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평안교회 담임목사‧한국정신분석협회 전 회장)
인간은 좋아하는 사람과 자신을 본능적으로 동일시한다. 더 나아가 좋은 사람을 지나치게 좋은 사람으로 확대하고, 악한 사람은 더 확실하게 악마화한다. 과대평가와 평가절하, 선과 악을 극명하게 나눈다. 내가 동일시하고 있는 좋은 것들을 보호하려면 나와 다른 것은 더 악마화해야 하고, 선과 악의 간격을 더 많이 벌려놓아야 한다. 문제는 계속 같은 서사만 만들어 내고 같은 영상만 보고, 같은 글만 전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들은 어떤 체계 안에서만 사고한다. 이 체계를 벗어나는 일을 만나면 심한 혼동과 패닉에 빠져들게 된다. 때문에 그들에게 체계는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가 된다. 체계에 맞지 않으면 짜르고 재단해서 자기들에게 맞는 서사를 다시 만들어야만 한다. 이것이 음모론이다. 이들에게는 이쪽저쪽만 있다. 극우와 극좌다. 극우에서 극좌로 가던, 극좌에서 극우로 가던 구조는 똑같다. ◐↔◑. 이 둘 사이에는 얼음계곡과 불구덩이가 있을 뿐이다. 이 둘의 간극은 대화의 공간이 아니라 깊은 틈과 구렁이다. 헛디디면 천 길 낭떠러지로 떨어진다.
인간 정서의 뿌리를 파, 들어가 보면, 그 그 밑바닥에는 좋음과 나쁨, 곧 사랑과 미움이 있다. 우리, 모두는 이런 정서로 생을 시작했다. 자신에게 젖을 주고 생명을 연장해 주는 사람은 사랑 대상이고 그 외에는 모두 적이다. 이것이 밥그릇 싸움의 원형이다. 그러나 살아가면서 나쁜 대상에 ‘나쁨’만 있는 것이 아니고, 사랑 대상 안에 ‘좋음’만 있는 것도 아님을 경험하게 된다. 이것을 통합해 가는 과정이 인생이고 삶이다. 피해자 같은데 가해자고, 가해자이면서 피해자여서 미워할 수도, 좋아할 수도 없는 것이 삶이고 이것을 알아가는 과정에서 인격이 발달한다. 몇 년 전에 베스트셀러였던 정지아의 『아버지의 해방일지』라는 소설은, 빨치산 아버지의 장례를 치루면서, 아버지에 얽힌 사연들을 잔잔히 풀어내는 이야기다. 빨치산은 뿔 달린 악귀도 아니었고 빨강색도 아니었다. 작가는 이 소설에서 그녀의 아버지는 그냥 따뜻한 온기가 흐르는 평범한 인간이었고 민족 분단의 상황이 만들어 낸 이념과 허구의 희생자였다고 역설한다.
문제는 사랑과 증오라는 원초적인 정서만으로는 대화의 공간이 열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런 원시적인 감정은 호불호가 뚜렷하여 투쟁적이 될 수밖에 없다. 인간이 되려면 이 좋음과 나쁨을 적절히 배합하여 다른 정서들을 만들어 낼 수 있어야 한다. 사랑과 미움이 어떤 비율로 조합되느냐에 따라 환희, 우울, 체념, 기쁨, 절제, 온유, 화평, 희락 등의 정서로 변형된다. 이런 정서는 우리의 삶을 정치, 문화, 예술의 공간으로 데려간다. 이런 정서가 없을 때 나오는 것이 광기다. 광기는 모든 공간이 사라지고 평평한 표면들의 세계에서 미끄러지는 것이다. 미친 사람은 모든 것이 정지해 있는 화석화된 세계만을 본다. 점과 선도 있고 면도 있다. 그리고 이것들로 이루어진 입체도 있다. 색채도 검정과 흰색만 있는 것이 아니다. 흰색과 검은색의 다양한 비례에 따라 명암이 만들어지고 원근감과 부피감도 만들 수 있다. 이 외에도 무수한 색채들의 조합이 있다.
안철수는 이번 선거에서 이준석과 단일화를 설득하기 위해 조조의 100만 대군을 유비와 손권의 연합으로 물리친 것과 비교했다. 어떤 방법으로든 이기면 되는 것이고 이것이 정의다. 국회의원 300명이면 5천만 국민의 몇 퍼센트가 될까? 국민을 위한 정치가 사라지고 그들 극소수만을 위한 권력 게임, 곧 그들만의 밥그릇 싸움을 국민들은 걱정어린 눈으로 바라보고 있다. 그들은 온갖 현란한 구호와 이데올로기 속에 자신들의 욕망을 감추고 있다. 연일 “사랑하는 국민 여러분”이라고 한다. 그들이 나를 사랑한다고 한다. 그런데 나는 그들에게 사랑 받아본 적이 없다.
요즘 어디를 가도 정치 이야기를 꺼내지 않는 것이 예의다. 자칫 싸움으로 번져 관계가 단절되거나 심하면 원수가 되기 때문이다. 지금 나라가 이 꼴인데 어떻게 당신은 극우가 아닐 수 있냐며 육두문자를 날린다. 자신만 정의의 사도다. 이들이 사용하는 용어들은 모두가 추상적이다. 그러나 국민들은 모든 것을 피부로 감지한다. 갑자기 오른 물가에 당황하며 상품을 집었다 놓았다 하며 몸으로 표현한다. 그 몸속에 비명소리가 있음을 정치가들은 감지해야 한다. 인간은 추상적인 언어보다는 만나야 하고, 서로의 얼굴을 보아야 하고, 냄새를 맡고 체온을 느껴야 한다. 카페에서 정치와 같은 거대한 주제가 아닌 사소한 일상을 나누며 구수한 커피 향과 분위기를 향유하면서 행복을 느끼는 것이 국민이다. 이런 것도 누릴 수 없다면 정치가 왜 필요한가? 누가 권력을 잡은들 5년 만에 무엇을 바꿀 수 있겠는가? 세계 정세를 좌지우지 할 수 있는 트럼프, 푸틴도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이 없지 않은가? 국민들은 싸움을 싫어한다. 그래서 입을 다물고 있다. 때문에 국민들은 우울하다. 이 우울을 말로 풀어낼 공간이 없다. 국민들에게 평범한 일상이 사라졌다. 국민들은 정치를 걱정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