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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하식 (칼럼니스트, 기독교철학박사)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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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도 비전트립(Vision Trip) 기행문을 마무리하며 이와 관련한 책자를 뒤져보니 나의 의문을 정반대로 반박하는 구절이 보였다. 비록 과장을 전제로 설정한 표현이기는 하나 ‘델리’를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도시 가운데 하나로 극찬한 모로코 태생의 아랍 여행가 이븐 바투타에 이어 브라만 가문의 네루였다. ‘인더스는 휘황찬란한 고대문화를 지녔다. 산스크리트어 문학은 근원적 활력이 넘친다. 인도인에게는 빛나는 예지와 넓은 아량이 있다. 인디아는 촌락 자치라는 고유한 민주주의를 가졌다.’ 물론 그가 본 것을 싸잡아 대뜸 야만이라고 부르기에는 미심쩍은 데가 있었다. 심히 의아해할 일이로되 섣부른 단정은 금물인 줄을 알기에 그렇다. 단지 우아한 공감이 없었노라고 유보키로 했다. 식구들의 경청하는 자세에 눌려 자정을 훌쩍 넘기니 목구멍에서 쇳소리가 새어 나왔다. 이만 쉬기를 간청하는 아내를 따라 아쉽지만 내일 지속하기로 하고는 감사기도를 올린 다음 샤워를 한 뒤 새로 1시가 되어서야 잠자리에 들었다.
“사람의 마음에는 많은 계획이 있어도 오직 여호와의 뜻이 완전히 서리라”(잠언 19:21)라는 말씀을 떠올리며 집에서 맞은 주일 아침. 그 옛날 마소가 자동차를 대신하던 주마간산 격에나 비할 수 있으리오마는, 전격적이다시피 인도 선교를 감행하고 돌아온 소회를 둔필로 차근차근 정리해 옮겨보려 했다. 기행의 로드맵(road-map)은 대강 이랬다. 이리저리 일주야 3,500Km 이상의 거리를 바지런히 돌아다니며 견문을 넓힌 결과 인도인에게서 배워야 할 강점들은 여럿 있었다. 먼저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가족공동체 안에서 혈육 간의 사랑을 몸소 실천하고 산다는 점이 눈에 띄었다. 조부모로부터 손주들에 이르기까지 그 가치를 오롯이 전수하고 있다는 인상을 강렬하게 받았거니와 몇 가정이라고는 해도 사회적 병폐로 줄기차게 지적 받아온 남아선호사상 같은 악한 잔재는 언뜻 찾아보기 어려웠다.
나아가 인도 사회는 장애인을 차별하지 않았다. 그들을 삶의 동반자로 인식하고 매사를 배려하며 살아가는 모습이었다. 그뿐만 아니라 인도에서는 노인들을 극진히 공경하며 그분들을 예지를 갖춘 사회의 원로로서 대접할 줄 알았다. 적어도 위와 같은 점들은 분명히 우리보다 한발 앞서가는 지점이었다. 그러고 보니 우리를 되돌아보게 만드는 인도인의 장점이 또 있었다. 깔끔하게 거래되는 상도의, 너저분하지 않은 장묘문화, 시공간을 가리지 않고 술에 취해 떠들며 비틀거리거나 간접흡연의 살인적 피해를 입히며 담배를 피워 물고 거리를 쏘다니는 건달들을 만나기 어려웠다. 보기 싫은 담배꽁초에 눈살을 찌푸리며 지독한 니코틴 냄새를 맡지 않아 그런대로 평온한 일상이었다. 단지 삼가 재론하거니와 의사소통의 장애로 인한 손실이 못내 아쉬웠다. 만일 내게 일정한 수준으로 영어를 부려 쓸 줄 아는 능력이 보태졌다면 이보다 한결 질량이 풍성한 기행문을 남길 수 있었을 것이다.
인도를 돌아보면서 대체로 비판적 시선의 창문을 열어 들춰보는 내게 따끔한 충고를 아끼지 않은 이가 있었다. 남궁 선생이었다. 무릇 부정적인 논조를 유지하던 나를 세차게 흔들어 깨운 터. 그의 말인즉슨 ‘영적 분별이 지나쳐 그것이 개인적 판단이 되고 나아가 알량한 인종적 우월성을 전제로 내리는 재단으로 이어진다면, 이는 이른바 교만이며 결코 하나님께 칭찬받지 못할 일이라는 추상같은 지적이었다. 전적으로 옳은 말이었다. 어쩌면 나 스스로 비평을 빙자하여 왜곡을 닮아가는 행로를 걷고 있는 건 아닌지 되돌아보았다. 고로 필자는 이내 나의 편향적 시각을 바로잡으려 노력했다. 열악한 환경이 어떤 순위를 가름하는 수치일 수는 없었다.
돌이켜보건대 기독교로 개종한 인도인들은 최하층민이었다. 그들 대부분은 소작농들이거나 숙명적인 200여 가지의 카스트에 묶여 쓸 만한 직업을 가질 수 없었다. 당연지사 두고두고 가난을 대물림할 수밖에 없는 구조적 모순을 숙명처럼 부여잡고 살아가는 것이다. 하지만 우리가 주안에서 만난 사람들은 순박했다. 베푸는 이에 대한 고마움을 알고, 인간을 아낄 줄 아는 그리스도인의 자질을 충분히 갖춘 자들이었다. 핵심은 창조주 하나님의 사역에 있다. 무에서 유를 이룩하신 전능자께서 무슨 일인들 못하시겠는가. 궁구하건대 유일한 중보자 예수님께서는 언제나 우리 마음의 중심을 보신다. 자존자 하나님(출애굽기 3:14)의 전지전능하심에 대해 정리한 신지식(神知識)의 목적은 삶이 곧 예배여야 한다(로마서 12:1)는 결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