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연재 ㉗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내 아이만 사랑해서 내 아이를 지킬 수 있는가 ― ‘아스팔트 위의 스케이트’에서 부모들의 결사체까지
    • 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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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위에서 빙상용 스케이트를 신고 힘겹게 움직이는 아이들과 잘 정비된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달리는 아이들을 대비했다 아이에게 더 좋은 스케이트를 사줄 것인가 모든 아이가 함께 달릴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 것인가 이미지주간시민광장
      울퉁불퉁한 아스팔트 위에서 빙상용 스케이트를 신고 힘겹게 움직이는 아이들과, 잘 정비된 운동장에서 자유롭게 달리는 아이들을 대비했다. 아이에게 더 좋은 스케이트를 사줄 것인가, 모든 아이가 함께 달릴 수 있는 운동장을 만들 것인가? [AI 재구성=주간시민광장]

      부모에게 세상에서 가장 소중한 사람이 누구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이 자기 자녀를 떠올릴 것이다. 그래서 부모는 아이가 넘어지지 않도록 길을 닦아주고 싶어 한다. 좋은 학교에 보내고 싶고, 좋은 선생님을 만나게 하고 싶고, 가능하면 더 좋은 대학과 안정된 직업을 갖게 하고 싶어 한다. 그 마음을 누가 탓할 수 있을까.

      문제는 모든 부모가 자기 아이를 위해 최선을 다하는데도 아이들의 삶이 반드시 더 행복해지는 것은 아니라는 데 있다. 더 좋은 학원을 보낸다. 그러면 옆집 부모가 불안해진다. 더 많은 사교육을 시킨다. 다른 부모도 따라간다. 한 아이가 더 많은 스펙을 준비하면 다른 아이들도 뒤처지지 않으려고 더 많은 것을 준비한다. 결국 모든 가정이 더 많은 돈과 시간을 사용하지만 경쟁은 줄어들지 않는다.

      한 부모에게는 합리적인 선택이 모든 부모에게 반복되는 순간, 모든 아이에게 더 가혹한 운동장이 만들어진다. 누구도 입시지옥을 만들려고 한 것은 아니다. 그런데 모두가 자기 아이를 입시지옥에서 구하려고 달린 결과, 역설적으로 아무도 빠져나오기 어려운 입시지옥을 함께 만들어버린 것은 아닐까.

      더 좋은 스케이트를 사주면 되는가

      ㉕회 글에서 나는 ‘아스팔트 위의 스케이트’를 이야기했다. 아이가 잘 달리지 못한다. 부모는 걱정한다. 더 좋은 스케이트를 사준다. 그래도 달리지 못하면 더 비싼 스케이트를 사준다. 그러나 문제는 스케이트가 아닐 수 있다. 바닥이 아스팔트라면 아무리 좋은 스케이트를 신겨도 제대로 달릴 수 없다.

      오늘의 교육도 마찬가지 아닐까. 아이가 힘들어하면 더 좋은 학원을 찾고, 더 많은 스펙을 만들고, 더 정교한 입시전략을 세운다. 현실의 경쟁 속에서 부모에게 이런 선택이 필요할 수 있다. 한 부모에게 “당신부터 경쟁에서 내려오라”고 요구하는 것 역시 현실적이지 않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

      아이에게 더 좋은 스케이트를 신겨주는 것과 아이가 달리는 바닥을 바꾸는 것은 전혀 다른 문제다. 바로 이 지점에서 교육개혁의 질문도 달라진다. 안민석 경기도교육감이 말하는 ‘경기교육 대전환’의 고민이나,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창립 기조강연에서 김누리 교수가 한국의 극단적인 대학입시 경쟁체제를 비판하며 다른 교육체제에서 대안을 찾으려는 문제의식도 크게 보면 이 지점과 맞닿아 있다고 생각한다. 아이들에게 계속 “더 열심히 뛰어라”고 요구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운동장 자체를 바꾸어야 하는 것은 아닌가.

      이제 부모운동의 질문도 달라져야 한다

      그렇다면 부모운동도 질문을 바꿔야 한다. “내 아이를 어떻게 앞서게 할 것인가”에서 “우리 아이들이 달리는 운동장을 어떻게 바꿀 것인가”로. 그런데 여기에서 또 하나의 현실적인 문제가 생긴다. 그 운동장을 부모 한 사람이 바꿀 수 있는가. 학교문화도 한 가정이 바꾸기 어렵다. 과도한 입시경쟁도, 지역의 돌봄 부족도, 청소년의 정서적 고립도, 학교를 떠난 아이가 다시 시작하기 어려운 현실도, 실패한 청년이 다시 일어서기 어려운 사회구조도 한 부모의 사랑과 노력만으로 해결할 수 없다. 바로 여기에서 부모의 사랑은 ‘결사’라는 새로운 형태를 필요로 한다.

      학원 정보를 넘어 아이들의 삶을 나누는 모임으로

      우리에게는 이미 수많은 학부모 모임이 있다. 어느 학원이 좋은지, 어느 선생님이 잘 가르치는지, 어느 학교가 대학을 잘 보내는지, 어떤 입시전형이 유리한지를 공유한다. 이런 정보도 필요하다. 그러나 부모들이 그것만 공유한다면 우리는 아이들을 살리는 정보보다 경쟁에서 살아남는 정보를 공유하는 데 머물 수 있다.

      이제 부모들의 정보망을 한 단계 넓혀야 한다. 우리 동네에서 마음이 무너진 아이는 어디로 가야 하는가. 학교를 그만둔 아이가 다시 시작할 곳은 어디인가. 부모와 심하게 갈등하는 아이가 잠시 숨을 돌릴 공간은 있는가. 경제적으로 어려운 가정의 아이도 음악·미술·체육을 경험할 수 있는가. 입시나 취업에 실패한 청년에게 다시 도전할 길을 보여줄 어른은 있는가. 어느 학원이 좋은가를 공유하는 것만큼, 아이가 무너졌을 때 어디로 가야 하는지를 공유하는 부모들의 네트워크가 필요하다.

      내 아이가 아니어도 움직일 수 있는 부모들

      여기에서 부모운동의 가장 어려운 질문을 만나게 된다. “왜 내가 남의 아이 문제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충분히 할 수 있는 질문이다. 그러나 오늘 내 아이가 건강하고 공부를 잘한다고 내일도 반드시 그런 것은 아니다. 어느 날 학교폭력의 피해자가 될 수도 있다. 친구관계가 무너질 수도 있고 입시에 실패할 수도 있다. 대학에 적응하지 못할 수도 있고 취업의 문턱에서 좌절할 수도 있다. 그 순간 우리 아이를 붙잡아 줄 사람이 가족밖에 없다면 그 사회는 너무 위험하다.

      반대로 동네에 아이를 알아봐 주는 어른이 있고, 상담사가 있고, 좋은 선배가 있고, 부모들의 네트워크가 있으며, 실패한 아이가 잠시 쉬었다 다시 출발할 수 있는 공간이 있다면 상황은 달라진다. 오늘 내가 다른 집 아이의 안전망이 되어주는 것은 내일 누군가 내 아이의 안전망이 되어줄 가능성을 만드는 일이다. 내 아이만 안전한 공동체는 존재하지 않는다. 다른 아이도 안전해야 내 아이도 안전하다. 이것이 공동체다.

      부모의 결사체가 또 하나의 이익집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그러나 부모가 조직한다고 언제나 좋은 결과가 만들어지는 것은 아니다. 우리 학교에만 더 많은 예산을 달라고 요구할 수 있다. 우리 아파트 아이들에게 유리한 학교 배정을 요구할 수도 있다. 성적 좋은 아이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달라고 압박할 수도 있다. 그 순간 부모들의 결사체는 아이들을 위한 공동체가 아니라 또 하나의 기득권 조직이 될 수 있다.

      그래서 부모운동에는 하나의 기준이 필요하다. “내 아이에게 좋은 것이 다른 아이에게도 좋은가.” 계속 이 질문을 해야 한다. 상위권 몇 명을 더 좋은 대학에 보내는 것만이 부모운동의 성과가 되어서는 안 된다. 마음이 무너진 아이를 다시 일으키고,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에게도 기회를 주며, 학교를 떠난 아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만드는 운동이어야 한다. 좋은 부모운동의 기준은 가장 앞선 아이를 얼마나 더 앞세웠는가가 아니라, 가장 힘든 아이를 얼마나 끝까지 붙잡았는가에 있다.

      아이가 실패했을 때 돌아올 자리를 만들자

      부모들의 결사체가 처음부터 거대한 조직일 필요는 없다. 동네에서 열 명의 부모가 시작할 수도 있다. 상담전문가와 연결할 수 있다. 퇴직한 교사가 학습과 진로를 도울 수 있다. 대학생과 청년이 멘토가 될 수도 있다. 예술가와 체육인, 기업인과 기술자가 자신이 살아온 다양한 길을 아이들에게 보여줄 수도 있다. 경제적으로 어려운 아이를 위한 작은 공동기금을 만들 수도 있다.

      무엇보다 필요한 것은 ‘실패 후 회복의 공간’이다. 시험에 떨어져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대학에 가지 않았다고 인생이 끝나는 것이 아니다. 취업에 실패해도 다시 도전할 수 있다. 학교를 그만두었다고 공동체 밖으로 밀려나는 것도 아니다. 부모들이 함께 아이들에게 말해줄 수 있어야 한다. “실패해도 괜찮다. 여기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 우리는 너를 혼자 두지 않겠다.”

      선한 사마리아인을 한 사람의 영웅으로만 남겨둘 것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오늘의 교육현장으로 가져오면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한 사람이 길에 쓰러졌다면 한 명의 사마리아인이 그를 일으켜 세울 수 있다. 그런데 같은 길에서 매일 수많은 아이가 쓰러진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계속 더 많은 사마리아인을 보내기만 하면 되는가. 아니다. 왜 이 길에서는 계속 사람이 쓰러지는지를 물어야 한다. 길이 위험하다면 길을 고쳐야 한다. 구조가 아이들을 계속 넘어뜨린다면 구조를 바꾸어야 한다.

      그래서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서로 연결되어야 한다. 누군가는 상담을 맡고, 누군가는 공간을 제공하고, 누군가는 비용을 부담하며, 누군가는 아이의 이야기를 들어주어야 한다. 그리고 누군가는 학교에 묻고, 교육청에 묻고, 지방정부에 묻고, 제도를 바꾸어야 한다. 한 사람을 일으켜 세우는 것이 자비라면, 같은 자리에서 다시 사람이 쓰러지지 않도록 길을 고치는 것은 정의다. 부모들의 결사체는 바로 그 지점에서 필요하다. 이웃사랑을 개인의 미덕에서 공동체의 책임으로, 선의에서 제도로 옮기는 것이다.

      부모는 학교와 교육청에도 질문해야 한다

      부모들의 결사체가 봉사단체에만 머물러서도 안 된다. 아이들이 계속 같은 자리에서 넘어진다면 그 바닥을 만든 구조를 물어야 한다. 왜 상담교사는 부족한가. 왜 위기청소년이 도움을 받는 과정은 복잡한가. 왜 학교 밖 청소년은 쉽게 제도의 사각지대로 밀려나는가. 왜 지역에는 아이들이 돈을 내지 않고도 자유롭게 머물 공간이 부족한가. 왜 부모의 경제력에 따라 아이들이 누리는 교육과 문화 경험의 차이가 커지는가.

      그리고 더 근본적으로 물어야 한다. 우리 교육은 왜 아이들을 이렇게까지 경쟁시켜야 하는가. 좋은 부모운동은 자기 아이에게 특혜를 요구하는 운동이 아니다. 모든 아이에게 최소한의 공정한 운동장을 만들어 달라고 요구하는 운동이다.

      내 아이에서 우리 아이로

      우리 사회는 너무 많은 책임을 부모 개인에게 떠넘겨 왔다. 교육도 부모 책임이다. 돌봄도 부모 책임이다. 진로도 부모 책임이다. 아이가 입시에 실패하면 부모가 더 준비시키지 못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부모는 불안해진다. 불안하니 더 투자한다. 다른 부모도 불안해진다. 다시 경쟁이 심해진다.

      이 악순환을 끊어야 한다. 완벽한 부모 한 사람이 되려고 애쓰기보다 불완전한 부모들이 서로 연결되는 편이 낫다. 한 부모가 모든 것을 해줄 수는 없다. 그러나 백 명의 부모가 연결되면 백 가지 경험과 백 개의 손길이 아이들에게 열린다. 그때 부모의 질문도 달라진다. “내 아이가 몇 등인가”에서 “우리 아이들 가운데 지금 누가 쓰러져 있는가”로.

      예수는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고 물은 뒤 말했다.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 오늘 그 대답은 한 명의 훌륭한 부모가 아닐지도 모른다. 서로의 아이에게 이웃이 되어주는 부모들의 공동체일 수 있다.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스케이트를 사주는 것으로 부모의 사랑이 끝나서는 안 된다. 모든 아이가 함께 달릴 수 있도록 아스팔트를 걷어내는 데까지 나아가야 한다. 내 아이를 사랑한다면, 결국 내 아이가 살아갈 운동장도 사랑해야 한다. 그리고 그 운동장에는 언제나 다른 집 아이도 함께 달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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