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 연재 ④] 예수의 이웃사랑, 왜 다시 해석해야 하는가 (4) 국가는 왜 책임에서 물러나 있었는가 ― 금융은 중립적인가, 국가는 어디까지 책임져야 하는가
    • 조종건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조종건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국가는 종종 이렇게 말한다.

          “시장은 자율적으로 작동한다.”
          “계약은 개인의 선택이다.”
          “국가는 중립을 지켜야 한다.”

      그러나 리차드 니버(Richard Niebuhr)의 윤리에서 중립은 존재하지 않는다. 책임이 누구에게 지워지는 순간, 이미 정치적 선택은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연대보증 제도를 방치한 국가는 개입하지 않은 것이 아니다. 책임을 개인에게 넘기는 방식으로 개입한 것이다.

      연대보증 피해자가 10년, 15년의 시간을 빚 속에서 살아갈 때 그를 위로하는 말은 넘쳐났다.
          “힘내라.”
          “버텨라.”
          “성실하면 언젠가 끝난다.”

      그러나 구조는 단 한 번도 변하지 않았다.

      평택 팽성에서 만난 한 농부의 삶은 그 현실을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그는 연대보증으로 약 10억 원의 채무를 떠안았고, 매달 600만 원의 이자를 갚으며 살아가고 있다.

      그는 돈을 쓰지 않았다.

      그러나 그의 삶은 빚을 갚기 위해 존재하는 삶이 되었다.

      매달 600만 원의 이자를 갚으며 살아간다.

      그 삶이 하루, 일 년이 아니라 17년째 계속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만약 당신이 그 삶을 살아야 한다면, 그것을 여전히 ‘계약’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이것은 개인의 실패가 아니다.

      이것은 한 인간의 삶이 금융 구조에 종속된 사건이며, 국가가 방치한 제도가 한 사람을 사실상 ‘은행의 노동자’로 만든 현실이다.

      이 질문을 피할 수 없다. "이것이 과연 정상적인 사회인가."

      연대보증은 단순한 금융 관행이 아니었다. 그것은 1960~70년대 경제도약 과정에서 은행의 위험을 개인에게 전가하기 위해 선택된 구조였다.

      국가는 성장을 선택했고, 금융은 속도를 요구받았다. 그 결과 은행은 위험을 줄이면서 대출을 확대할 수 있었고, 그 비용은 개인에게 남겨졌다.

      문제는 제도가 사라졌다는 사실이 아니다. 문제는 그 비용만은 지금도 개인의 삶에 남아 있다는 점이다.

      이 질문은 더 이상 미룰 수 없다. 국가의 성장 전략을 위해 만들어진 구조라면, 그 책임 또한 개인이 아니라 공동체가 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 지점에서 우리는 한 가지 더 근본적인 사실을 마주하게 된다. 칼 폴라니(Karl Polanyi)는 <거대한 전환 The Great Transformation>에서 시장이 인간을 보호하지 못하고 오히려 인간을 소모시키는 구조로 작동할 때 그것을 ‘악마의 맷돌’이라고 불렀다.

      연대보증은 그 개념이 추상이 아니라 한 사람의 삶 위에서 실제로 작동한 사례다.

      국가는 왜 ‘중립’일 수 없는가

      니버에게 국가는 도덕 교사도, 구원의 주체도 아니다. 그러나 국가는 책임이 조직화되는 가장 강력한 장치다.

      국가는 결정한다.
        • 어떤 위험이 사회화되는가
        • 어떤 손실이 개인화되는가
        • 누가 보호받고, 누가 감내해야 하는가

      이 결정 앞에서 국가는 결코 중립일 수 없다.

      연대보증은 “시장 관행”이 아니었다. 국가가 승인한 위험 이전 구조였다. 금융기관은 법 안에서 움직였고, 그 법은 국가가 만들었다.

      따라서 책임은 개인에서 시작되지 않는다. 책임은 제도를 허용한 국가에서 출발한다.

      금융은 중립적인가, 아니면 선택적인가

      금융은 스스로를 기술이라고 말한다. 리스크 관리, 신용 평가, 손실 최소화.

      그러나 니버의 관점에서 기술은 결코 중립적이지 않다. 기술은 언제나 누군가의 삶 위에서 결과를 낳는다.

      연대보증은 금융의 효율을 높였다. 그러나 그 효율은 가장 약한 이웃의 삶을 담보로 한 효율이었다.

      이것은 시장의 실패가 아니다. 이것은 그렇게 설계된 결과다.

      문제는 금융이 아니다. 금융을 통제하지 않은 윤리와 정치다.

      신앙은 왜 국가 책임을 묻지 않게 되었는가

      왜 교회는 이 문제 앞에서 침묵했는가. 신앙은 이렇게 말해 왔다. 
        “정치는 더럽다.” 
        “신앙은 거리를 둬야 한다.” 
        “돈 문제는 세속이다.” 
        “교회는 영혼만 다룬다.”

      그러나 이 말은 위험하다. 그 순간 신앙은 책임의 자리에서 스스로 물러나기 때문이다. 연대보증 문제 앞에서 침묵하는 것은 중립이 아니다. 그것은 이미 존재하는 구조를 그대로 두겠다는 선택이다.

      니버는 이 분리를 허용하지 않는다. 하나님에 대한 신앙은 반드시 역사 속 책임으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그는 선의를 요구하지 않는다. 그는 묻는다. 누가 책임을 질 것인가. 그리고 그 책임은 개인의 마음이 아니라 제도와 국가를 향한다.

      국가 책임이란 무엇인가

      국가 책임은 모든 빚을 대신 갚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책임을 다시 배치하는 일이다.

      연대보증 피해자 중에는 10년, 15년 이상 성실하게 채무를 이행해 온 이들이 있다. 그들에게 끝없는 이자를 요구하는 것은 계약의 문제가 아니다. 정의의 문제다.

      니버의 언어로 말하면 국가 책임은 자비가 아니라 역사에 대한 응답이다.

        • 왜 이 구조가 가능했는가
        • 누가 이 구조로 이익을 얻었는가
        • 누가 그 비용을 떠안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않는 국가는 이웃사랑을 말할 자격이 없다.

      이웃사랑은 왜 법과 정책으로 번역되어야 하는가

      이웃사랑이 감정으로 남을 때 국가는 언제나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안타깝지만 어쩔 수 없다.”

      그러나 이웃사랑이 제도가 되는 순간 국가는 더 이상 피할 수 없다.

        • 일정 기간 성실 상환 채무 이자 중단
        • 원금 중심 상환 구조 전환
        • 금융기관 위험 분담 재설계

      이것은 특혜가 아니다. 이것은 이웃을 더 이상 담보로 삼지 않겠다는 선언이다.

      니버가 말하는 국가의 한계와 가능성

      니버는 국가를 신뢰하지 않는다. 그러나 국가 없이는 책임을 조직할 수 없다는 사실도 인정한다. 그래서 그의 윤리는 분명하다.
        • 국가는 절대화하지 않는다
        • 그러나 책임에서도 도망치게 하지 않는다

      국가는 구원자가 아니다. 그러나 불의한 구조를 고칠 수 있는 유일한 현실적 주체다. 이웃사랑은 국가를 대신하지 않지만 국가를 끝까지 책임지게 만드는 윤리다.

      ▶ 다음 회차 예고 (5)

      이웃사랑은 왜 ‘도덕’을 넘어 ‘정치적 갈등’을 감수해야 하는가 ― 책임 윤리는 왜 불편하고, 왜 환영받지 못하는가
    Copyrights ⓒ 주간시민광장 & www.gohuman.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확대 l 축소 l 기사목록 l 프린트 l 스크랩하기
최신기사
         신문사소개  |   시민사회재단 소개  |   보도자료등록  |  개인정보보호정책  |  청소년보호정책  |  오시는길
대표자: 조종건 | 상호: 시민사회재단 | 주소: 경기도 평택시 비전4로 175, 708-202 | 신문등록번호: 경기도 아52894 | 등록일자 : 2021-05-18 | 발행인/편집인: 조종건 | 편집장:조종건 | 청소년보호책임자: 조종건 | 전화번호: 010-7622-8781
이메일: master@gohuman.co.kr
Copyright © 2021 주간시민광장. All rights reserve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