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연재 ㉘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나는 왜 내 아들을 부탁하지 않았는가 ― 닫힌 문과 열린 문에서 배운 부모운동의 조건
    • ― 김영복 석우중학교 교장이 열어준 문, 나는 누구를 위해 학부모회장이 되었는가
    • 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 본지 발행인

       부모의 영향력은 내 아이에게 특혜를 주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가 모든 아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가 학교는 그 참여의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하며 부모는 그 문을 통해 들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 부모의 영향력은 내 아이에게 특혜를 주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가, 모든 아이가 함께 성장할 수 있는 세상을 만드는 데 사용되어야 하는가? 학교는 그 참여의 문을 어떻게 열어야 하며, 부모는 그 문을 통해 들어가 누구의 이웃이 되어야 하는가? (AI 재구성=주간시민광장)



      2016년, 나는 화성 동탄의 석우중학교 학부모회장을 맡았다. 그해 내 아들은 중학교 1학년이었다. 학부모회장이라는 자리에 있었으니 담임선생님을 찾아가 “우리 아들 잘 좀 봐주십시오”라는 부탁 한마디쯤 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내 아들에게 아버지의 자리가 가져다주는 혜택보다 더 소중한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이다.

      아빠가 학부모회장이라고 해서 아들이 특별한 대우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다. 아빠가 학부모와 학교를 위해 시간과 마음을 내어 봉사하는 것은 아들에게 무엇인가를 더 얻어주기 위해서가 아니다. 아들이 살아가면서 무엇을 소중하게 여기고, 다른 사람들과 어떻게 관계를 맺어야 하는지 삶으로 보여주고 싶어서다. 언젠가 그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그가 있음으로 다른 사람의 삶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그것이 내가 아들에게 전하고 싶었던 교육이었다. 아버지가 가진 자리를 이용하는 기술이 아니라, 그 자리를 어떻게 아름답게 사용할 것인가를 가르치고 싶었다. 사람에게 영향력이 생긴다는 것은 남보다 더 많은 것을 차지할 기회를 얻는 일이 아니라, 이전보다 더 많은 사람에게 도움이 될 책임을 갖는 일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돌이켜보면 내가 중학교에 갓 입학한 1학년 학생의 학부모로서 학부모회장을 맡을 수 있었던 것부터 특별한 경험이었다. 그 가능성의 뒤에는 당시 석우중학교 김영복 교장의 교육철학과 열린 학교행정이 있었다. 나는 그 경험을 이야기하기 위해 먼저 3년 전으로 돌아가고 싶다.

      2013년, 참여할 수는 있었지만 참여하기는 어려웠다

      2013년 평택 중앙초등학교에서 나는 한 아이의 학부모로서 학교 활동에 참여하고 싶었다. 학부모회와 학교운영위원회는 학부모가 교육에 참여할 수 있는 제도적 통로였다. 그러나 내가 경험한 현실에서는 그 통로가 쉽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학교 홈페이지를 스스로 찾아보지 않으면 언제, 어떤 방식으로 참여할 수 있는지 알기 어려웠다. 학교와 지역사회에서 오래 활동해 온 사람들의 관계는 비교적 잘 보였지만, 처음 참여하려는 평범한 학부모에게 “당신도 학교를 함께 만들어갈 수 있습니다”라고 손을 내미는 모습은 체감하기 어려웠다.

      제도적으로 문이 닫혀 있었다는 뜻은 아니다.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문이 열려 있다는 사실과 누군가 실제로 그 문을 발견하고 들어갈 수 있다는 사실 사이의 거리다.

      학교 홈페이지 어딘가에 공고문을 게시하면 행정절차는 갖추어질 수 있다. 그러나 공고가 있다는 사실조차 모르는 학부모에게 그 문은 사실상 보이지 않는 문이다. 참여할 권리가 존재한다고 해서 참여할 기회가 모든 사람에게 똑같이 다가오는 것은 아니다.

      그때 나는 하나의 질문을 품었다. 문을 잠그지 않은 행정과 사람을 맞이하는 행정은 같은 것인가. 좋은 행정은 단순히 “우리는 막지 않았습니다”라고 말하는 데서 끝나지 않는다. 아직 문 앞에 서보지 못한 사람에게 그 문이 어디에 있는지 알려주는 것, 그리고 그 문턱을 넘을 수 있도록 돕는 것까지 행정의 역할이어야 한다.

      당시 내가 경험한 것은 참여할 권리는 있었지만 참여하도록 적극적으로 안내받기는 어려웠던 현실이었다. 훗날 나는 이것을 소극행정과 적극행정의 차이라는 관점에서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2016년, 같은 학부모인데 학교가 달랐다

      3년 뒤 화성 동탄 석우중학교에서 나는 다른 경험을 했다. 아들은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했고, 나 역시 그 학교에 처음 발을 들인 학부모였다. 그런데도 학부모회장이 될 수 있었다. 사람은 같았다. 학부모라는 지위도 같았다. 그런데 학교가 달라지자 참여의 경험이 달라졌다. 무엇이 달랐을까.

      나는 그 차이에서 당시 김영복 교장의 열린 교육철학을 보았다. 새로 들어온 학부모라고 해서 학교 일에 참여할 자격이 부족한 것은 아니었다. 오래 활동한 사람만 교육공동체의 주인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학교는 누군가의 익숙한 영역이기 전에 모든 학생과 학부모가 함께 만들어가는 공간이어야 했다.

      김영복 교장의 학교행정에서 내가 경험한 것은 바로 그 가능성이었다. 학부모가 참여할 수 있도록 문을 열어두고, 새로운 사람도 교육공동체의 한 구성원으로 받아들이는 태도였다.

      그래서 나는 이 글에 김영복 교장의 이름을 남기고 싶다. 우리는 잘못된 행정의 책임을 물을 때 관계자의 이름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시민의 참여를 가능하게 하고 공동체에 새로운 기회를 열어준 좋은 행정의 이름도 기억해야 하지 않을까. 비판이 공정하려면 칭찬도 공정해야 한다. 잘못을 지적하는 용기만큼 잘한 일을 인정하는 품격도 필요하다.

      그날 이후 내게 학교행정은 단순한 행정절차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을 닫을 것인가, 열 것인가의 문제였다. 더 나아가 열린 문 앞에 선 사람을 어떻게 맞이할 것인가의 문제였다.

      소극행정은 참여할 권리를 남겨둔다. 적극행정은 참여할 사람을 만들어낸다. 이 원칙은 학교만이 아니라 정치와 지방자치, 시민사회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시민에게 참여할 권리가 있다고 선언하는 것만으로 민주주의가 완성되지는 않는다. 그 권리를 실제로 행사할 수 있도록 길을 만드는 것이 민주주의를 운영하는 사람들의 책임이다.

      열린 문은 나에게도 책임을 물었다

      그러나 학교가 문을 열었다고 모든 일이 끝나는 것은 아니다. 문을 열어준 사람에게 책임이 있다면, 그 문을 통해 들어간 사람에게도 책임이 있다.

      그렇게 얻은 자리를 어디에 사용할 것인가. 학부모회장이라는 지위를 내 아이에게 조금이라도 유리한 기회를 마련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아니면 내 아이와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다른 아이들까지 함께 생각하는 데 사용할 것인가.

      나는 두 번째 길을 택하고 싶었다. 그래서 담임선생님에게 내 아들을 특별히 잘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았다. 아들이 불이익을 받기를 바라서가 아니었다. 내 아이에게 돌아갈 사랑을 줄이려는 것도 아니었다. 아버지의 지위와 영향력을 통해 특혜를 얻는 방법을 가르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나는 오랫동안 영어를 가르쳐 왔다. 약 20년 동안 학생들을 만나면서 아이들의 학습과 성장에 부모의 태도가 얼마나 중요한지 보아왔다. 부모가 어떤 질문을 던지는지, 아이의 실패를 어떻게 받아들이는지, 동기유발을 어떻게 하는지에 따라 아이가 자신의 삶을 바라보는 방식도 달라질 수 있다.

      그 경험을 내 아들에게만 사용하고 싶지는 않았다. 자녀교육에 어려움을 겪는 다른 부모들과 나누고 싶었다. 아버지가 아는 것을 다른 사람에게 나누는 모습, 누군가의 성장을 위해 자신의 시간을 기꺼이 내놓는 모습 자체가 아들에게는 하나의 교육이 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부모가 아이에게 남기는 것은 돈과 학력, 인맥만이 아니다. 어떤 사람을 존중하는지, 자신의 능력을 누구를 위해 사용하는지, 어려운 사람을 만났을 때 어떻게 행동하는지 역시 아이에게 남겨진다.

      아이들은 부모가 말하는 정의보다 부모가 실제로 행하는 정의를 더 오래 기억할지도 모른다. 나는 아들에게 아버지의 자리를 물려주고 싶지 않았다. 그 자리를 사용하는 태도를 물려주고 싶었다.

      교육감을 공격할 것인가, 문제의 구조를 볼 것인가

      2016년 6월, 나는 이재정 경기도교육감이 주최한 교육재정 확충과 누리과정 문제 해결을 위한 정책간담회에 화성오산교육지원청 학부모 대표로 참여했다. 당시 경기도의 학부모·지역 대표 등 52명이 참여하는 자리였고, 채인석 화성시장도 함께했다.

      그 무렵 누리과정 예산을 둘러싼 갈등은 첨예했다. 중앙정부와 교육청 사이의 재정 책임을 둘러싼 대립이 이어졌고, 보육현장에서는 급여 지급 문제까지 발생하면서 불안과 불만이 커지고 있었다. 간담회에서도 보육 관련 단체 관계자들의 비판이 이재정 교육감에게 집중되었다. 당장의 생계가 걸린 보육종사자들에게 그 분노는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다. 급여를 제때 받지 못한다는 것은 단순한 행정적 불편이 아니라 한 가정의 생활을 흔드는 문제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나는 그 장면을 지켜보며 다른 질문을 떠올렸다. 지금 우리가 분노를 쏟아내고 있는 사람은 문제를 만든 사람인가, 아니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함께 움직여야 할 사람인가.

      보육 관계자들의 거센 항의가 이어지고 교육감을 향한 비판으로 간담회장의 분위기가 격앙되던 순간, 나는 질문을 던졌다. 당시 내가 접했던 자료에 따르면 중학생 한 명에게 3년 동안 약 580만 원, 고등학생에게는 약 760만 원의 공적 교육재정이 투입되는 것으로 제시되어 있었다. 반면 학교 밖 청소년은 전국적으로 약 26만 명에 이르는 것으로 알려져 있었고, 이들에게 제공되는 공적 지원은 거의 없다고 보았다.

      나는 그 자리에서 학교 밖 청소년들의 현실을 이야기했다. 학교에 다니는 아이들에게는 공적 교육재정이 지원되지만, 학교 밖에 있다는 이유로 최소한의 교육적 기회를 누리지 못하는 아이들도 있었다. 그 아이들 역시 대한민국의 청소년이며, 그 부모들 역시 세금을 내는 시민이다. 그런데도 마치 우리 교육공동체의 바깥사람, 심지어 외국인처럼 취급받는 것은 아니냐는 취지의 강한 표현까지 사용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학교 밖 청소년의 부모들은 자녀가 마땅히 누려야 할 교육적 기회조차 충분히 보장받지 못하는 현실을 오랫동안 견디고 있었다. 내가 학교 밖 청소년의 현실을 꺼낸 것은 그 자리에서 그들을 위한 별도의 지원정책을 요구하려는 것이 아니었다. 우리 사회에는 자신의 조직보다 훨씬 오랫동안 제도의 사각지대에서 고통을 견뎌온 사람들도 있다는 사실을 함께 바라보자는 것이었다. 자기 조직의 어려움이 절박하다고 해서 다른 사람들의 고통이 보이지 않아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나는 보육종사자들의 급여 미지급 문제가 결코 가볍지 않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노동의 대가는 약속된 시기에 지급되어야 하며, 하루하루 급여를 기다리는 사람에게 지급 지연은 생계의 고통이다. 그러나 당시 나는 이런 취지의 질문을 던졌다.

      “보육현장의 미지급 급여는 재정문제가 해결되면 나중에라도 지급받을 길이 열릴 수 있지 않습니까? 그런데 학교 밖 청소년들이 충분한 지원을 받지 못해 잃어버린 교육의 시간과 기회는 누가 되돌려줍니까? 그 아이들과 부모들은 오랫동안 당연한 권리조차 누리지 못하는 현실을 견디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금 교육감 한 사람을 궁지로 몰아세우는 것이 과연 문제를 해결하는 길입니까?”

      내가 말하고 싶었던 것은 어느 쪽의 고통이 더 크다는 것이 아니었다. 자신들의 권리를 주장하는 것은 정당하지만, 자기 집단의 고통만 바라보면 사회의 구조가 보이지 않는다. 타인의 고통까지 바라볼 때 비로소 문제를 해결할 더 넓은 길이 열린다.

      더욱 중요한 것은 책임의 방향이었다. 당시 누리과정 예산 갈등의 핵심에는 중앙정부와 교육청 사이의 재정 부담을 둘러싼 대립이 있었다. 물론 교육청의 역할과 책임 역시 따져야 했다. 그러나 중앙정부의 정책과 재정구조에서 비롯된 문제라면 교육감 개인에게 비판을 집중하는 것만으로 해결할 수 있는가.

      나는 교육감과 보육현장이 서로를 대립의 상대로 여길 것이 아니라, 함께 중앙정부에 책임 있는 재정 대책을 요구하고 아이들과 보육종사자를 위한 현실적인 해결책을 찾아야 한다고 생각했다. 서로를 공격하는 데 힘을 소진하기보다 공동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힘을 모으자는 것이었다.

      그 질문을 던진 뒤, 나는 간담회의 분위기가 달라지는 것을 느꼈다. 교육감 개인에게 집중되던 비판에서 벗어나 누가 책임을 지고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지를 함께 생각해 볼 여지가 생겼다. 내 눈에는 궁지에 몰려 있던 교육감도 그 대목에서 한숨을 돌리는 듯했다. 갈등의 상대라고 생각했던 사람이 사실은 문제를 함께 풀어야 할 동반자일 수도 있다는 가능성을 확인한 순간이었다.

      이후 나는 이재정 교육감 재임기의 교육정책을 관심 있게 지켜보았다. 특히 학교 밖 청소년과 제도권 밖의 교육 문제에 대한 정책적 관심과 배려가 이전보다 눈에 띄게 커졌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것이 당시 내 발언에서 비롯되었다고 단정할 수는 없다. 다만 그날 제기했던 문제가 이후 교육정책에서도 중요하게 다뤄지고 있다고 느꼈다는 점은 내게 의미 있게 남아 있다.

      돌이켜보면 그날 내가 한 일은 누군가의 편을 드는 일이 아니라 질문의 방향을 바꾸려는 시도였다. 누가 더 억울한가를 다투는 자리에서 벗어나, 왜 이런 불평등이 발생했고 누구와 함께 해결할 것인가를 묻고 싶었다.

      그 경험은 지금도 내가 생각하는 부모운동의 중요한 원칙으로 남아 있다. 누가 잘못했는지를 묻는 것은 필요하다. 그러나 아이들의 문제 앞에서는 거기에서 멈추어서는 안 된다. 자신의 권리를 지키면서도 다른 아이와 부모의 고통을 바라보고, 갈등의 상대와도 공동의 해결책을 찾을 수 있어야 한다.

      분노는 문제를 드러낼 수 있다. 그러나 분노만으로 문제를 해결할 수는 없다. 좋은 부모운동은 자기 아이와 자기 조직의 권리를 지키는 데서 출발하지만, 다른 아이와 다른 부모의 고통까지 바라보고 그 분노를 함께 해결하는 지혜로 바꿀 때 비로소 성숙해진다.

      “맨입으로요?”

      간담회 다음 날이었다. 화성시 교육 담당자로부터 전화가 왔다. 전날 현장에서 내가 했던 발언과 역할에 대해 감사하다는 취지의 전화였다.

      나는 농담처럼 물었다. “감사만 하면 됩니까. 맨입으로요?” 웃음 섞인 말이었지만 내게는 작은 생각이 있었다. 공적인 자리에서 얻은 관심과 호의를 다시 공적인 일에 사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내가 요청한 것은 개인적인 보상이 아니었다. 석우중학교 학부모들이 아이들을 위해 함께 공부할 수 있도록 학부모 교육비를 지원해 달라고 했다. 그렇게 학부모 교육을 위한 지원금 100만 원을 받았다. 100만 원은 큰 금액이 아니었다. 그러나 내게는 그 돈의 크기보다 돈이 흘러가는 방향이 중요했다.

      그 돈으로 특정한 아이에게 특별한 혜택을 주지 않았다. 부모들이 함께 배우고 아이들의 성장을 도울 수 있는 교육의 기회를 만들었다. 청소년 게임 과몰입 문제를 이해하고 대응하기 위해 관련 교육활동을 펼쳐온 권장희 소장을 초청해 학부모 특강을 열었다. 또 김승진 박사를 초청해 부모와 자녀가 어떻게 질문하고 대화해야 하는지 함께 배우는 ‘신소크라테스의 대화법’ 6회 프로그램도 진행했다.

      왜 이런 프로그램을 선택했을까. 나는 아이들에게 필요한 교육이 문제집을 한 권 더 풀게 하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아이가 왜 게임 속으로 들어가려 하는지 이해하는 것, 부모가 아이를 설득하기 전에 먼저 그의 말을 들을 줄 아는 것, 아이의 생각을 틀렸다고 판단하기 전에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질문하는 것 역시 중요한 교육이다.

      어쩌면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아이에게 정답을 많이 알려주는 일이 아니라, 아이가 자신의 삶을 이해하도록 좋은 질문을 던지는 법을 배우는 일인지도 모른다. 소크라테스의 대화가 상대방의 생각을 일깨우는 데 의미가 있다면, 부모의 대화 역시 아이의 마음을 통제하는 기술이 아니라 아이가 자기 삶의 주체로 성장하도록 돕는 과정이어야 한다. 나는 부모들이 그 가능성을 함께 배우기를 바랐다.

      100만 원보다 중요했던 것

      돌이켜보면 그때의 두 선택은 서로 다른 선택이 아니었다. 담임선생님에게 내 아들을 잘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은 일과, 공적인 자리에서 얻은 100만 원을 학부모 교육에 사용한 일은 같은 생각에서 출발했다.

      내가 얻은 작은 영향력을 사적인 혜택으로 바꾸지 않고 공동체가 함께 사용하는 자원으로 돌려놓고 싶었다. 100만 원으로 대한민국 교육제도를 바꿀 수는 없었다. 몇 차례의 부모교육만으로 모든 가정의 문제가 해결될 리도 없었다. 그러나 작은 돈이 어디에 사용되는지에 따라 공동체의 풍경은 달라질 수 있다.

      한 사람을 위한 선물은 한 사람에게 남는다. 그러나 부모가 함께 배우는 기회는 여러 가정으로 이어질 수 있다. 한 부모가 아이의 말을 조금 더 귀 기울여 듣게 된다면, 그 변화는 그 가정의 저녁 식탁에서 시작될 것이다. 그 아이가 친구에게 조금 더 따뜻한 사람이 된다면, 변화는 다시 교실로 이어질 수 있다. 교육은 그렇게 사람에게서 사람으로 번져간다.

      나는 학부모회가 자기 아이에게 무엇을 더 줄 수 있는지를 경쟁하는 조직이 되어서는 안 된다고 생각했다. 오히려 부모들이 함께 배우고, 다른 집 아이의 문제도 자신의 문제처럼 고민하며, 학교와 지역의 교육환경을 함께 개선하는 결사체가 되어야 한다고 보았다.

      내 아이가 안전하려면 다른 아이들도 안전해야 한다. 내 아이가 존중받으려면 다른 아이들도 존중받아야 한다. 내 아이가 마음껏 꿈꾸는 학교를 원한다면 다른 아이들의 꿈도 함부로 꺾여서는 안 된다.

      부모의 사랑이 자기 자녀에게서 출발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그러나 그 사랑이 자기 자녀에게만 머물러야 할 이유는 없다. 사랑은 나눌수록 작아지는 재산이 아니다. 오히려 다른 사람에게 닿을 때 그 의미가 더욱 깊어지는 인간의 능력이다. 나는 학부모회가 바로 그런 사랑을 공적인 책임으로 발전시키는 공간이 될 수 있다고 믿었다.

      좋은 부모만으로 좋은 부모운동은 만들어지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이 모든 책임을 부모에게만 돌리고 싶지 않다. 아무리 좋은 뜻을 가진 부모라도 참여할 수 있는 통로가 없다면 그 마음은 학교 밖에 머물 수밖에 없다. 학교가 문을 열지 않으면 부모의 경험과 재능은 교육공동체의 자원이 되기 어렵다.

      좋은 부모운동은 좋은 부모 몇 사람이 모인다고 저절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학교도 문을 열어야 하고, 교육청도 학부모를 단순한 민원인이 아니라 교육의 주체로 대해야 한다. 지방정부 역시 이미 조직된 사람들만 상대할 것이 아니라 학교와 지역에 새롭게 참여하려는 평범한 부모들이 들어올 수 있는 통로를 마련해야 한다.

      학교가 학부모를 불편한 민원인으로만 바라보는 순간 참여는 갈등이 되기 쉽다. 반대로 학부모를 교육의 동반자로 인정한다면 그들의 경험과 전문성, 시간과 열정은 학교가 혼자서는 만들어내기 어려운 새로운 가능성이 된다.

      여기서 나는 다시 2013년 평택 중앙초등학교와 2016년 석우중학교에서 경험했던 두 개의 문을 떠올린다. 하나는 열려 있는지조차 알기 어려웠던 문이었다. 다른 하나는 새로 들어온 학부모에게도 참여의 가능성을 보여준 문이었다. 그 차이는 내게 행정의 품격이 무엇인지 가르쳐주었다.

      행정의 품격은 규정을 얼마나 많이 알고 있는지에서만 드러나지 않는다. 그 규정 안에서 사람의 가능성을 얼마나 발견하고, 그 가능성이 공동체에 기여할 수 있도록 얼마나 길을 열어주는지에서도 드러난다. 이것이 내가 김영복 교장의 이름을 기억하고 싶은 이유다.

      좋은 행정은 자신이 가진 권한을 과시하지 않는다. 오히려 그 권한을 통해 다른 사람이 자신의 능력을 발휘하도록 돕는다. 권한이 사람을 누르는 힘이 아니라 사람을 일으키는 힘이 되는 것이다.

      나는 왜 내 아들을 부탁하지 않았는가

      다시 처음의 질문으로 돌아가고 싶다. 나는 왜 학부모회장이면서도 담임선생님에게 내 아들을 잘 봐달라고 부탁하지 않았을까. 내 아들을 사랑하지 않아서가 아니다. 오히려 내 아들을 사랑했기 때문에 그에게 조금 다른 아버지의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아버지의 지위를 이용하면 조금 더 편한 길을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대신, 아버지가 가진 작은 영향력이라도 다른 사람과 나누는 모습을 보여주고 싶었다.

      내 아들에게 해주고 싶었던 말은 이것이었다.

      “아빠가 학부모회장이라고 해서 네가 특별한 혜택을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니란다. 아빠가 학교와 학부모를 위해 봉사하는 이유는 네게 남보다 유리한 자리를 만들어주기 위해서가 아니야. 네가 언젠가 누군가에게 힘이 되고, 네가 살아가는 세상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사람이 되었으면 좋겠기 때문이란다.”

      나는 그 말이 교훈으로만 남지 않기를 바랐다. 아들이 아버지의 행동을 통해 그 뜻을 이해하기를 바랐다. 말로 가르치는 사랑에는 한계가 있다. 그러나 누군가를 위해 자기 시간을 내어주는 모습은 설명하지 않아도 아이의 마음에 남을 수 있다. 돌이켜보면 내가 석우중학교에서 한 일은 그리 거창하지 않았다. 100만 원의 교육지원금은 작은 돈이었고, 몇 차례의 부모교육이 대한민국 교육제도를 바꾼 것도 아니다.

      그러나 작은 일에도 삶의 방향은 담길 수 있다. 나는 그때 한 가지 가능성을 보았다. 부모가 가진 자리와 영향력을 자기 아이에게만 사용하지 않을 수 있다는 것, 학부모회가 내 아이를 앞세우는 조직을 넘어 다른 집 아이까지 함께 생각하는 부모들의 결사체가 될 수 있다는 것, 그리고 그 가능성을 실현하도록 문을 열어주는 학교행정이 존재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 글의 제목은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이다. 성서의 선한 사마리아인 이야기를 떠올려보자. 예수는 누가 나의 이웃인가라는 질문을, 누가 강도 만난 사람에게 이웃이 되어주었는가라는 질문으로 바꾸었다. 이웃을 찾는 기준보다 누군가의 이웃이 되는 행동을 물었던 것이다.

      부모운동도 다르지 않다고 생각한다. 누가 내 아이에게 도움이 될 것인가만 물을 것이 아니라, 나는 누구의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부모인가를 물어야 한다. 내 아이가 좋은 학교에서 공부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나아가, 다른 집 아이도 함께 좋은 교육을 받을 수 있도록 무엇을 할 것인가를 물어야 한다. 그 질문 앞에서 부모의 사랑은 새로운 품격을 얻는다.

      앞선 ㉕회에서 나는 아이에게 더 좋은 스케이트를 사주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고 말했다. 그렇다면 부모가 해야 할 일은 무엇일까. 내 아이에게 가장 좋은 스케이트 한 켤레를 더 사주기 위해 영향력을 사용하는 것이 아니라, 내 아이와 다른 집 아이가 함께 달리는 운동장을 조금이라도 더 좋은 곳으로 만드는 데 그 영향력을 사용하는 것 아닐까.

      세월이 흘러 아들이 그 시절을 어떻게 기억할지는 알 수 없다. 아버지가 학부모회장이었다는 사실을 오래 기억하지 못할 수도 있다. 어떤 강사가 학교에 왔는지, 교육지원금이 얼마였는지도 잊을 수 있다. 그 모든 것은 잊어도 좋다. 다만 한 가지는 마음에 남았으면 한다.

      아버지는 자기 아이를 사랑했지만, 그 사랑을 자기 아이에게만 가두지는 않으려 했다는 것. 자신에게 주어진 작은 자리에서도 다른 사람의 삶을 조금 더 나아지게 할 방법을 찾으려 했다는 것.

      나는 그것이 부모가 아이에게 남길 수 있는 아름다운 유산이라고 생각한다. 사람은 누구나 자기 아이를 사랑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랑이 다른 아이에게까지 닿도록 자신의 시간과 능력을 내어주는 일에는 또 다른 성숙이 필요하다. 어쩌면 부모운동의 품격은 바로 그곳에서 시작되는지도 모른다.

      언젠가 아들이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아버지가 왜 그토록 학교 일에 마음을 쏟았는지 묻는 날이 온다면, 나는 길게 설명하지 않아도 좋겠다. 그저 이 한마디를 전할 수 있다면 충분하다.

      “나는 너만 사랑하지 않았다. 네가 살아갈 세상도 함께 사랑하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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