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건 | 꺠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 제1기 평택시물환경민관거버넌스 단장
| 평택시민환경연대 공동대표
| 한국시민사회재단 상임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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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와 산업성장은 거대한 부를 만들어내고 있지만, 그 성장의 그늘에서 자영업자와 시민은 폐업·부채·노후의 위험을 홀로 감당하고 있다. (AI 재구성) |
지난 ③회에서 나는 물었다. 기업이 성장할 때 시민의 자산은 얼마나 성장하는가. 그리고 그 과정에서 자영업자의 현실도 잠시 들여다보았다. 매출이 줄면 자신의 소득부터 줄인다. 폐업해도 자신의 퇴직금은 없다. 고용보험의 보호도 임금근로자와 같은 방식으로 자동적으로 따라오지 않는다. 연금보험료 역시 상당 부분 자신의 책임이다.
그렇다면 이제 한 걸음 더 들어가야 한다. 왜 같은 국민인데 어떤 사람은 직장을 잃었을 때 제도가 받쳐주고, 어떤 사람은 사업장을 잃는 순간 위험의 대부분을 자신이 떠안아야 하는가. 자영업자의 문제는 장사가 잘되느냐 못되느냐의 문제가 아니다. 우리 사회가 위험을 누구에게 부담시키도록 설계되어 있는가의 문제다.
회사원에게는 ‘실업’, 자영업자에게는 ‘폐업’
회사원이 직장을 잃으면 우리는 그것을 ‘실업’이라고 부른다. 일정한 요건을 충족하면 실업급여가 있다. 부당하게 해고됐다고 생각하면 노동위원회에 구제를 신청할 수도 있다. 오래 근무했다면 퇴직금이나 퇴직연금이 있을 수 있다. 공무원에게는 또 다른 구제제도가 있다. 중징계를 받으면 소청심사를 청구할 수 있다. 파면이나 해임이 지나치게 무겁다고 생각하면 행정소송으로 다툴 수 있다. 법원은 묻는다. 징계사유가 있었는가. 절차는 적법했는가. 처분은 비위의 정도에 비례하는가. 너무 가혹하지는 않은가.
그런데 자영업자가 문을 닫으면 언어부터 달라진다. “사업에는 원래 위험이 있는 것이다.” “시장의 선택이다.” “경쟁력이 없었던 것 아닌가.” “사업 판단을 잘못한 것이다.” 전부 틀린 말이라고 할 수는 없다. 사업에는 분명히 위험이 따른다. 그럼에도 질문은 남는다. 왜 직장을 잃는 위험에는 사회보험과 구제절차라는 언어가 붙는데, 사업장을 잃는 위험에는 개인책임이라는 언어가 훨씬 쉽게 붙는가.
폐업에는 비례원칙이 없다
한 사람이 20년 동안 식당을 운영했다고 해보자. 하루도 쉬지 않고 일했다. 세금을 냈다. 직원을 고용했다. 지역에서 식재료를 구입했다. 손님에게 밥을 팔았다. 그러다 경기가 나빠졌다. 매출이 줄었다. 임대료가 부담된다. 대출이자가 쌓인다. 끝내 문을 닫는다.
그 순간 누가 묻는가. “20년 동안 성실하게 일한 경력은 고려했습니까.” “한 번의 실패로 모든 것을 잃는 것은 지나치게 가혹하지 않습니까.” “다시 일어설 기회를 줄 수는 없습니까.” 시장에는 이런 질문을 해주는 재판부가 없다.
폐업에는 비례원칙이 없다. 판결문 한 장 없이 한 사람의 생계가 무너질 수 있다. 물론 공무원의 징계와 자영업자의 폐업은 법적으로 전혀 다른 사건이다. 하나는 국가의 행정처분이고 다른 하나는 시장에서 발생하는 경제적 결과다.
그러나 삶의 관점에서는 질문할 수 있다. 왜 한쪽의 직업상실에는 그 불이익이 지나치게 무거운지까지 국가가 살피는데, 다른 한쪽의 생계상실에는 “사업이니까 감당하라”는 말이 너무 쉽게 붙는가.
같은 자영업자라고 출발선까지 같은 것은 아니다
여기에는 또 하나의 착시가 있다. 공무원으로 오래 근무한 사람이 퇴직한 뒤 식당을 열 수 있다. 회사에서 수십 년 일한 사람이 퇴직금이나 퇴직연금을 받고 카페를 시작할 수도 있다. 그들도 통계상 자영업자가 된다.
그러나 평생 자영업으로 살아온 사람과 출발선까지 같지는 않다. 퇴직 후 자영업을 시작한 사람 가운데에는 이미 국민연금이나 직역연금(occupational public pension·공무원연금·군인연금·사학연금·별정우체국연금)의 가입기간을 상당히 확보하고, 퇴직금이나 퇴직연금 같은 자산을 가진 채 사업을 시작하는 경우가 있다. 사업에 실패하더라도 그동안 직장에서 축적한 사회보험과 퇴직자산이 완전히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20대, 30대부터 수십 년 동안 자영업으로 살아온 사람은 상황이 다르다. 사업자금도 자신이 마련한다. 손실도 자신이 부담한다. 지역가입자로 국민연금 보험료를 부담해왔다면 사용자와 보험료를 나누는 구조도 없었다. 사업이 어려우면 자신의 소득부터 줄인다. 그래도 임대료와 이자, 각종 비용은 계속 나간다. 폐업하는 날까지 오래 일했다고 해서 자신의 퇴직금이 생기는 것도 아니다.
평생 자영업자의 어려움은 어느 한 번의 사업 실패에만 있지 않다. 수십 년 동안 위험을 스스로 부담해온 시간이 누적된다는 데 있다. 대기업이나 안정적인 직장에서 장기간 근무한 사람은 근로기간 동안 임금뿐 아니라 사용자가 함께 부담한 사회보험, 퇴직금이나 퇴직연금, 경우에 따라 기업복지 같은 제도적 보호를 축적할 수 있다. 공무원 역시 장기간 재직했다면 별도의 직역연금 체계 안에서 노후를 준비한다.
평생 자영업자는 그런 노동경로를 밟지 않았다. 그것이 자신의 적극적인 선택이었던 사람도 있을 것이고, 가정형편이나 교육기회, 취업기회, 지역의 노동시장, 생계 때문에 그렇게 살아온 사람도 있을 것이다. 어느 하나로 일반화할 수는 없다.
그러나 결과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다. 한 사람은 직장에서 일한 시간과 함께 퇴직자산과 사회보험도 축적한다. 다른 한 사람은 같은 수십 년을 일하면서 사업의 생존과 자신의 노후를 동시에 책임져야 한다. 그래서 같은 ‘사장님’이라는 이름 아래에서도 안전망의 두께가 전혀 다를 수 있다.
사업에 한 번 실패한 사람의 상처도 크다. 그러나 평생 자영업자로 살아온 사람에게 폐업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갖는다. 가게 하나를 잃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자신의 노동과 노후를 함께 걸어온 삶의 기반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자영업은 본인이 선택한 것 아닌가”라는 한마디만으로 설명해서는 부족하다. 어떤 사람은 자신의 기술로 독립한다. 어떤 사람은 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해 사업을 시작한다. 어떤 사람은 이전의 사업 실패 뒤 다시 생계를 이어가기 위해 또 다른 자영업에 뛰어든다. 또 어떤 사람은 임금노동시장보다 자영업에서 생존의 길을 찾아왔다. 겉으로 보면 모두 ‘자신이 선택한 사업’이다.
그러나 선택의 조건도 다르고, 그 선택 이전에 축적해놓은 자산과 안전망도 다르다. 선택했다고 해서 모든 위험까지 개인의 책임이 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는 한 번 실패한 사업자의 재기를 걱정해야 한다. 그러나 동시에 수십 년 동안 퇴직금도 없이 자신의 노동과 사업, 노후를 한 몸에 짊어져온 평생 자영업자의 누적된 위험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들의 위험은 어느 한 번의 실패가 아니라 수십 년 동안 쌓여온 위험이다.
‘사장님’이라는 이름이 위험을 숨긴다
우리 사회는 개인사업자를 쉽게 ‘사장님’이라고 부른다. 작은 식당을 하면 사장님이다. 학원을 운영하면 원장이다. 가게를 운영하면 대표다. 지역신문을 운영해도 발행인이다. 명함에는 대표라고 적혀 있다.
그러나 명함의 직함이 사회안전망을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사장’이라는 이름 때문에 보이지 않는 것도 있다. 자기 자신의 근로시간을 보호해주는 근로기준법이 없다. 자기 자신에게 최저임금을 요구할 수도 없다. 유급휴가를 청구할 사용자도 없다. 아프면 가게 문을 닫아야 한다. 문을 닫으면 매출이 끊긴다. 출산과 육아로 쉬어도 사업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그래서 중요한 질문은 그 사람이 사장인가 노동자인가만이 아니다. 그 사람이 실제로 어떤 위험을 떠안고 살아가는가다.
한쪽은 권리를 조직하고, 다른 한쪽은 희생을 조직한다
여기서 나는 우리 사회 노동의 또 다른 풍경을 생각하게 된다. 노동자의 권리는 보호되어야 한다. 노동조합이 임금과 근로조건을 개선하기 위해 사용자와 교섭하는 것도 민주사회가 보장하는 중요한 권리다. 그러나 권리에는 책임도 따른다. 특히 대학은 일반적인 생산공장과는 다르다. 학생이 교육을 받는다. 교수가 연구하고 가르친다. 직원이 교육행정을 지원한다. 학생의 등록금과 공공재원도 투입된다.
그렇다면 대학노조가 자신의 근로조건을 개선하겠다고 요구할 때에도 한 가지 질문은 반드시 따라야 한다. 그 요구가 학생의 학습권과 교육서비스에 어떤 영향을 주는가. 주 4일 근무를 요구하는 것 역시 마찬가지다. 노조가 요구할 자유는 있다. 그러나 대학의 기능과 학생의 학습권을 위축시키면서까지 자신의 근무일수 단축을 관철하려 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다른 사람의 권리와 공공서비스의 희생을 전제로 자기 집단의 편익만 확대한다면, 그것은 노동권의 확장을 넘어 조직된 욕망으로 변질될 위험이 있다. 노동권이라는 이름이 모든 요구를 자동으로 정당하게 만들어주는 것은 아니다. 권리를 주장한다면 그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 전가시키는 비용도 함께 설명해야 한다.
그런데 최저임금조차 없는 사람들이 있다
이 장면의 반대편에는 또 다른 사람들이 있다. 지역사회 곳곳에서 활동하는 시민운동가들이다. 환경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뛰는 사람. 부당한 행정을 감시하는 사람. 약자의 민원을 대신 들고 관공서를 찾아가는 사람. 민주주의와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해 거리와 현장을 지키는 사람. 공익을 위해 하루 열두 시간, 열네 시간을 일하는 사람도 있다.
그러나 상당수 시민사회 활동에는 정해진 최저임금도, 퇴직금도, 유급휴가도 충분히 보장되지 않는 경우가 있다. 아프면 누가 대신 일해주는 것도 아니다. 야간에 주민에게 전화가 오면 받는다. 휴일에도 민원이 발생하면 현장으로 간다. 자신의 노동시간을 계산해 줄 사용자도 없다.
여기에서 나는 묻고 싶다. 한쪽에서는 조직된 힘을 바탕으로 노동시간을 더 줄이는 요구를 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최소한의 노동보호조차 제대로 받지 못하면서 공동체를 위해 일한다면, 우리는 노동의 정의를 무엇이라고 말해야 하는가. 이 질문은 노동조합을 없애자는 이야기가 아니다. 노동자의 정당한 권리를 약화시키자는 주장도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이미 권리를 조직할 수 있는 사람들뿐 아니라 권리를 조직할 힘조차 없는 사람들의 노동까지 보호하자는 것이다.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책임도 있어야 한다
사회는 권리를 확대해왔다. 그것은 문명의 진보다. 노동시간을 줄였다. 산업재해를 보호했다. 최저임금을 만들었다. 퇴직금을 만들었다. 육아휴직도 만들었다. 노동조합의 단체교섭권도 보장했다.
그런데 권리는 한 방향으로만 발전해서는 안 된다. 권리를 가진 집단이 더 많은 권리를 확보하는 동안 제도 밖에 있는 사람은 계속 자신의 몸으로 위험을 감당한다면 새로운 불평등이 생긴다.
그래서 경제민주주의에는 두 가지가 필요하다. 권리가 없는 사람에게는 권리를 확대해야 한다. 동시에 강한 권리를 가진 사람에게는 그 권리가 다른 사람에게 미치는 결과에 대한 책임을 요구해야 한다. 대학노조의 권리도 중요하다. 그러나 학생의 학습권 역시 중요하다. 공무원의 노동권도 중요하다. 그러나 시민이 받아야 할 행정서비스도 중요하다. 전문직의 권리도 중요하다. 그러나 그 서비스를 이용해야 하는 시민의 권리도 중요하다. 민주주의는 어느 한 집단의 권리를 절대화하는 제도가 아니다. 서로의 권리를 조정하면서 공동체의 책임까지 함께 나누는 제도다.
문제는 ‘차별’이라는 말보다 ‘설계’다
그래서 나는 자영업자 문제를 “자영업자는 차별받고 있다.”라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더 근본적인 질문이 있다. 우리 사회의 노동과 사회보험은 어떤 인간을 표준으로 상정하고 만들어졌는가. 오랫동안 그 표준은 분명했다. 회사에 다닌다. 사용자가 있다. 월급을 받는다. 사용자와 근로자가 사회보험료를 나누어 부담한다. 퇴직하면 퇴직금을 받는다. 실직하면 고용보험이 작동한다.
그런데 현실은 이미 달라졌다. 자영업자가 있다. 프리랜서가 있다. 플랫폼 노동자가 있다. 특수고용 형태가 있다. 1인 사업자가 있다. 시민사회 활동가도 있다. 한 사람이 노동자와 사업자의 경계를 오가기도 한다. 문제는 사람이 제도 밖에 있는 것이 아니다. 제도가 변화한 사람들의 삶을 따라가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AI는 이 문제를 더 크게 만들 수 있다
이제 AI가 등장했다. AI가 생산성을 높이는 것은 피할 이유가 없다. 똑같은 일을 더 짧은 시간에 할 수 있다. 기업의 비용도 줄일 수 있다. 새로운 사업도 만들 수 있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기업이 더 적은 인원으로 같은 일을 할 수 있게 된다면 고용은 어떻게 변할 것인가. 정규직으로 하던 일을 외주화할 수도 있다. 프리랜서에게 맡길 수도 있다. 플랫폼에서 일감을 나누어 줄 수도 있다. 한 사람을 직원으로 고용하지 않고 1인 사업자와 계약하는 방식도 확대될 수 있다.
그 순간 회사가 부담하던 위험 가운데 일부가 개인에게 넘어갈 수 있다. 퇴직금은 누가 책임지는가. 실업은 누가 책임지는가. 연금은 누가 책임지는가. 질병으로 일을 하지 못할 때 소득은 누가 책임지는가. 재교육 비용은 누가 부담하는가. AI 시대에 우리가 경계해야 할 것은 단순히 “기계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는다.”는 문제만이 아니다. 더 깊은 문제가 있다. 생산성의 이익은 기업과 자산소유자에게 돌아가는데 고용과 생계의 위험은 개인에게 이동하는 구조가 만들어질 수 있다는 것이다.
③회에서 ‘소유’를 물었다면, ④회에서는 ‘위험’을 묻는다
지난 ③회에서 나는 물었다. 누가 성장하는 자산을 소유하는가. 이번에는 그 반대편을 묻는다. 누가 성장 과정에서 발생하는 위험을 부담하는가. 두 질문은 하나다. 이익을 가져가는 사람과 위험을 부담하는 사람이 지나치게 분리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은 생산성 향상의 이익을 얻는다. 주주는 기업가치 상승의 이익을 얻는다. 노동자는 임금을 받는다. 시민은 소비자 편익을 얻는다.
그렇다면 기술혁신과 산업구조 변화 때문에 생기는 위험도 공정하게 나눠야 한다. 이익은 개인의 것이고 위험은 사회의 것인 구조도 옳지 않다. 반대로 이익은 기업과 자산소유자에게 집중되고 위험만 개인에게 떠넘겨지는 구조 역시 공정하지 않다. 경제민주주의란 결국 이익과 위험을 함께 묻는 것이다.
자영업자에게 또 빚을 주는 것이 대책인가
자영업자가 어려워지면 가장 먼저 등장하는 정책 가운데 하나가 금융지원이다. 정책자금을 빌려준다. 보증을 제공한다. 상환기간을 연장한다. 필요할 때가 있다. 그러나 대출에는 근본적인 한계가 있다. 대출은 지원금이 아니다. 언젠가는 갚아야 할 돈이다. 사업이 어려운 사람에게 다시 돈을 빌려준 뒤 “몇 년 뒤 갚으십시오.”라고 하는 것이 항상 재기의 대책일 수는 없다. 때로는 위험의 시간을 뒤로 미루는 것에 불과할 수도 있다.
그래서 정책은 한 단계 더 가야 한다. 폐업 이후 일정 기간의 소득안정. 재취업과 재창업으로 연결되는 교육. 연금 가입을 지속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 질병과 출산 때문에 일을 멈췄을 때 최소한의 소득을 보장하는 장치. 감당할 수 없는 채무를 조정하고 다시 경제활동을 할 수 있도록 하는 재기제도. 플랫폼이나 프랜차이즈 본부, 대형 유통업체와 협상할 수 있는 집단적 장치.
중요한 것은 사업 실패를 국가가 모두 책임지는 것이 아니다. 사업위험과 사회적 위험을 구분하는 것이다. 잘못된 투자판단으로 생긴 손실까지 국민에게 떠넘길 수는 없다. 그러나 사람이 병드는 것, 노후를 맞는 것, 일자리를 잃는 것, 한 번 실패한 뒤 다시 출발해야 하는 것까지 모두 개인의 책임이라고 말하는 사회도 정상적이라고 하기 어렵다.
사업에 실패해도 사람이 실패해서는 안 된다
한 사람이 30년 동안 가게를 운영했다. 어느 날 문을 닫았다. 그 사업은 실패했을 수 있다. 그런데 그 사람까지 실패한 인간이 되는가. 그럴 수는 없다. 다시 배울 수 있어야 한다. 다시 일할 수 있어야 한다. 아프면 치료받을 수 있어야 한다. 노후에는 최소한의 인간다운 삶을 살아갈 수 있어야 한다.
AI 시대의 경제민주주의는 기업의 성장률만 묻는 것이 아니다. 누가 자산을 소유하는가. 누가 위험을 부담하는가. 누가 결정하는가. 누가 이익을 가져가는가. 그리고 실패했을 때 누가 다시 일어날 기회를 갖는가. 이것까지 묻는 것이 경제민주주의다. 그래서 다시 처음으로 돌아간다. 사업에 실패한 것인가. 아니면 우리 사회가 너무 많은 위험을 한 개인에게 떠넘겨온 것인가.
만일 두 번째 질문에도 일리가 있다면 정책의 언어부터 달라져야 한다. “왜 실패했습니까.”에서 끝날 것이 아니다. “어떻게 다시 일어설 수 있게 할 것입니까.”를 물어야 한다. ‘사장님’이라는 이름 뒤에도 한 사람의 시민이 있다. 그 시민도 늙는다. 아프다. 아이를 키운다. 실패할 수 있다. 그리고 다시 시작하고 싶어 한다. 사업에 실패해도 사람이 실패하지 않는 사회. 그것이 AI 시대에 성장률보다 먼저 우리가 만들어야 할 성장의 기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