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지평안교회 담임목사‧한국정신분석협회 전 회장)
경기를 관람할 때, 응원할 팀은 이미 누구에게나 정해져 있다. 자기 팀 경기가 엉망이라고 진영을 바꾸지는 않는다. 한국과 일본의 축구를 보면서 자신을 중도라고 이야기하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아마 일본이 아닌 외국 사람일 것이다. 중도는 경기에 아무런 흥미를 느끼지 않는다. 공이 상대 진영 골대를 뚫고 들어가는, 그 순간의 흥분은 얼마나 자극적이던가? 이것은 자신 안에 있는 공격 본능을 상대방에게 밀어 넣고 자기 내면의 파괴성을 비워낼 때 오는 쾌감이다. 과거 로마의 시민들도 검투사 경기를 통해 이런 자극들에 중독되었었다. 게임에 승리한 검투사는 황제의 지시를 기다리고 황제는 시민들의 반응을 살핀다. 군중들의 죽이라는 함성과, 살리라는 외침 중, 어느 쪽 소리가 더 큰지에 따라 황제의 엄지손가락은 위를 향하거나 아래로 내려간다. 이것이 패배한 검투사의 운명이었다. 지금도 이러한 원시성이 사라진 것은 아니다. 우리는 지지하는 선수(정치가)를 앞세워 우리 마음 안에서 일어나는 전쟁을 대리 수행하고 있다. 누군가 자신은 진영에 관계없이 객관적이고 균형을 갖추고 있다고 말한다면, 그는 거짓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인간은 누구나 좌편향과 우편향, 어느 한쪽으로 기울어져 있다. 아무리 좌우 논쟁의 역사와 정치에 대한 해박한 지식을 가졌을지라도 마찬가지다. 물론 종교, 문화적⦁지적 배경 등의 영향을 무시할 수는 없다. 그러나 국민들은 정치 지식으로 좌우를 판단하지 않는다. 국민들에게도 그들의 편향이 있고, 좌우는 대략 5:5의 비율로 나누어져 있을 것이다. 그렇다면 이번 선거의 승패는 어디에서 판가름 날까?
C.S. 루이스는 『순전한 기독교』에서 일정한 방향성을 갖고 있는 애국심, 모성애, 성, 식욕 등의 본능 외에, 물에 빠져 위험에 처한 사람에게 달려가 도우려는 ‘집단 본능’이 있음을 말한다. 그러나 위험한 자를 돕다가 오히려 자신이 위험에 빠질 수 있다. 이 때 피하고 싶은 본능이 올라온다. C.S루이스는 이것을 ‘자기보존 본능’이라고 했다. 그럼에도 인간은 자기보존본능을 억누르고, 위험에 처한 자를 도와야 한다는 음성을 듣게 된다. 그는 이것이 도덕률이 아니겠냐고 말한다. 축구 경기를 관람할 때 한국 팀을 응원하는 것은 애국심이다. 그럼에도 한국 선수가 상대에게 부당하게 폭력을 행사한다면 “저건 아닌데....?”하는 도덕 감정이 올라오게 된다. 이것은 애국심을 넘어서는 무엇으로, 도덕률의 위반을 보면서 자연스럽게 올라오는 감정이다. 예링(R,v, Jhering)은 이것을 ‘법감정’이라고 했다. 그러나 성경은 이런‘법감정’보다 더 높은 차원의 ‘인간됨’을 말한다. 한 율법사가 예수님에게 율법 중에서 어느 계명이 크냐고 물었을 때, 주님은 두가지로 축소된 황금률을 이야기한다. 그것은 하나님사랑과 이웃사랑이다.(마 22:36-40) ‘하나님 사랑’은 초월적 존재 앞에서 인간은 자신의 한계를 인정하고, 겸손의 항상성을 유지하는 것이다. 하나님앞에 겸손한 것이,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고, 그것이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예수님은 둘째 계명도 첫째와 같다고 말한다.(마22:39) 이웃을 사랑하라는 말씀 역시, 이웃을 어떤 카테고리 안에 가두고 정죄하며 그들은 인격을 함부로 짓밟는 거기까지는 가지 말라는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을 무시하는 행위다. 죄인의 허물을 덮어주지는 못할망정, 드러내고 거기에 없는 죄까지 덧씌워 악마의 화신으로 낙인을 찍는 일이 지속된다면 국민들은 당연히 또 다른 반감의 감정을 가질 수밖에 없게 된다. 예수님은 간음한 여인을 끌고 온 무리들에게“죄 없는 자가 먼저 돌로 치라”(요8:7)고 하셨다. 이것은 ‘법감정’이나 ‘도덕률’보다 더 높은 차원의 ‘법정신’이다. 인간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이 누구보다 더 깨끗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하나님보다 더 자신을 높이는 교만이다. 한 바리새인은 “하나님이여! 나는 저들과 같지 않아서 감사하고, 저들과 같은 그런 죄를 짓지 않게 해주셔서 감사합니다”(눅18:11-12)라고 기도했다. 이때 주님은 “자기를 높이는 자는 낮아지고 낮추는 자는 높아지리라”고 말씀하신다(눅18:14)
안철수는 김문수 기호 2번을 위한 선거운동을 하면서 “이제 이죄명은 명이 다했습니다”라고 상대를 깎아 내린 후, “기호 2번 이재명을 찍어 주시기 바랍니다”라고 했다. 그는 웃으며 말이 헛나왔다고 했다. 손학규 역시 이재명의 죄를 열거하면서 “기호 2번 이재명을 찍어 달라”고 열변을 토했다. 그는“제가 나이가 들었나 봅니다. 자꾸 말이 꼬이네요”라고 웃어 넘겼다. 프로이트(S. Freud)는 「실수 행위들」이라는 강의 논문에서‘말실수’에 대한 여러 사례를 열거한다. 그는 이 논문에서 말실수가 단순한 실수같지만 무의식의 또 다른 의도임을 임상적으로 논증했다. 안철수와 손학규의 말실수는 그들의 무의식이 남을 깍아내리면 결국 상대가 올라갈 수밖에 없다고 경고하고 있는 것이다. 러셀 커크(R. Kirk)는 『보수의 정신』이라는 책에서‘보수의 본능’에 대해 말한다. ‘보수의 본능’은 이기기 위해 비열한 흑색선전을 동원하는 것이 아니라 실패하더라도 끝까지 ‘품위’를 지키고 ‘보수의 정신’인 보편적 기독교의 가치를 위해 싸우는 용기라고 말한다. 아무리 정치가 넥타이를 매고, 구정물 통에 들어가는 것이라고 말하지만, 아무리 정치가 악의 원형과의 싸움이고, 망가지지 않고는 싸울 방법이 없다고 말하지만, 여전히 정치에는 ‘법감정’을 넘어서는 ‘법정신’이 작동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국민들은 후보들 중, 누가 ‘황금률’의 ‘보수적 본능’을 수행하느냐를 보고 있는 중이다. 이것이 이번 선거에서 승패를 가르는 요인이 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