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연재 ㉓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세 아내가 죽을 때까지 아무도 그를 의심하지 않았다 ― <Four Women, One Killer>가 묻는 사회적 신뢰와 살인의 얼굴
    • 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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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회적 신뢰와 평판 뒤에 가려진 죽음의 진실을 법정의 증거와 배심원의 판단으로 추적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샴페인과 약물 주사기 네 여성의 죽음과 법정을 대비시켜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AI 이미지주간시민광장

      ▲ 사회적 신뢰와 평판 뒤에 가려진 죽음의 진실을 법정의 증거와 배심원의 판단으로 추적하는 모습을 형상화했다. 샴페인과 약물, 주사기, 네 여성의 죽음과 법정을 대비시켜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겠는가”라는 질문을 던진다. [AI 재구성]


      당신이 배심원이라면 어떻게 판단하겠는가. 한 여성이 호텔방에서 죽었다. 방 안에는 샴페인이 있었고 코카인(cocaine)이 있었다. 성인용품도 있었다. 죽은 여성의 몸에서는 술과 Xanax(항불안·진정 작용을 하는 처방약 재낵스), 그리고 엄청난 양의 코카인이 검출됐다. 남편은 살아 있었다. 그는 경찰에게 말했다. 아내가 스스로 코카인을 사용했다고. 그렇다면 이것은 살인(murder)이 아니라 약물 과다복용(overdose)으로 인한 비극적인 죽음일 수도 있다.

      그런데 문제가 하나 있었다. 죽은 여성의 몸에서 검출된 코카인의 양이 너무 많았다. 그리고 더 큰 문제가 있었다. 이 남자의 곁에서 죽은 여성이 처음이 아니었다.

      죽은 아내, 살아남은 남편

      남자의 이름은 Ed Amos. 그는 평범한 사람이 아니었다. 전직 GM 임원으로 소개되고 사업을 운영했으며, 과거 지역사회에서는 시장 후보(mayoral candidate)였고 상공회의소 회장을 맡았으며 Lions Club과 Kiwanis 같은 지역 조직에서도 활동했던 인물로 묘사된다.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경찰관의 증언은 이 영화의 핵심을 압축한다. 그는 지역사회의 일원이었다. 사람들이 신뢰하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도시로 떠난 뒤에도 그를 좋게 기억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그렇다면 이런 사람이 아내를 살해할 수 있을까. 바로 이 질문이 함정이었다. 우리는 흔히 살인자를 생각할 때 위험한 얼굴을 상상한다. 그러나 악(evil)은 언제나 흉악한 얼굴을 하고 찾아오는 것이 아니다. 좋은 직장, 좋은 자동차, 성공한 사업, 사회적 지위, 친절한 말투, 넓은 인간관계를 가진 사람도 얼마든지 타인을 파괴할 수 있다. 사회적 신뢰(social trust)는 인격의 증명서가 아니다. 오히려 이 사건에서 그것은 의심을 차단하는 방패가 된다.

      “내 딸은 마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Bobby Amos가 죽은 뒤 사람들은 처음에는 약물 과다복용을 생각한다. 혈액에서는 알코올과 Xanax, 코카인이 검출됐다. 남편의 설명도 있었다. 아내가 코카인을 사용했다는 것이다. 사건이 그대로 종결될 수도 있었다. 그때 한 사람이 나타난다. Bobby의 어머니 Marie Wagner다.

      그녀는 검찰에 찾아와 말한다. “내 딸은 마약을 하지 않았습니다.” 그리고 훨씬 무거운 말을 던진다. “Ed Amos가 내 딸을 죽였습니다.” 검사는 당연히 묻는다. 증거가 있습니까? Marie가 제시하는 것은 아직 법정에서 유죄를 증명할 직접증거(direct evidence)가 아니다. 대신 그녀는 과거를 보라고 요구한다. Ed의 앞선 아내들도 죽었다는 것이다. 심지어 그의 어머니의 죽음까지 의심스럽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죽음들 뒤에 경제적 이익이 있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Ed는 그 죽음들 때문에 기소된 적도, 제대로 된 용의자로 취급된 적도 없었다. Marie가 설명하는 이유는 더욱 섬뜩하다. 그는 지역사회의 “golden boy”였다는 것이다. 사람들이 그를 믿었다. 경찰도 그가 살인할 수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여기서 영화는 첫 번째 질문을 던진다. 우리는 증거를 보고 사람을 판단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에 대한 기존 이미지에 맞추어 증거를 해석하는가.

      한 번의 죽음은 비극이고, 반복되는 죽음은 질문이 된다

      첫 번째 배우자가 죽으면 사람들은 불운이라고 생각할 수 있다. 두 번째 배우자가 죽으면 이상하다고 느낄 수 있다. 세 번째 배우자까지 의문스럽게 죽는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수사기관은 각각의 죽음을 하나의 독립된 사건으로만 볼 것인지, 아니면 서로 연결된 패턴(pattern)으로 볼 것인지 결정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가장 중요한 법적 문제 가운데 하나가 여기서 시작된다. 검사는 과거 여성들의 죽음을 현재 Bobby 사건의 증거로 사용하려 한다. 왜냐하면 검찰이 보기에 반복되는 죽음은 Ed의 의도(intent)와 범행의 패턴을 설명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변호인은 반박한다. 과거 사건에서 Ed는 유죄판결을 받은 적이 없다. 어떤 죽음은 기소조차 되지 않았다. 그렇다면 입증되지 않은 과거의 의혹을 현재 사건의 배심원에게 보여주는 순간, 배심원은 이렇게 생각할 위험이 있다. “저 남자는 원래 나쁜 사람이니까 이번에도 죽였을 것이다.” 

      그것은 형사재판에서 매우 위험한 추론이다. 그래서 영화는 단순한 범죄영화에서 법정영화로 넘어간다. 쟁점은 다른 행위에 관한 증거(other-acts evidence)의 증거능력(admissibility)이다. 과거를 보여주는 것이 진실 발견을 위한 것인가. 아니면 피고인에게 편견(prejudice)을 심어주는 것인가. 이 질문은 마지막까지 검찰을 괴롭힌다.

      그러나 Bobby의 몸은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사람은 거짓말할 수 있다. 죽은 사람은 말할 수 없다. 하지만 시신은 증거를 남긴다. Bobby의 사망 원인을 추적하면서 사건은 전환점을 맞는다. 그녀의 몸에서는 엄청난 양의 코카인이 발견된다. 수사 과정에서 제시되는 핵심 의문은 단순하다. Bobby가 정말 스스로 그만큼의 코카인을 자신의 몸에 넣을 수 있었는가.

      Ed의 설명은 매우 구체적이었다. Bobby가 손가락에 윤활제를 묻힌 뒤 코카인을 묻혀 질 안에 넣는 방식으로 사용했다는 것이다. 재판에서도 그는 같은 취지의 설명을 반복한다.

      여기서 검사는 기발하면서도 강력한 방법을 선택한다. 말로 반박하지 않는다. 배심원 앞에서 직접 해보게 한다. 윤활제가 준비된다. 코카인이 담긴 봉지가 제시된다. Ed에게 손가락에 윤활제를 묻히고 그 손가락으로 코카인을 찍어보라고 한다. 묻어 나오는 양은 많지 않다. 검사가 묻는다. 그 방법으로 사람 여러 명을 죽일 정도의 코카인을 체내에 넣으려면 도대체 몇 번을 반복해야 합니까. 100번입니까. 1,000번입니까. Ed는 대답하지 못한다. 이것이 시연증거(demonstrative evidence)의 힘이다. 검사는 배심원에게 “Ed의 이야기는 거짓말입니다”라고 주장하는 데 그치지 않았다. 그 이야기가 물리적으로 가능한지를 배심원이 자기 눈으로 판단하게 했다.

      사라진 주사기

      그리고 또 하나의 물건이 등장한다. 주사기(syringe)다. Bobby가 죽은 다음 날 새벽, Ed는 사업 파트너를 찾아가 무언가를 맡긴다. 아무에게도 말하지 말라고 한다. 자신의 인생이 걸려 있다고 말한다. 그 물건이 바로 주사기였다. 왜 아내가 코카인을 스스로 사용하다 죽었다는 사람이 주사기를 숨겨야 했을까. Ed에게도 설명은 있었다. 마약 소지 혐의를 받을까 두려웠다는 것이다. 그 주사기를 실제로 사용한 적은 없다고 주장한다.

      이제 배심원 앞에는 두 개의 이야기가 놓인다. 첫 번째 이야기. 아내가 스스로 코카인을 사용하다 죽었다. 남편은 당황했고, 오해받을까 두려워 주사기를 치웠다. 두 번째 이야기. 남편이 아내에게 코카인을 강제로 투여했고, 살인이 끝난 뒤 가장 위험한 증거인 주사기를 없애려 했다. 어느 이야기가 더 합리적인가. 형사재판은 바로 이 두 이야기의 싸움이다.

      샴페인에는 코카인이 아니라 Xanax가 들어갔다

      그리고 법의학자(forensic pathologist)가 증언대에 선다. 이 장면에서 영화 초반에 우리가 보았던 행동들의 의미가 하나씩 연결된다. 검찰 측 법의학자가 재구성한 사건은 이렇다. Bobby는 이미 상당한 양의 술을 마신 상태였다. Ed가 샴페인을 연다. 그런데 Bobby에게 잔을 건네기 전에 Xanax 두 알을 부수어 샴페인에 넣는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을 정확히 구별해야 한다. 샴페인에 넣은 것은 코카인이 아니라 Xanax였다. 술과 Xanax의 영향으로 Bobby가 깊은 잠에 빠졌다는 것이 법의학자의 설명이다. 이제 그녀는 정상적인 판단과 저항을 하기 어려운 상태가 된다. 그 다음 단계가 코카인이다. Ed는 주사기와 잔, 코카인 봉지를 욕실로 가져간다.

      코카인을 물에 섞는다. 그 용액을 주사기에 채운다. 그리고 다시 침실로 돌아온다. 주사기에는 바늘이 없다. 검찰 측 전문가의 재구성에 따르면 Ed는 그 주사기를 이용해 코카인 용액을 Bobby의 질 안으로 주입한다. 코카인은 빠르게 흡수된다. 그러나 범행은 그것으로 끝나지 않는다.

      그는 죽음을 기다리지 않았다

      법의학자의 설명에서 가장 끔찍한 대목은 다음이다. Bobby가 죽어가는 상황에서도 Ed는 그것만으로 충분하다고 생각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는 Bobby의 몸 위에 올라탄 뒤 코를 막고 베개로 얼굴을 눌러 호흡을 차단했다는 것이 검찰 측 재구성이다. 즉, 검찰의 이론대로라면 범행은 우발적인 약물 사고가 아니다. 약물 투여 → 무력화 → 치명적 코카인 투여 → 질식 → 증거정리라는 단계적 행동이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계획성(premeditation)을 판단하는 데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우발적 행동은 순간적으로 일어날 수 있다. 그러나 약을 부수고, 음료에 넣고, 기다리고, 코카인을 물에 섞고, 주사기에 담고, 피해자의 몸에 투여하고, 다시 호흡을 차단하고, 이후 증거를 처리하는 일련의 과정에는 수많은 선택의 순간이 존재한다. 그때마다 멈출 수 있었다. 그러나 멈추지 않았다. 계획적 살인(premeditated murder)을 이해할 때 중요한 것은 계획서를 미리 작성했느냐가 아니다. 행위자가 행동을 계속하면서 숙고하고 선택할 기회가 있었는가도 중요하다.

      살인보다 더 치밀했던 것은 ‘이야기’였다

      그러나 나는 이 사건에서 범행방법보다 더 무서운 것이 있다고 생각한다. Ed는 죽음 이후의 이야기를 준비했다. 아내가 마약을 했다. 성적인 목적으로 코카인을 사용했다. 자신은 잠들어 있었다. 깨어보니 아내가 죽어 있었다. 나는 사랑하는 아내를 잃은 남편이다. 경찰이 나를 범죄자 취급하고 있다.

      이것은 단순한 거짓말 하나가 아니다. 하나의 대체서사(alternative narrative)다. 그리고 그 서사의 가장 잔인한 부분은 죽은 피해자에게 책임을 떠넘긴다는 데 있다. Bobby는 말할 수 없다. 그러므로 살아 있는 남편이 그녀의 행동을 대신 설명한다. 피해자는 어느 순간 살해당한 사람이 아니라 “마약을 하다 스스로 죽은 여성”으로 바뀐다. 살인은 한 번 일어나지만 피해자에 대한 서사적 살해는 그 뒤에도 계속될 수 있다. 이것이 피해자 비난(victim blaming)의 극단적인 모습이다.

      그런데 왜 앞선 죽음에서는 멈추지 못했는가

      여기서 나는 영화의 제목을 다시 생각한다. Four Women, One Killer. 한 명의 남자. 그리고 여러 명의 죽은 여성. 그렇다면 질문은 “그가 어떻게 죽였는가”에서 끝나서는 안 된다.

      왜 더 일찍 발견되지 않았는가. 영화가 제시하는 답 가운데 하나는 사회적 신뢰다. Ed는 지역사회 밖의 낯선 사람이 아니었다. 지역사회 중심부에 있었다. 사업가였다. 사람들과 어울렸다. 정치에도 참여했다. 지역단체에서도 활동했다. 좋은 자동차를 타고 좋은 옷을 입고 사람들에게 친절했다. 사람들은 그가 주는 선물을 기억했다. 그가 부탁을 들어주던 일을 기억했다. 그가 성공한 사람이라는 사실을 기억했다.

      그런데 죽은 여성들의 목소리는 들리지 않았다. 여기서 사회적 신뢰는 공동체의 자산이 아니라 인지적 사각지대(blind spot)가 된다. 우리는 신뢰하는 사람에게서는 증거를 찾지 않고, 의심하는 사람에게서는 증거가 없어도 의심한다. 이것은 수사기관만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모두가 빠질 수 있는 오류다.

      이 사건의 진짜 영웅은 의심한 사람들이다

      그래서 나는 이 영화를 살인범 Ed Amos의 이야기로만 읽고 싶지 않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을 보고 싶다. 딸이 마약을 했다는 설명을 받아들이지 않은 어머니 Marie. 과거 죽음이 이상하다고 기억하고 있던 사람. 작은 마을에서 제대로 조사되지 않았던 기록을 다시 꺼낸 경찰관. 그리고 하나의 죽음을 과거의 다른 죽음들과 연결하려 했던 검사와 수사관들. 그들은 처음부터 완벽한 증거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들에게 있었던 것은 질문이었다. “정말 그런가?” 시민사회도 여기서 시작한다. 권력이 말했기 때문에 믿는 것이 아니다. 전문가가 말했다고 끝나는 것도 아니다. 유명한 사람이기 때문에 의심하지 않는 것도 아니다. 설명이 사실과 맞지 않을 때 다시 질문하는 것. 그것이 시민의 역할이다.

      직접증거가 없어도 진실에 도달할 수 있는가

      이 사건에는 살인의 순간을 본 목격자가 없다. 법정에서도 수사관은 인정한다. 그 호텔방 안에 있었던 사람은 피해자 Bobby와 피고인 Ed뿐이었다.

      그렇다면 살인을 어떻게 증명할 것인가. 이 영화는 정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가 무엇인지를 매우 잘 보여준다. 하나의 증거만 떼어놓으면 결정적이지 않을 수 있다. Xanax가 있었다. 코카인이 있었다. 주사기가 있었다. 주사기는 숨겨졌다. 피해자의 몸에서는 비정상적으로 많은 코카인이 검출됐다. 피고인이 설명한 자가투여 방법으로는 그 양을 설명하기 어려웠다. 과거에도 가까운 여성들이 의문스럽게 사망했다. 경제적 동기도 제기됐다. 사망 이후의 행동에도 이상한 점들이 있었다. 각각은 하나의 점(dot)이다.

      검찰이 해야 할 일은 그것들을 연결하는 것이다. Connect the dots. 점을 연결했을 때 하나의 그림이 나타나는가. 그리고 그 그림이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을 넘어 피고인의 유죄를 가리키는가. 그것이 배심원이 판단해야 할 문제다.

      그리고 배심원은 유죄라고 말했다

      마지막 순간. 피고인 Ed Amos가 일어난다. 배심원에게 평결을 묻는다. First-degree premeditated murder. 1급 계획살인. Guilty. 유죄. 이어지는 혐의는 murder by poisoning, 즉 독극물을 이용한 살인이다. 다시 평결이 나온다. Guilty. 유죄. 영화는 결국 한 사람의 말보다 여러 증거의 연결을 선택한다. 사회적 지위보다 시신이 남긴 흔적을 선택한다. 겉으로 보이는 인격보다 반복되는 행동의 패턴을 선택한다.

      그렇다면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나는 여기서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떠올린다. 예수는 “누가 강도인가”를 묻지 않았다. 강도 만난 사람이 길에 쓰러져 있을 때 “누가 그의 이웃이 되어 주었는가”를 물었다.

      이 영화에서도 살인범을 찾아내는 것만으로 질문은 끝나지 않는다. Bobby가 죽었을 때 누가 그녀의 말을 대신해 주었는가. “내 딸은 그런 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한 어머니였다. 과거의 죽음을 잊지 않은 사람이었다. 묻혀 있던 기록을 다시 펼친 사람이었다. “사건 끝”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시 질문한 검사와 수사관이었다. 그들이 강도 만난 자의 곁에 멈춘 사람들이다. 

      사마리아인의 핵심은 선량한 마음만이 아니다. 멈춤이다. 다른 사람들은 지나갔다. 사마리아인은 멈췄다. 그리고 보았다. 가까이 갔다. 돌보았다. 책임을 졌다. 이 영화에서도 마찬가지다. 앞선 죽음들이 각각 불행한 사고로만 처리될 때 누군가 한 번만 제대로 멈추었다면 어땠을까. 한 번만 더 질문했다면. 한 번만 더 기록을 들여다보았다면. 한 번만 더 죽은 여성의 입장에서 사건을 보았다면. 다음 죽음은 막을 수 있지 않았을까.

      사회적 신뢰는 면죄부가 아니다

      이 영화가 우리 사회에 던지는 가장 불편한 질문은 이것이다. 우리는 사람의 행위를 보고 그 사람을 판단하는가, 아니면 그 사람의 지위를 보고 그의 행위를 판단하는가. 시장 후보였기 때문에. 기업인이기 때문에. 지역 유지이기 때문에. 좋은 직장을 가졌기 때문에. 기부를 많이 했기 때문에. 사람들에게 친절했기 때문에. 그 사람이 위험할 가능성을 애초에 배제한다면 사회적 신뢰는 정의를 지키는 힘이 아니라 진실을 가리는 장막이 된다. 그래서 민주사회에서 필요한 것은 불신사회가 아니다. 검증 가능한 신뢰(accountable trust)다. 누구도 사회적 지위 때문에 의심에서 면제되어서는 안 되고, 누구도 가난하거나 약하다는 이유로 자신의 말이 처음부터 의심받아서도 안 된다.

      강도 만난 자 곁에 남는다는 것

      영화가 끝난 뒤에도 내게 남는 사람은 살인범이 아니다. 죽은 여성들이다. 그리고 그들의 죽음을 “어쩔 수 없는 사고”라고 끝내지 않은 사람들이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된다는 것은 반드시 영웅적인 일을 한다는 뜻이 아니다. 때로는 아주 작은 질문 하나에서 시작한다. “정말 사고였을까?” “왜 같은 사람 주변에서 비슷한 죽음이 반복되는가?” “죽은 사람이 살아 있었다면 무엇이라고 말했을까?”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질문이 있다. “우리는 왜 살아 있는 사람의 사회적 지위는 그렇게 쉽게 믿으면서, 죽은 사람의 흔적은 그렇게 쉽게 외면했는가.” 한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불행이라고 했다. 또 한 사람이 죽었다. 사람들은 우연이라고 했다. 다시 사람이 죽었다. 그제야 누군가 패턴을 보았다.

      그래서 나는 이 작품을 보고 마지막으로 이렇게 묻고 싶다.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은 누구인가. 가장 먼저 현장에 도착한 사람인가. 가장 높은 지위에 있는 사람인가. 가장 많은 말을 한 사람인가. 아니다. 모두가 지나간 뒤에도 이상하다고 말하는 사람, 죽은 사람이 더 이상 자신을 변호할 수 없을 때 그의 목소리를 대신하는 사람, 그리고 사회가 이미 사건을 끝냈다고 말할 때에도 진실이 밝혀질 때까지 그 곁을 떠나지 않는 사람. 그 사람이 이웃이다. 그리고 어쩌면 한 사람의 생명을 지키는 공동체와 그렇지 못한 공동체의 차이도 바로 거기에서 시작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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