명한 유리창을 투과하는 시공. 갈대꽃 같은 양무리와 흑갈색 소 떼는 따스한 햇볕을 쬐며 양지바른 데서 노닐고, 구부러진 자작나무를 품은 메마른 메[山]와 들판은 암갈색 풍치를 자아낸다. 모기나 날파리들이 기승을 부리지 않는 건 먹이사슬의 고리가 살아있다는 반증. 하얀 찔레꽃에 달린 빨간 열매마다 떡가루 같은 눈꽃이 붙어있는 모양새나 고동색 지붕에 얹은 하얀 돌의 조화 또한 그리 흔한 풍경은 아니다. 거기다가 실개천을 수놓듯 자맥질하는 오리 떼에 보태 드높이 구름 띠가 머무는 하늘가에는 흰 구름이 먹구름이 되고, 양털구름이 새털구름이 되는 오묘한 장면이 펼쳐졌다. 아, 이야말로 굳이 목가적이란 낱말에 사족을 달지 않아도 될성부른 소우주로다!
오가며 들른 두 번째 식당에서는 언감생심 생각지도 않은 떡만두국이 나왔다. 좀 이른 시간대였지만 머나먼 이국땅에서 구경하는 별미에 온통 감동의 도가니. 곁들여 현지 밤으로 만든 묵까지 맛보다니, 타국에서 고군분투하는 주인장 내외가 새삼 장하게 느껴졌다. 안쓰러운 건 일에 지친 여주인의 안색. 설거지 도중에 애써 눈인사를 건네고 나왔으나 이역만리 삶의 무게에 짓눌려서인지 건성이었다. 냉큼 비치한 엽서를 썼다. “청정의 땅에서 손님을 대접하시는 손길에서 창조주의 섭리를 느낍니다. 두고두고 오늘 떡만두국을 기억하렵니다.” 그곳을 나와 고개를 드니 산꼭대기에 콕 박혀 돌아가는 풍차가 보였다. 사방에서 불어오는 바람을 부여잡아 사시사철 전기를 생산한다면 이보다 유용할 수는 없는 일. 어린이놀이터를 겸한 동네 공원에는 CCTV를 매달아 놓았다. 부러운 대목은 자그마한 마을에 있는 조명시설을 갖춘 잔디 구장. 어쨌든 오늘 같은 날 마을 길목 한편에서 화려한 봄날을 준비하는 동백꽃을 만난 건 행운이었다.
정오를 넘긴 시각 둥그런 차고지를 떠나 기다란 둑길을 따라가는 이등변 삼각형의 형상들은 무뚝뚝한 잣나무들이었다. 얼핏 버려진 땅을 차지한 활주로는 공중에서 씨앗을 뿌릴 때 쓰는 Airport 구역. 다만 몽골처럼 드넓은 시공을 가르며 달리는 말들이 없어 못내 아쉬웠다. 옥빛 물결이 일렁이는 운하를 보며 눈 쌓인 아우라키 산정이 멀어질 무렵 안개 낀 푸카키 호수가 눈앞에 드러났다. 자욱한 시계처럼 막연한 것이 인간사로되 뿌옇게 피어오르는 물안개가 되레 필자의 사념을 사로잡는다. 리무진이 미끄러지듯 내닫는 사이 일행의 쪽잠을 깨우는 일화가 이어졌다. 뉴질랜드 법대를 수석으로 졸업한 재원이 있었단다. 그런데 어느 날 해고통지가 날아들었다. 연일 울분을 삭이지 못하던 그녀에게 남은 건 TV 시청뿐. 그렇게 마지못해 눈길을 주던 중 동창생이 당당히 인터뷰에 응하는 걸 보게 되었다. 애써 정신을 차리고 깊이 들여다본 자신의 문제점은 대인관계. 먼지 쌓인 앨범을 꺼내 지난날을 뒤돌아보기 시작했다. 그 길로 은사를 만나는 등 놀라운 변신을 시도하던 중 돌아온 건 무자비한 도둑을 맞닥뜨린 일. 하도 기가 막혀 파출소에 연락한들 담당자가 없으니 사흘을 기다리라는 말에 참다못한 그녀가 대차게 상대한 이는 경찰서장이었다. 어렵사리 담판을 벌였으나 이 또한 별무소득. 울분에 찬 나머지 집에 돌아와 냉큼 내무부장관실에 편지를 썼으나 똑같은 회신이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