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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현종호 |
(제6회)-7
“日本之人變詐萬端(일본지인 변사만단)
自古未聞守信之義也(자고미문수신지의야)”
시종 차갑게 울어대는 칼을 이순신은 애써 달랬다. 이 나라 조선을 장기판의 졸(卒)로 부려먹는 담종인이 괘씸하기 이를 데 없었으나 대의를 생각하면, 울분을 애써 참아야 했다. 대의를 위해서라면, 막말로써 무턱대고 그자에게 따져 묻는다고 될 일이 아니었다. 곽란으로 끙끙 신음하며, 기진해져 자꾸 늘어지는 몸을 그는 몇 번이고 다시 추슬렀다. 장고 끝에, 기진맥진해진 몸을 줄곧 추슬러, 담종인에게 최소한의 예를 갖춰 성토하는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을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은 마침내 완성한다.
“……왜놈들은 간사하기 이를 데 없어 예로부터 신의를 지켰다는 말을 나는 여태껏 들은 적이 없습니다. 흉악하고 교활한 왜적들이 아직도 포악한 짓을 멈추지 아니하고 곳곳으로 쳐들어와 살인하고 약탈하기를 전보다 갑절이나 더하니, 그놈들이 병기를 거두어 바다 건너 본국으로 돌아간다는 뜻이 과연…… 어디에 있겠습니까…….”
어두워져서 그는 팽성으로 갔다. 평택현 이내은(李內隱)의 손자 집을 찾아가 어쩔 수 없이 하룻밤 머물렀는데, 주인이 매우 친절하였다. 홀로 자는 방이 몹시 좁고 추웠지만 하도 뜨겁게 불을 때서 땀이 줄곧 흘러내릴 정도로 방이 따뜻하다 못해 뜨거웠었다.
해가 떠오르기가 무섭게 집주인에게 간단한 사의를 표하고 이순신은 곧장 아산을 향해 길을 떠난다. 아산 음봉의 ‘어라산(於羅山)’이 점점 가까워질수록 가슴이 자꾸만 턱 막혀왔다. 만신창이가 된 몸과 흐려진 의식을 거듭 추슬러가며 그는 선산(先山) 부친의 산소를 겨우 찾아간다. 누더기 백의의 몸으로 부친께 절하며 이순신은 줄곧 통곡하였다. 서러움이 북받쳐 곡을 하며 한참 동안을 일어나지 못한 채, 부친의 산소 앞에서 그는 시종 눈물만 떨구었다. 산소 주변의 수목들이 말라 비틀어져서 부친의 무덤을 차마 눈으로 볼 수가 없었다.
남양 아저씨가 돌아가셨다고 했다. 저물녘에 처가에 이르러 장인과 장모의 신위 앞에 절하고 작은형 요신(堯臣)과 제수의 사당에도 올라갔었다. 다음 날엔 친척과 친지들, 친구들이 찾아와서 술로 회포를 풀고 갔고, 또 다음 날엔 금부도사 이사빈이 와서 이순신은 나름 성심껏 그를 대접했다. 이사빈은 흥백(興伯) 변존서(卞存緖)의 집에서 잤다.
이튿날 아침에 남양 아저씨 영전에 곡하고 나서 상복으로 갈아입었다. 동네 사람들이 술병을 들고 또 찾아와서 위로해 주기에 거절하지 못하고 이사빈과 술자리를 함께하며 몹시 취해서 헤어졌는데, 금부도사 이사빈은 술을 많이 마셨으나 흐트러짐이 하나 없는 자였다.
새벽 꿈이 하도 불길하고 어지러워서 한나절 내내 어머니와 가족의 안부가 걱정돼 불안하기 짝이 없었다. 옥에 갇혀 고생한 자식을 기어이 만나보겠다며 83세의 노구(老軀)를 이끌고 여수에서 배로 올라오고 있다는 어머니가 종일 걱정되고 불안한 마음을 떨쳐낼 길이 없었는데, 종 순화(順花)가 배를 타고 찾아와선 모친의 부고를 그에게 전하는 것이었다. 하늘이 갑자기 캄캄해지는 순간이었다. 백의종군하는 죄인 이순신은 밖으로 뛰쳐나가 주먹으로 가슴을 쳐대며 발만 그저 동동 굴렀다.
정유년(1597년) 4월 11일, 맑음.
새벽꿈이 하도 심란하여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었다. 덕이를 불러서 대강 이야기해주고 아들 울(蔚)에게 또한 말해주었다. 몹시 침울하여 취한 듯, 미친 듯 마음을 가눌 수가 없으니, 이 무슨 징조란 말인가. 병드신 어머니를 그리워하는 마음에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렀다. 사내종을 보내어 어머니의 소식을 듣게 하였다. 금부도사는 온양으로 돌아갔다.
정유년(1597년) 4월 13일, 맑음.
일찍 식사하고 나서 어머니를 만나 뵐 일로 바닷가 길로 나갔다. 가는 도중에 홍찰방 집에 들렀을 때만 해도 배가 온다는 소식이 없었는데, 얼마 후 종 순화(順花)가 와서 어머니의 부고를 전하는 것이 아닌가. 달려나가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며 슬퍼하니 하늘의 저 해조차 캄캄해 보였다. 곧바로 해암(蟹巖, 아산시 인주면)으로 달려갔더니 배는 벌써 와 있는 것이었다.
길에서 바라보며 가슴 찢어지던 비통함을 이루 다 적을 수가 없다.
“어머니마저 떠나가시면 저는 이제 앞으로 어쩌란 말입니까, 어머니…….”
백의의 몸으로 이순신은 서럽게 울부짖었다. 어미를 잃은 맹수의 울음과도 같은 그의 처절한 절규가 산천을 흔들었다. 먹구름이 갑자기 몰려온 하늘이 비를 한껏 뿌렸다.
정유년(1597년), 4월 19일, 맑음.
일찍 나와서 길에 올랐다. 어머니의 혼령을 모신 자리에 하직을 고하고 울부짖으며 곡하였다.
“어찌하랴. 어찌하랴. 천지 사이에 어찌 나와 같은 사정이 있겠는가. 빨리 죽는 것만 못하구나.”
조부 이백록(李百祿)이 국상 중인 줄 모르고 혼례를 치르는 바람에 몰락한 덕수 이씨 가문이었다. 이순신의 5대조 이변은 중국어에 유창하여 세종대왕의 총애를 받던 영중추부사였고, 그의 증조부 이거(李琚) 역시 성종 때 연산군의 스승이었을 정도로 한창 잘 나가던 명문가 문신 집안이었는데, 기울어가는 가문의 몰락은 누구도 어쩔 수가 없었을 것이었다. 개혁가 조광조의 몰락과 더불어 졸지에 무너져버린 가문을 되살리려고 그의 어머니는 어느 날 갑자기 한양에서 무인 집안 친정 아산으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보성군수를 지낸 이순신의 장인 방진(方震)은 무인이었다. 어머니의 그런 결단으로 이순신은 무신 방진의 여식과 21세에 결혼하였고, 무과에 거듭 응시하여 결국 무인이 될 수 있었다. 둘째 아들을 먼저 잃고, 남편을 먼저 떠나보내고, 첫째 아들을 잃어가면서까지도 물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흔들리지 않았던 어머니. 그가 정읍 현감으로 부임하자 식솔들을 이끌고 정읍으로 선뜻 이주해올 정도로 당신의 손주들을 또한 끔찍이 아꼈던 모친. 당신의 안타까운 그 혈육이 누군가의 모함으로 옥에 갇혔다는 말을 전해 듣고는 그의 모친은 그러나 식음을 전폐하고 며칠 내내 끙끙 앓기만 했다. 극구 만류하는 사람들을 기어코 뿌리치고 막내 우신(禹臣)에게 뒤를 맡기며 그의 어머니는 마침내 상경을 선언한다.
“내 관을 먼저 짜거라! 내가 죽어서 아들이 살아난다면 마땅히 난 죽을 것이다……!!!……”
화물을 싣고 남해를 돌아 서해로 향하는 배를 얻어 타고 올라오던 어머니였다. 법성포에 이르러 흔들리는 배 안의 어둠 속에서 웅크린 채로 주무시다가 닻이 끌려가 배가 떠내려가는 바람에 그의 모친이 결국 숨을 거두고 한 움큼의 싸늘한 주검으로 돌아온 것이다.
후회하고 원망할 것도 없는 한 인생. 장군의 길은 그러나 그에게 분명 잘못된 선택이었다.
기울어가는 나라 위한답시고 긴 칼 옆에 차고 저릿한 바닷바람 맞으며 연로한 어머니 홀로 내버려 둔 채 안하무인으로 여태 살아왔네. 어지러운 나라 구한답시고 외로운 어머니와 혈육 무시한 채 적의 팽팽한 바다에 유황 줄곧 뿌려대며 천방지축으로 설쳐왔네.
기회가 다시 주어진다면 미천한 이 몸 다시 태어난다면 창에 든 새벽달과 별이나 보며 가난한 농부로 초야에 묻혀 평생을 죽어지내더라도 불쌍한 내 어머니 이젠 극진히 모시며 살아가리다. 어머니여…… 이 못난 불효자식을 용서하옵소서…….
찰방 홍근우와 별좌 이숙도가 찾아와서 곡을 하며 상을 당한 그를 위로하였다. 관은 본영에서 준비해왔는데, 조금도 흠난 데가 없다고 했다. 늦어서 입관하는데, 오종수(吳終壽)가 성심을 다해 상을 치르게 해주니 뼈가 가루가 되도록 잊지 못할 고마움이었다. 금부도사 이사빈(李士贇)은 더는 길을 재촉하지 않았다. 천안군수 이유청이 찾아와 조의를 표하며 장례를 준비해주고, 전경복(全慶福) 씨가 상복 만드는 일 등에 정성을 다해주니 불효자 이순신은 그저 감사하기 한량없을 뿐이었다.
배를 끌어 중방포로 옮겨 대고, 영구(永久)를 상여에 실어 본가로 돌아가 그때에서야 비로소 그는 빈소를 차렸다. 비가 억수로 퍼부었다. 기진맥진해진 데다 남쪽으로 가야 할 일이 또한 급하니, 하염없이 흐르는 눈물이 그저 앞을 가릴밖에. 그는 오직 어서 죽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무수한 생명의 무수한 죽음을 무수히 보며 흔들리지 않는 정신력으로 매번 적들을 물리쳤고, 형틀에 몸이 찢기고 뼈가 으깨어지면서도, 절망의 절벽 앞으로 수차례나 몰려서도 단 한 번을 좌절하지 않았던 조선의 장군 이순신. 찬 이슬, 찬바람에 더 단단해지는 돌덩어리와도 같았던 불멸의 이순신 장군. 물가에 심어져 억척스러운 생명력으로 꿋꿋이 버티는 소나무처럼 구부러질지언정 꺾이지 않았던 조선의 수군 총사령관 이순신. 그러나 어머니마저 떠나버린 지금의 이 비루한 현실에서, 산다는 것 자체가 그에겐 무의미했다. 인간의 한살이라는 생로병사(生老病死)의 숭고한 여정마저도 그에겐 어쩌면 무의미한 장난일 것이었다.
천안 군수 이유청이 심심한 위로의 말로 작별을 고하며 천안으로 돌아갔다.
금오랑의 서리 이수영이 공주로부터 와서 길을 재촉했다. 중죄인 이순신은 모친의 초상도 제대로 치를 수가 없었다. 그는 모친의 신위(神位)에 절하고 작별을 고하며 서럽게 울부짖었다.
“천지 사이에 나와 같은 일이 어찌 또 있겠는가! 빨리 죽느니만 못하구나……!!!”
어미를 잃은 짐승의 울음과도 같은 그의 울음이 천지를 뒤흔들었다.
【편집부 해설|제6회-7】
제6회-7은 ‘영웅 이순신’에서 ‘아들 이순신’으로 전환되는 결정적 장면이다. 전장에서의 사령관이 아니라, 부모님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지는 한 인간의 나약함과 슬픔이 드러난다. 특히 세 가지 축이 뚜렷하다.
1) 정치적 굴욕과 분노 – 금토패문
담종인은 명나라 권위를 가장하며 조선 수군에게 “더 이상 왜군을 공격하지 말라”는 패문을 보내온다. 이순신은 울분을 참으며 대의를 잃지 않는 방식으로 이를 반박한다.
→ 외교적 굴욕 속에서도 원칙을 지킨 지휘관의 내면이 드러난다.
2) 백의종군 중 모친의 죽음 – 절대적 파열
억울한 옥살이, 백의의 신분, 죄인의 몸. 그런데 어머니마저 자신을 보러 오다 배에서 돌아가셨다. 이순신의 절규는 영웅의 울음이 아니라, 살아갈 의미마저 잃은 비통한 아들의 울음이다.
3) 가문의 몰락과 개인의 부재
충절의 명문으로서의 집안은 이미 무너졌고, 어머니는 가문을 일으키려 일생을 바쳤다. 그런 어머니를 지켜주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이순신을 완전히 무너뜨린다.
【본문 용어 해설】
■ 일본지인 변사만단(日本之人變詐萬端) Japan is full of deceit: “일본인은 온갖 모략과 기만에 능하다”는 의미의 문장.
■ 자고미문수신지의야(自古未聞守信之義也) never heard of their keeping faith: “예로부터 신의를 지킨 사례를 들은 적 없다”는 한탄.
■ 시종 차갑게 울어대는 칼 (—) the sword ringing cold: 분노로 떨리는 내면의 상징적 묘사.
■ 답담도사종인금토패문(答譚都司宗仁禁討牌文) Reply to T’an Zongyin’s ‘Order to Stop Attacks’: 담종인의 금토패문(공격 중지 명령)에 대한 이순신의 공식 답문.
■ 평택현 이내은의 손자 집(平澤縣 李內隱) house of Yi Nae-eun’s grandson: 평택 지역 명문가 출신 인물의 후손 집. 이순신이 묵었던 곳.
■ 사의(謝意) gratitude / appreciation: 예를 갖춘 감사 인사.
■ 어라산(於羅山) Eora-san: 아산 음봉면의 산. 이순신 부친 선산이 있는 곳.
■ 신위(神位) ancestral tablet: 제사 때 모시는 조상의 자리 또는 위패.
■ 금부도사 이사빈(金部都事 李士贇) Office of Royal Investigations officer Lee Sabin: 조선 최고 사법기관(금부)의 도사. 죄인 이순신을 호송하던 관리.
■ 흥백 변존서(興伯 卞存緖) Byun Jon-seo: 아산 지역 인물. 이사빈이 묵은 집의 주인.
■ 해암(蟹巖) Haeam: 아산시 인주면의 포구 지명. 이순신 모친의 시신이 도착한 곳.
■ 하직(下直) farewell bow: 조상·어른 앞에서 마지막 인사를 올림.
■ 중방포(中防浦) Jungbang-po: 아산 인근 포구. 이순신이 모친의 영구를 옮긴 지점.
■ 영구(永久) coffin / bier: 고인의 관(棺) 또는 운구한 관.
■ 한살이라는 생로병사(生老病死) life cycle — birth, aging, sickness, death: 인간의 피할 수 없는 삶의 네 과정.
【현대적 의미|제6회-7】
1) “국가를 위한다”는 말의 대가
이순신의 모친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죽음을 무릅쓰고 길을 떠났고 이순신은 ‘국가를 위해’ 가족을 잃었다. 국가주의·공적 책임이 개인의 삶을 파괴하는 극단적 예다. 오늘날도 한국 사회에서 ‘국가·조직을 위해 희생’이라는 말은 여전히 작동한다.그러나 그 희생의 비용은 언제나 특정 개인에게 집중되어 왔다.
2) 양심과 책임의 리더십은 반드시 고독하다
이순신은 담종인의 부당한 요구를 알고도 화를 터뜨리지 않고 ‘대의를 위한 방식’으로 대응했다. 진짜 리더십은 분노를 터뜨리는 것이 아니라 감당하는 힘에서 나온다.
3) 부모 돌봄과 공적 의무의 충돌
이순신의 절규는 오늘 우리의 질문과 닮아 있다.
“가족을 돌보면서 공적 책임을 다할 수 있는가?”“둘 가운데 하나를 선택해야 하는 사회가 정상인가?”
그의 이야기는 공적 의무와 개인의 삶이 균형될 수 있는 사회가 필요함을 상기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