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 연재 ③] 예수의 이웃사랑, 왜 다시 해석해야 하는가 (3) 이웃사랑은 왜 정치가 되어야 하는가 — 자비에서 정의로, 신앙에서 제도로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조종건
      조종건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많은 기독교인들은 정치를 불편하게 여긴다. 정치는 권력 다툼의 장이고 신앙은 그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정치인에 대한 불신도 깊다. 그래서 신앙은 정치와 거리를 두는 것이 더 순수한 길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나 정치를 조금 다른 각도에서 생각해 보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정치는 단지 권력을 차지하는 기술이 아니다. 정치는 누가 보호받고 누가 비용을 감당할 것인가를 결정하는 공동체의 과정이다. 다시 말해 정치는 책임을 어떻게 나눌 것인가를 결정하는 일이다.

      이렇게 보면 정치는 더러운 영역이 아니라 오히려 매우 귀한 공적 공간이다. 그곳에서 공동체의 책임이 법과 제도의 형태로 정리되기 때문이다. 만약 정치가 없다면 책임은 언제나 가장 약한 개인에게 흘러갈 가능성이 크다.

      이 지점에서 우리는 예수의 가르침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예수는 “네 이웃을 네 몸과 같이 사랑하라”고 말했다. 이 말은 오래도록 개인의 미덕으로 이해되어 왔다. 돕는 마음, 나누는 손길, 불쌍히 여기는 감정.

      그러나 이웃사랑이 개인의 선의에만 머무를 때 구조 속에서 발생하는 책임의 문제는 제대로 다뤄지지 않는다. 그래서 이웃사랑을 오늘의 현실 속에서 다시 해석하려면 한 가지 질문을 피할 수 없다.

        누가 그 책임을 감당해야 하는가.

      이 질문이 시작되는 순간 이웃사랑은 개인의 감정을 넘어 공동체의 책임을 묻는 문제로 확장된다. 그리고 그 책임이 법과 제도의 형태로 결정되는 자리, 바로 그곳이 정치다.

      미국 신학자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는 윤리의 질문을 이렇게 바꾼다.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무엇에 응답해야 하는가?”

      이 말은 처음 들으면 추상적으로 느껴질 수 있다. 그러나 일상적인 예로 생각해 보면 어렵지 않다.

      길을 걷다가 노숙인을 만났다고 하자. 우리는 이렇게 생각한다. “도울까, 말까.” 이 경우 도움은 개인의 선택이다. 도우면 선한 행동이고 지나가면 그냥 지나가는 것이다.

      그러나 상황이 조금 다르다고 생각해 보자. 내가 실수로 누군가의 물건을 망가뜨렸다. 이때 우리는 “도울까 말까”라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이렇게 말한다. “내가 책임을 져야겠다.”

      왜냐하면 그 상황은 더 이상 선행의 문제가 아니라 이미 발생한 관계 속에서의 책임이기 때문이다.

      니버가 말하는 책임 윤리는 바로 이런 종류의 책임이다. 윤리는 단순히 “좋은 일을 할까 말까”를 결정하는 문제가 아니라 이미 벌어진 현실에 우리가 어떻게 응답할 것인가의 문제라는 것이다.

      연대보증 문제를 다시 보자. 연대보증인은 선의를 선택했을 수도 있다. 친구를 돕기 위해, 가족을 돕기 위해, 혹은 사업을 돕기 위해 서명을 했을 것이다. 그러나 문제가 생긴 뒤 우리는 이 상황을 너무 쉽게 개인의 선택으로 설명해 왔다.

        “스스로 보증을 섰다.”
        “계약은 자발적이었다.”

      그러나 연대보증은 단순한 개인 간의 약속이 아니었다. 그것은 국가의 금융 정책, 은행의 위험 관리 방식, 성장 중심의 경제 구조 속에서 만들어진 제도적 관행이었다.

      따라서 이 문제는 개인의 도덕이 아니라 사회가 만들어 낸 책임의 구조였다.

      이 지점에서 니버의 질문이 다시 등장한다. 우리는 이 문제를 단순히 안타깝게 여기면 되는 것인가, 아니면 이미 만들어진 구조에 대해 책임 있게 응답해야 하는가.

      연대보증 피해자 중에는 10년 이상 성실하게 채무를 상환해 온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도망치지 않았고 파산을 선택하지도 않았다. 그러나 여전히 이자 부담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이 상황 앞에서 신앙은 무엇을 말해야 하는가. “선한 마음으로 감당하라”고 말할 것인가, 아니면 “이 구조는 바뀌어야 한다”고 말할 것인가.

      여기서 우리는 예수의 비유 하나를 떠올리게 된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이야기다.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친 제사장과 레위인은 율법을 몰라서 지나간 것이 아니었다. 그들은 그 상황에 개입하지 않기로 선택했다. 예수는 그들에게 “왜 돕지 않았느냐”고 묻지 않았다. 대신 이렇게 묻는다.

        “누가 그 사람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이 질문은 선행을 요구하는 질문이 아니라 책임을 회피한 신앙의 태도를 드러내는 질문이다.

      오늘 우리의 신앙도 이와 비슷한 함정에 빠질 수 있다. 연대보증과 같은 구조적 문제 앞에서 우리는 이렇게 말하기 쉽다.

        “안타깝다.”
        “개인의 선택이었다.”
        “법적으로는 문제가 없다.”

      그러나 이런 말들이 반복될 때 우리는 어느새 강도 만난 사람을 지나쳤던 제사장과 레위인처럼 구조 속에서 고통받는 이웃을 외면하는 자리에 서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이 질문은 우리에게 다시 돌아온다.

        연대보증 문제 앞에서 침묵하는 신앙은
        중립이 아니라 책임의 회피일 수 있다.

      이웃사랑은 단순히 선한 마음을 가지라는 요청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벌어진 현실 속에서 누구의 편에 설 것인가를 묻는 질문이다.

        이웃사랑은 결국
        누가 보호받고
        누가 비용을 감당하며
        어떤 위험을 공동체가 함께 짊어질 것인가를 결정하는 문제다.

      그리고 그 결정은 개인이 할 수 없다. 그것은 법과 제도, 정책과 국가의 몫이다.

      그래서 니버에게서 이웃사랑은 자비의 감정을 넘어 책임을 역사 속에 고정시키는 정치적 윤리가 된다.

      연대보증 문제에 참여하는 일은 특정한 정치적 선택이 아니라 이웃사랑을 책임의 언어로 번역하는 시민의 응답이다.

      ▶ 다음 회차 예고 (4) 국가는 왜 책임에서 물러나 있었는가 — 금융은 중립적인가, 국가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다음 회차에서는
        • 국가의 ‘중립’이라는 신화
        • 금융 규제의 윤리적 근거
        • 왜 책임은 결국 국가로 수렴되는가를 다룬다.

      이웃사랑은 시장 실패 이후에 등장하는 미담이 아니라 시장을 설계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Copyrights ⓒ 주간시민광장 & www.gohuman.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확대 l 축소 l 기사목록 l 프린트 l 스크랩하기
         신문사소개  |   시민사회재단 소개  |   보도자료등록  |  개인정보보호정책  |  청소년보호정책  |  오시는길
대표자: 조종건 | 상호: 시민사회재단 | 주소: 경기도 평택시 비전4로 175, 708-202 | 신문등록번호: 경기도 아52894 | 등록일자 : 2021-05-18 | 발행인/편집인: 조종건 | 편집장:조종건 | 청소년보호책임자: 조종건 | 전화번호: 010-7622-8781
이메일: master@gohuman.co.kr
Copyright © 2021 주간시민광장.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