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건 | 꺠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 한국시민사회재단 상임대표
| 평택시민환경연대 공동대표
| 제1기 평택시물환경민관거버넌스 단장
앞선 글에서 나는 2026년 5월 3일 ‘반도체 6억 성과급’ 논란을 AI 시대의 새로운 분배갈등이 구체적인 숫자로 모습을 드러낸 상징적인 사건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다음 질문은 자연스럽다. 삼성이 성장하면 평택도 성장하는가. 평택에는 세계적인 반도체 생산기지가 있다. 삼성전자 평택캠퍼스는 대한민국 반도체 산업의 핵심 거점 가운데 하나다. 기업이 투자하면 공장이 들어서고, 산업단지가 확대되고, 도로가 만들어지고, 인구도 늘어난다.
그래서 우리는 너무 쉽게 이렇게 생각한다. “삼성이 잘되면 평택도 잘된다.” 물론 틀린 말은 아니다. 대규모 기업 투자는 지역에 일자리를 만들고 세수를 늘리며 산업생태계를 확대한다. 지역경제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도 분명하다.
그러나 나는 여기에서 한 단어를 추가하고 싶다. ‘자동으로’ 그런 것은 아니다. 삼성이 성장한다고 해서 평택시민의 삶과 자산, 지역기업의 경쟁력, 지역사회의 전문성이 같은 속도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AI 시대에는 오히려 이 둘이 서로 멀어질 가능성도 있다.
성장하는 도시와 스스로 성장하는 도시는 다르다
평택은 빠르게 성장했다. 삼성전자뿐 아니라 평택항과 산업단지, 미군기지 이전, 대규모 도시개발이 동시에 이루어졌다. 인구도 크게 늘었고 도시 규모도 커졌다. 그러나 나는 평택을 바라보며 오래전부터 한 가지 질문을 해왔다. 평택은 성장하는 도시인가, 아니면 스스로 성장할 수 있는 도시인가. 두 개념은 전혀 다르다. 외부에서 대규모 자본이 들어와 공장을 짓고 인구가 늘어나는 것은 성장이다. 그러나 그 기업이 투자를 중단하거나 산업환경이 달라져도 지역이 스스로 사람을 키우고, 기업을 만들고, 기술을 축적하며, 새로운 산업과 일자리를 만들어낼 수 있어야 자생력이라고 할 수 있다.
내가 2026년 8월 20일 평택시재생에너지확대정책토론회에서 강조한 것도 바로 이 문제였다. 도시의 자생력은 대기업이 들어오고 예산과 인구가 증가하는 것만으로 만들어지지 않는다. 지역에서 사람을 키우고, 지역의 지식과 경험을 축적하고, 지역기업과 시민사회가 성장하며, 지역에서 발생한 부가 다시 지역에 투자되는 선순환 구조가 있어야 한다. 기업이 성장하는 것과 도시가 성장하는 것은 그래서 같은 말이 아니다.
지역총생산은 늘었는데 시민은 왜 힘든가
한 지역의 경제가 성장했다고 말할 때 우리는 흔히 숫자를 본다. 지역총생산이 얼마나 증가했는가. 대기업의 생산액이 얼마나 되는가. 투자유치액은 얼마인가. 고용은 몇 명 증가했는가. 중요한 지표다. 그러나 시민에게 더 중요한 숫자가 있다. 내 소득은 얼마나 늘었는가. 주거비 부담은 줄었는가. 자영업자의 매출은 늘었는가. 청년에게 좋은 일자리가 생겼는가. 시민의 자산은 늘었는가.
지역총생산과 시민의 삶은 반드시 같이 움직이지 않는다. 예를 들어 평택에서 수십조 원, 수백조 원의 생산이 이루어져도 핵심 장비와 기술은 외부기업이 공급하고, 연구개발은 다른 지역에서 이루어지며, 이익은 본사와 주주에게 돌아간다면 지역 안에 실제로 축적되는 경제적 가치는 생각보다 적을 수 있다. 반대로 대규모 산업화 과정에서 토지가격과 주거비가 상승하고 교통 혼잡과 환경부담이 커진다면 일부 시민은 도시가 성장할수록 오히려 생활비 부담이 증가할 수도 있다. 도시는 부유해지는데 시민은 불안해질 수 있다. 이것이 우리가 경계해야 할 성장의 역설이다.
AI 시대에는 기업 성장과 고용의 연결이 약해질 수 있다
이 문제는 AI 시대에 더욱 중요해진다. 산업화 시대에는 기업의 성장과 고용의 증가 사이에 비교적 강한 연결고리가 있었다. 공장을 하나 더 지으면 사람이 더 필요했다. 생산량을 늘리면 노동자를 더 고용했다. 기업이 성장하면 임금소득을 받는 사람도 증가했고, 그 소비가 지역상권으로 흘러갔다.
하지만 AI와 로봇, 스마트공장이 보편화되면 이 관계가 달라질 수 있다. 과거 100명이 하던 일을 30명이나 50명이 할 수도 있다. 생산량은 두 배로 늘었는데 고용은 거의 늘지 않을 수도 있다. 심지어 생산성과 기업이익이 증가하면서 고용은 줄어드는 경우도 가능하다. 내 토론자료에서도 AI와 로봇이 인간 노동을 상당 부분 대체할 경우 생산성은 크게 높아지더라도 성과가 자본과 기술을 소유한 사람에게 집중될 가능성이 있으며, 노동소득만으로 시민의 안정적인 삶을 보장하기 어려워질 가능성까지 고려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그렇다면 “좋은 기업을 유치하면 좋은 일자리가 생긴다”는 기존 지역발전 공식만으로는 부족해진다. 기업의 생산성이 시민에게 어떤 경로로 돌아오는지를 새롭게 설계해야 한다.
평택은 생산의 장소인가, 성장의 주체인가
나는 이 문제를 환경운동과 시민사회 활동을 하면서도 반복해서 보았다. 사업은 평택에서 이루어진다. 그러나 연구는 외부기관이 한다. 설계는 외부업체가 한다. 시공도 외부기업이 한다. 전문가는 서울이나 다른 지역에서 온다. 사업이 끝나면 사람도 돌아가고 경험도 사라진다. 몇 년 뒤 비슷한 사업을 하면 다시 외부전문가를 불러야 한다. 예산은 분명 평택에서 집행됐다. 시설도 남았다. 그런데 지역의 역량은 얼마나 남았는가.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지역은 계속 사업의 장소에 머문다. 토론자료에서도 환경·에너지 사업을 평가할 때 사업 건수나 예산 집행액보다 “사업이 끝난 뒤 평택에 무엇이 남았는가”를 물어야 한다고 제안했다. 지역 전문가가 성장했는지, 지역기업과 시민단체의 전문성이 높아졌는지, 새로운 일자리가 생겼는지, 평택이 자신의 환경문제를 해결할 능력을 축적했는지를 평가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질문은 반도체 산업에도 그대로 적용할 수 있다. 삼성이 성장한 뒤 평택에 무엇이 남는가.
사람이 남는가
가장 먼저 사람이다. 세계적인 반도체 산업도시라면 평택의 청년들이 반도체 산업의 핵심인력으로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지역 학교와 대학에서 공부한 청년이 기술자와 연구자, 기업가가 되어 지역에 남을 수 있는 구조가 필요하다. 공장 생산직 몇 명을 채용하는 수준을 넘어 연구개발과 설계, 소재·부품·장비, AI와 데이터 분야까지 지역의 인재가 성장해야 한다. 기업이 세계적 수준으로 성장하는데 그 기업에 필요한 고급인력은 계속 외부에서 데려와야 한다면 평택은 반도체 생산지역일 뿐 반도체 산업도시라고 부르기 어렵다.
지역기업이 남는가
두 번째는 기업이다. 삼성이라는 거대한 기업이 들어왔다면 주변에 평택의 기업들이 함께 성장할 수 있어야 한다. 소재와 부품. 환경관리. 수처리. 재생에너지. 스마트물류. 안전관리. AI 서비스. 반도체 산업을 둘러싼 수많은 연관산업이 있다. 이 시장을 대부분 외부기업이 차지하고 지역기업은 단순 용역과 하도급만 담당한다면 평택경제에는 한계가 있다. 대기업을 유치하는 진짜 목적은 대기업 하나를 얻는 것이 아니라 그 기업을 중심으로 지역산업 생태계를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지식과 경험이 남는가
세 번째는 지식이다. 한 도시의 진짜 자산은 건물만이 아니다. 사람이 가진 지식과 경험이다. 평택에서 수십 년 동안 반도체 산업이 운영된다면 세계적인 수준의 환경관리 경험과 산업안전 지식, 물관리 기술, 에너지 기술, 교통과 도시계획 경험도 함께 축적되어야 한다. 그 지식이 대학으로 간다. 지역기업으로 간다. 시민사회에도 축적된다. 다시 새로운 기업과 정책을 만든다. 이 선순환이 만들어져야 한다. 그런데 주요 연구와 정책을 계속 외부기관에 맡기고 지역 내부에는 지식이 축적되지 않는다면 20년 뒤에도 평택은 계속 다른 도시의 전문가에게 자신의 문제를 설명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시민의 자산이 남는가
나는 앞으로 가장 중요한 질문이 이것이라고 생각한다. 시민에게 무엇이 남는가. 과거 산업사회에서는 기업성장의 과실이 주로 임금을 통해 시민에게 전달됐다. 그러나 AI 시대에는 노동소득만으로 충분하지 않을 수 있다. 기업의 생산성은 크게 높아지지만 일자리가 같은 속도로 증가하지 않는다면 시민이 경제성장의 과실에 참여할 새로운 통로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시민도 일정한 생산자산을 가져야 하지 않을까. 재생에너지 발전시설이 될 수도 있다. 시민펀드가 될 수도 있다. 지역공동자산이 될 수도 있다. AI와 반도체 산업의 성장으로 발생하는 새로운 경제적 가치 가운데 일정 부분을 지역의 장기적 자산으로 축적할 수도 있다. 내가 토론자료에서 강조한 것도 미래의 지역정책이 일자리를 만드는 것을 넘어 시민이 생산자산의 일부를 소유하고 그 수익을 지속적으로 공유할 수 있는 구조까지 고민해야 한다는 점이었다. 이것이 AI 시대의 경제자생력이다.
재주는 평택이 부리고 돈은 밖에서 가져가는가
우리에게 익숙한 속담이 있다. “재주는 곰이 부리고 돈은 왕서방이 가져간다.” 힘든 일과 부담은 한쪽이 감당하지만 결과로 만들어진 이익은 다른 사람이 가져가는 구조를 풍자한 말이다. 평택의 미래가 그렇게 되어서는 안 된다. 평택에 공장이 있다. 평택의 공간을 이용한다. 평택의 도로를 이용한다. 평택에 필요한 전력시설이 들어선다. 평택의 물을 사용한다. 도시는 산업을 지원하기 위해 교통과 주거, 교육과 환경 인프라를 확충한다. 시민도 그 변화의 부담을 함께 감당한다.
그런데 전문성과 기술, 사업기회와 장기적인 경제적 이익이 계속 외부로 빠져나간다면 평택은 무엇을 얻는가. 토론자료에서도 평택의 공간과 시민의 사회적 수용성을 바탕으로 사업을 하면서 외부자본이 투자하고 외부기업이 운영하며 수익까지 지역 밖으로 가져간다면 평택에는 시설만 남는다고 지적했다. 나는 반도체 산업에서도 같은 질문을 던지고 싶다. 재주는 평택이 부리고 돈은 밖에서 가져가는 구조가 되어서는 안 된다.
기업을 비판하자는 것이 아니다
여기에서 한 가지는 분명하게 해야 한다. 이 이야기는 삼성전자를 비판하거나 기업의 성장을 막자는 주장이 아니다. 정반대다. 세계적인 기업이 평택에서 더 성장했으면 한다. 삼성전자가 세계 AI·반도체 경쟁에서 성공하는 것은 대한민국과 평택 모두에게 중요한 기회다. 다만 기업의 성장과 도시의 성장을 연결하는 장치를 만들자는 것이다. 기업이 성장할수록 지역기업도 성장하고, 지역대학의 연구능력도 높아지고, 지역청년에게 새로운 기회가 생기며, 환경과 에너지 분야의 전문성도 축적되고, 시민에게 지속적인 자산이 남는 구조. 기업과 도시가 서로의 성장 기반이 되는 관계를 만들자는 것이다. 이것이 지속가능한 지역발전이다.
지역정책의 성적표를 바꿔야 한다
그래서 이제 지역정책을 평가하는 기준도 바뀌어야 한다. 기업 몇 개를 유치했는가. 투자를 얼마 받았는가. 국비를 얼마나 확보했는가. 일자리 몇 개를 만들었는가. 여기서 끝내서는 안 된다. 새로운 질문을 추가해야 한다. 그 결과 지역의 사람은 얼마나 성장했는가. 지역기업은 얼마나 성장했는가. 지역의 지식과 기술은 얼마나 축적됐는가. 발생한 부 가운데 얼마가 다시 지역으로 순환하는가. 그리고 시민의 자산은 얼마나 증가했는가. 이것이 AI 시대에 필요한 새로운 지역발전의 성적표라고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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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AI·반도체 산업도시의 미래를 상징하는 첨단 산업단지. 중요한 것은 기업이 얼마나 성장했는가가 아니라 그 성장으로 지역에 무엇이 남는가이다. |
삼성의 성장과 평택의 성장을 다시 연결해야 한다
삼성전자의 평택 투자는 평택에 주어진 엄청난 기회다. 하지만 기회는 저절로 자산이 되지 않는다. 정책이 필요하다. 제도가 필요하다. 지역의 준비가 필요하다. 기업의 성장에서 만들어지는 부와 기술과 사람을 지역의 장기적 역량으로 전환해야 한다. 그래서 앞선 1회 칼럼에서 던졌던 질문, “AI가 만들어낸 부는 누구의 것인가”는 이제 지역에서 이렇게 바뀐다. “그 부가 만들어지는 도시에는 무엇이 남는가.” 삼성이 성장한다고 평택이 자동으로 성장하는 것은 아니다. 삼성의 성장이 평택의 사람과 기업, 기술과 시민의 자산으로 이어질 때 비로소 평택의 성장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다음 질문이 나온다. 기업의 성장으로 만들어지는 새로운 경제적 가치를 시민의 자산으로 연결할 수 있다면 구체적으로 무엇부터 시작할 것인가. 나는 그 출발점 가운데 하나를 에너지에서 찾고 싶다. 다음 글에서는 묻고자 한다. 전기요금을 내는 시민이 발전소의 주주가 될 수는 없는가. 시민을 지원받는 사람에서 생산자산을 소유하는 사람으로 바꾸는 길을 살펴보고자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