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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칼럼니스트•문인, Ph.D.) - |
----------과거사를 소환한 기억----------
짧게 주어진 자유시간. 한 시간 정도로는 하도 볼거리가 널려 한시적인 시공이 안타까웠다. 서둘러 야외 사진 전시장을 둘러본 뒤 차 없는 거리가 궁금해 뒷골목을 걷자니 버거킹 앞에 쓰레기들이 널브러져 있었다. 볼썽사납게 나뒹구는 음식 찌꺼기 및 껌딱지와 담배꽁초. 그보다 미합중국의 그늘진 얼굴은 매번 총기사고에 의한 인명 살상에서 일그러지곤 했다. 화장기 짙은 NBC 여성 기자가 리포트를 진행하고 있었다. 때마침 TV에 맞닿은 Radio-city 건물 앞으로 시내 투어버스가 지나갔다. 대뜸 유럽에서 보았던 각 나라의 국기는 보이지 않아 가이드에게 물은즉 원래부터 통역 서비스는 영어 하나뿐이고, 요즘 들어 새 차로 교체하는 중이란다. 세계적 명소인 타임스 스퀘어 가든(Times Square Garden). 삼각형 교차로에 걸린 삼성과 LG의 번쩍이는 광고판을 대하니 내심 위로가 되었다. 타임스퀘어란 이름은 초기에는 롱 에이커 스퀘어로 불리다가 1903년 뉴욕타임스가 이곳으로 옮겨오면서 근방에 극장, 영화관, 레스토랑 등이 줄줄이 들어섰단다. 전반적으로는 그다지 화려하지 않은 도심 외형. 패션가라고 알려진 상가와 금융가를 걸어 보았지만 별반 감동은 없었다. 한국 TV에도 소개된 바 있는 길거리연예인의 공연. 모여든 이들의 눈빛은 반짝였지만 기억에 남아있는 건 없다. 욕심껏 다운타운까지 반경을 넓혀 뮤지컬 극장가를 돌다가 갑자기 몰려든 인파에 파묻히고 말았다. 유럽의 여타 선진국과는 달리 도심 한복판에도 대형버스 주차를 허용했기 망정이지 하마터면 약속을 어길 뻔했다.
일행을 태운 리무진은 짐짓 14,000개의 크리스털 계단으로 지은 건물을 거꾸로 장식한 원형샹들리에 옆구리를 서행하고 있었다. 명실공히 영국의 소더비 경매장과 더불어 쌍벽을 이루는 크리스티 경매장. 전 세계 예술품을 사고파는 곳을 벗어나 첼샤 부둣가를 향해 내달렸다. 허드슨강을 끼고 달리는 자전거도로 겸 조깅 코스. 앞서 소개한 하저터널을 빠져나오자마자 나타난 네 동의 주황색 건물은 한껏 이채로웠다. 분명히 문틀은 있는데 창문이 없고, 창틀은 있는데 유리창이 없는 형상. 알고 보니 팬을 돌려 먼지를 빨아들이는 무인 빌딩이었다. 눈앞에 나타난 건 블루클린 브리지의 석조 현수교. 가이드는 기다렸다는 듯 거기에 깃든 아름다움을 극구 칭송했다. 하지만 문외한이 보기엔 크기만 클 뿐 솔직히 무엇이 그리 대단한지 잘 모르겠는 조형물. 그보다는 한미우호통상조약을 맺기 위해 방미한 ‘서유견문’의 저자 유길준이 민영익, 홍영식과 함께 바로 이 다리의 개통식에 참가한 대목이었다. 당시 태평양의 거센 풍랑을 헤치고 대서양의 파고를 가르며 당도했을 그들의 사투가 떠올랐다. 한 치 앞을 내다볼 수 없던 구한말의 격동기에 쓰러져 가는 나라의 명운을 짊어지고 뛰어다닌 젊은이들의 노고는 끝내 수포로 돌아가고 급기야 왜인들에게 35년이나 주권을 빼앗긴 설움을 소환하니 그야말로 격세지감이 들었다.
뉴욕주와 490km를 나란히 흐르는 허드슨강물은 흙빛이었다. 그 위로 띄우는 유람선을 탔다. 비좁은 의자를 비집고 아내와 마주 앉아 배 이름을 보니 ‘Spirit Cruises of New York’. 진정 그러하다. 정신을 순항하는 일만큼 긴요한 일은 없을 것이다. 배 한가운데 사회자가 나타났다. 이 선박은 국가가 검정한 바, 구명조끼가 준비되어 있어 안전하며 전 좌석이 금연석이니 유의해 달라는 멘트[announcement]. 곧바로 시끄러운 노랫가락이 이어졌다. 크루즈에서 활약하는 가수들은 대부분 브로드웨이의 조연급. 그렇게 한동안 귀가 따갑도록 연주는 계속되었다. 저만치 뵈는 스포츠센터 뜰에서 일광욕을 즐기는 남녀들. 너나 할 것 없이 자외선을 피한다고 야단법석을 떠는 우리네와는 동떨어진 풍경이다.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치솟은 골프 연습장 그물은 목하 성업 중. 강변을 오가는 차량 행렬만 분주했다. 을씨년스런 수상가옥을 철거한 뒤 그루터기처럼 남긴 통나무 대가리. 눈살을 찌푸리게 하건 말건 물살을 가르는 뱃전 옆으로 쌍쌍이 카누를 저었다. 알맞게 그을린 얼굴에 흐르는 평화의 기운. 자족감으로 뭉친 자아보다 행복한 존재가 있을까. 시야에 들어온 느릿느릿한 움직임은 8시간을 담보한 채 날품을 파는 노동자들이었다. 웬일인지 옵션에 들어있던 식사를 거저 내주나 했더니 아니나 다를까 나중에 결산하잔다. 팁은 딴 데 두 배인 2달러씩, 말하자면 메뉴야 어찌 되었건 20불짜리 뷔페를 즐겼으니 응당 10%를 물라는 주문이렷다. 여기 종업원은 수입의 상당 부분을 세금이 없는 팁으로 보전받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