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하식 박사, 글로 남긴 ‘인도’ 비전트립(2회)】 인도인이 견딘 식민사
    •  조하식 칼럼니스트 기독교철학박사
      - 조하식 (칼럼니스트, 기독교철학박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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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실시간의 일정을 기도로 일관하는 가운데 울려 퍼지는 찬양의 울림은 각자 모국어가 있어 새 힘을 솟구치게 한다. 그래서 서툴기 짝이 없는 영어(Konglish)에도 불구하고 차분한 우리말이나 길고 유창한 현지어(Tenglish, 텔루구어+잉글리시)나 간에 혀의 둔함과 짧음에 상관없이 언제든 엎드려 흉금을 터놓고 기원하는 참이리라. “오 주님! 연약한 제가 두 마음을 품지 않는 가운데 부디 영적 분별이 있도록 도와주소서!” 해가 중천에 뜬 10시가 되어서야 인도산 마와 찐 감자로 식사를 때우고 또다시 걸음을 재촉했다. 아침이 시원찮으니 기동이 힘들다는 이 선생. 아닌 게 아니라 이럴 줄 알았으면 일전에 쿠마 목사가 권하던 인근 호텔의 별식이라도 응할 걸 하는 생각이 들었다. 동네를 빠져나오다 기사가 어귀에 차를 멈췄다. 사거리를 차지한 500여 평의 논배미를 보여주기 위해서였다. 쿠마는 이곳에 장차 교회와 학교, 병원과 요양시설을 짓고 싶다는 뜻을 밝혔다. 영적 치유와 육적 돌봄을 병행하며 교회 부설 학교를 통한 정신적 양육까지 베풀어 보리라는 포부였다.

        가는 도중에 만난 인도식 극장. 허름한 단층 건물의 외벽은 온통 홍보 벽보로 도배되어 있었다. 늙은 과부들을 위한 양로원과 기독교인이 운영하는 탁아소도 지나쳤다. 그동안 훑어본 건축물 중에는 가장 번듯한 편이었다. 갑자기 길이 막혔다. 커다란 시골 장터. 거기서 스피커로 알리는 힌두교 특별 집회 소식은 시끌벅적한 뉴스였다. 사고파는 물건들을 유심히 살폈다. 우리네 저잣거리와 별반 다르지 않은 품목. 신발, 과일, 기름, 약품, 그림, 공구, 새총, 씨앗, 과자, 주물, 채소, 자전거, 생닭, 그릇 등을 노상에 얼기설기 진열했다. 얼마쯤 가다가 기사가 지프를 세웠다. 매사 나서길 좋아하는 동생 쿠마가 억센 억양의 영어를 남발했다. 남궁 선생이 ‘Slowly, slowly’를 반복한 끝에 가까스로 해석을 시작했다. 세금고지서를 검열하는 검문소. 언뜻 봐서는 도저히 사무실로 여겨지지 않는 임시막사였다. 기사가 들고 온 납세 증명서를 돌려보았다. 인도에서는 운전기사를 엔지니어로 구분했다. 노모를 모시고 처자와 함께 성실하게 살아가는 가장. 늘 웃음을 잃지 않으려는 태도가 보기에 미더웠다. 어쨌거나 3명의 동승자들은 덩달아 신이 났다. 자동차를 대절해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는 여정의 하루해가 짧고 아쉬운 모양이다.

        오전 11시쯤 ‘궈루콴타’시에 들어섰다. 초입에 우뚝 시바신상이 있었다. 채 사라질 만하면 하나씩 나타나는 동상들. 도처에 널린 우상단지로 인해 인도인의 영혼은 좀먹어 들어간다. 그럴수록 우리는 예수그리스도를 찬송하는 목청을 높였다. 복음성가 부르기를 멈춘 다음 남궁 선생에게 도움을 청했다. 주제는 대화를 통해 확인한 쿠마 목사의 대영 식민사관. 1세기(1859~1948) 가까운 영국 통치를 인도의 지식인은 어찌 평가할까. 답변은 뜻밖이었다. 그에게 있어 영국인은 인도 땅에 복음을 전해준 고마운 자들이었다. 자신은 이러한 조국의 근대사가 전적으로 하나님의 뜻이라고 믿는다는 것. 아울러 국토 곳곳에 도로를 개설한 공로 또한 크다고 긍정했다. 해가 지지 않는 나라의 통치술이 겉으로는 ‘균형과 형평’이었기에 상당 부분의 성취들이 가능했다며 지배자들을 두둔하려는 기조였다. 17세기 초 동인도회사를 설립해 동양 침략의 교두보를 확보하려 했던 교묘한 음모와 가렴주구식 착취에 대해서는 더 이상 캐묻지 않았다. 하지만 대제국의 이데올로기가 또 다른 형태의 악질적 카스트(caste)를 만들어 내지는 않았는지 진한 의구심마저 들었다. 일제 식민사관뿐만 아니라 강자를 향해 분개하는 약자의 지나친 피해의식인지는 몰라도.

        무엇보다 중요한 사실은 동족의 무지와 게으름으로 인해 마냥 무능력으로 허우적댈 때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1869~1948)는 끈질긴 법리로 맞서 초지일관 비폭력을 통해 끝내 영국을 몰아냈다는 지점이다. 손수 물레를 돌리며 영국 상품의 불매운동(스와라지운동의 한 방편)을 전개하여 홀로서기[自立]를 호소하면서도, 단 한 사람의 인명이나 인격을 훼손하지 않으려고 침략자의 재산까지도 보호하고 존중했던 그였다. 따라서 시인 타고르는 그를 가리켜 ‘위대한 영혼(Mahatma)’이라고 드높이 칭송하지 않았던가. 그런 연고로 필자는 이따금 부질없는 역사적 가정에 빠지곤 한다. 간디가 힌두이즘의 신봉자이고 철저한 종교 다원주의자였음을 모르는 바 아니로되 그가 만약 복음으로 무장하고 대영제국에 대항했더라면 인도의 현대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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