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연재 ⑦]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눅 11:30-37)》 강도 만난 자는 길가에만 쓰러져 있지 않다 ― 아스팔트 위의 스케이트와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
    • 발행인 조종건
      발행인 조종건

      우리는 너무 쉽게 말한다. 더 노력하라. 더 준비하라. 더 실력을 키우라. 실패하면 능력이 부족한 것이고, 뒤처지면 마음가짐이 약한 것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과연 모든 실패가 개인의 문제인가. 모든 좌절이 노력 부족의 결과인가.

      나는 이런 비유를 하고 싶다. 최고급 스케이트를 신고, 날까지 완벽하게 갈아놓았는데 바닥이 아스팔트라면 개인의 역량만으로 얼마나 달릴 수 있겠는가. 반대로 누군가는 자전거를 타고 잘 포장된 도로를 달리고 있다. 10m를 달릴 때는 개인 능력의 차이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10km, 100km를 달리면 그것은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운동장의 구조가 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도 이 시각에서 다시 읽어야 한다. 우리는 그동안 이 비유를 주로 개인의 자비와 선행의 이야기로 읽어 왔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았으면 도와야 한다는 교훈으로 받아들였다. 물론 맞다. 그러나 거기서 멈추면 부족하다. 예수의 질문은 더 깊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이 질문은 단지 불쌍한 사람을 도우라는 말이 아니라, 고통받는 사람 곁에 누가 멈추는가, 그 고통을 만든 길의 구조를 누가 보는가를 묻는 말이다.

      강도 만난 자는 오늘도 길가에만 쓰러져 있지 않다. 그는 공문 앞에 쓰러져 있다. 불허처분 앞에 쓰러져 있다. 변상금 통지서 앞에 쓰러져 있다. 강제집행 예고 앞에 쓰러져 있다.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이라는 긴 절차 앞에서 지쳐 쓰러져 있다. 겉으로 보기에는 멀쩡히 서 있는 시민처럼 보이지만, 실제로는 제도와 권력의 무게 앞에서 피를 흘리고 있다.

      우리는 그런 사람에게 너무 쉽게 말한다. “법적으로 다투면 되지 않느냐.” “행정심판을 하면 되지 않느냐.” “소송으로 가면 되지 않느냐.” 그러나 그 길을 걸어본 사람은 안다. 서류 한 장 쓰는 데 시간이 들고, 전문가 의견 하나 받는 데 돈이 들고, 회의록 한 줄을 분석하는 데 마음이 닳는다. 권리구제 절차는 제도상으로는 열려 있지만, 현실에서는 약자에게 또 하나의 여리고 길이 되기도 한다.

      오늘의 강도 만난 자를 외면하는 것은 행정만이 아니다. 때로는 시민의 이름을 내세운 조직도, 노동자의 권리를 말하던 조직도, 약자를 대변한다던 세력도 강도 만난 자의 곁을 지나간다.

      노동조합은 본래 강도 만난 노동자의 이웃이 되기 위해 존재했다. 임금 앞에서, 해고 앞에서, 위험한 노동환경 앞에서 홀로 쓰러진 노동자를 함께 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노조의 출발이었다. 그러나 일부 노조가 어느 순간 시민 위에 군림하는 위치에 서고, 공공성을 잊은 채 자기 조직의 이익만을 앞세운다면 그때 노조는 더 이상 선한 사마리아인이 아니다. 강도 만난 자를 구하는 조직이 아니라, 또 다른 권력이 된다.

      시민의 지지와 연대 속에서 성장한 조직이 시민을 불편하게 여기고, 자신을 구해준 사람들의 등에 비수를 꽂는 배신자의 모습으로 변질된다면 그것은 더 아픈 일이다.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겠다던 조직이 시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공공의 이름으로 받은 힘을 자기 기득권의 방패로만 쓴다면, 그 순간 그 조직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아니라 길을 지나치는 제사장과 레위인의 자리에 서게 된다.

      이 말은 노동조합 자체를 부정하자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노조가 정말 귀한 이유는 약자의 편에 설 때다. 노동자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만들어진 노조가, 어느 순간 대학 구성원이나 학생·시민 위에 군림하는 또 다른 권력이 될 때가 있다. 특히 일부 대학노조가 ‘약자의 권리’라는 이름을 내세우면서도 실제로는 조직 이익, 인사 영향력, 행정 통제력, 내부 기득권을 지키는 데 몰두한다면, 그것은 선한 사마리아인의 길이 아니라 제사장과 레위인의 길에 가까워진다.

      노동자가 다치고, 해고되고, 착취당하고, 목소리를 잃었을 때 노조는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나 노조가 약자의 언어를 빌려 시민 위에 군림하거나, 공동체 전체의 고통을 외면한다면 그때 우리는 물어야 한다. 그 조직은 아직도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아니면 강도 만난 자의 이름을 이용하는 또 다른 기득권인가.

      이때 필요한 것은 구경꾼의 동정이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결단이다. 사마리아인은 멀리서 불쌍히 여긴 사람이 아니다. 그는 가까이 갔다. 상처를 싸맸다. 자기 짐승에 태웠다. 여관으로 데려갔다. 돈을 냈다. 다시 돌아오겠다고 약속했다. 이웃사랑은 감정이 아니라 비용이었다. 이웃사랑은 말이 아니라 책임이었다.

      오늘의 교회와 시민사회도 이 질문 앞에 서야 한다. 행정의 벽 앞에서 지친 사람을 보면서도 “괜히 관여하면 불편해진다”고 지나가지는 않는가. 시민사회는 지원금과 공모사업 앞에서 작아지고, 지역언론은 광고비와 각종 사업관계 앞에서 질문을 멈추고 있지는 않은가. 교회는 이웃사랑을 설교하면서도, 정작 행정의 칼날 앞에 선 이웃에게 구제기금과 사람과 시간을 내어놓는 데는 주저하고 있지 않은가.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단지 쌀을 나누는 사람만이 아니다. 억울한 사람의 공문을 함께 읽는 사람이다. 회의록을 함께 분석하는 사람이다. 정보공개청구를 돕는 사람이다. 행정심판과 소송의 비용을 함께 나누는 사람이다. 행정이 내세운 절차가 정말 공정했는지 묻는 사람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사람들이 계속 쓰러지는 길 자체를 고치려는 사람이다.

      강도 만난 자는 길가에만 쓰러져 있지 않다. 오늘 그는 아스팔트 위에서 스케이트를 신고 넘어져 있다. 우리는 그에게 더 빨리 달리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그가 달릴 수 없는 바닥을 볼 것인가. 예수는 오늘도 묻고 있다.

      “너는 누구의 이웃이 되겠느냐.”

      그 질문 앞에서 교회와 시민사회, 언론과 정치, 행정과 시민, 그리고 노동의 이름을 내세운 모든 조직도 다시 대답해야 한다. 이웃사랑은 상처를 보고 멈추는 일이며, 정의는 그 상처를 만든 길의 구조를 바꾸는 일이다.
    Copyrights ⓒ 주간시민광장 & www.gohuman.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확대 l 축소 l 기사목록 l 프린트 l 스크랩하기
최신기사
         신문사소개  |   시민사회재단 소개  |   보도자료등록  |  개인정보보호정책  |  청소년보호정책  |  오시는길
대표자: 조종건 | 상호: 시민사회재단 | 주소: 경기도 평택시 비전4로 175, 708-202 | 신문등록번호: 경기도 아52894 | 등록일자 : 2021-05-18 | 발행인/편집인: 조종건 | 편집장:조종건 | 청소년보호책임자: 조종건 | 전화번호: 010-7622-8781
이메일: master@gohuman.co.kr
Copyright © 2021 주간시민광장.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