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종건 | 꺠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 본지 발행인
당신이 배심원(juror)이라고 생각해보자. 한 여성이 잔혹하게 공격당했다. 목숨을 잃을 수도 있었던 심각한 사건이었다. 경찰(police)은 곧 한 여성을 용의자(suspect)로 지목한다. 이름은 엘런 플레인뷰(Ellen Plainview). 평범한 아내이자 어머니다.
그런데 경찰이 그녀를 의심한 데에는 이유가 있었다. 피해 여성은 엘런의 남편 마이크(Mike)와 관계가 있었다. 남편의 불륜(affair). 배신당한 아내. 질투(jealousy). 분노(anger). 그리고 남편과 관계를 맺었던 여성이 공격당했다.
여러분이 배심원이라면 어떤 생각이 들겠는가. “아내가 남편의 정부를 공격한 것 아닐까?” 충분히 가능한 이야기다. 검사(prosecutor)가 법정에서 가장 먼저 해야 할 일도 바로 이것이다. 범죄가 일어난 이유를 설명하는 것. 법률에서는 그것을 범행동기(motive)라고 한다. 엘런에게는 동기가 있어 보였다. 그러나 여기서 잠깐 멈춰야 한다. 동기(motive)가 있다는 것과 범행을 저질렀다는 것(guilt)은 같은가. 《The Wrong Woman》은 바로 이 작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지자 모든 사실이 달라졌다
수사는 사실(facts)을 찾아가는 과정이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은 사실만 보는 존재가 아니다. 사실을 연결해 이야기(narrative)를 만든다. 경찰의 머릿속에 하나의 이야기가 만들어졌다. 불륜(affair) → 질투(jealousy) → 분노(anger) → 공격(attack). 이 이야기는 너무 자연스러웠다. 그래서 이후 발견되는 사실들도 그 이야기 안으로 들어가기 시작한다. 평범했던 행동이 수상한 행동으로 보인다. 기억나지 않는 시간이 의심스러운 시간이 된다. 남편과의 갈등은 범행동기가 된다. 피해자와의 관계는 범죄의 연결고리가 된다.
이것을 수사심리학에서는 확증편향(confirmation bias)이라고 설명할 수 있다. 사람은 어떤 결론을 먼저 믿기 시작하면 그 결론을 뒷받침하는 사실은 크게 보고, 반대되는 사실은 작게 보는 경향이 있다. 수사에서는 더 위험하다. 처음의 질문은 이것이었다. “누가 이 여성을 공격했는가?” 그런데 어느 순간 질문이 달라진다. “엘런이 범인이라는 것을 보여주는 증거는 무엇인가?” 두 질문은 비슷해 보인다. 그러나 전혀 다르다. 첫 번째는 진실을 찾는 질문이다. 두 번째는 이미 만들어진 결론을 확인하는 질문이 될 수 있다.
이제 여러분이 검사라고 생각해보자
검찰(prosecution)은 배심원에게 여러 증거(evidence)를 제시한다. 피고인(defendant)에게는 범행동기가 있었다. 범행기회(opportunity)도 있었다. 그녀에게 불리한 정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도 있다. 그리고 결정적으로 한 목격자(eyewitness)가 등장한다. 말라 브래킷츠(Marla Bracketts)다. 말라는 밤에 차를 운전하다가 엘런을 봤다고 증언(testimony)한다. 엘런이 쓰레기통(dumpster) 근처에서 무엇인가를 닦고 버리는 모습을 보았다는 것이다. 그것은 범행에 사용됐을 가능성이 있는 금속 물체처럼 보였다는 취지였다.
이제 사건의 모양이 달라진다. 단순한 질투 이야기가 아니다. 동기(motive)가 있다. 기회(opportunity)가 있다. 정황증거(circumstantial evidence)가 있다. 목격증언(eyewitness testimony)까지 있다.
여러분이 배심원이라면 어떻게 하겠는가. 아마 상당수는 생각할 것이다. “이 정도면 엘런이 범인 아닌가.” 바로 여기서 영화는 우리를 붙잡는다. 그리고 질문한다. 정말 그런가.
“당신은 엘런을 봤습니까?”
법정에서 검사가 자기 증인에게 질문하는 것을 주신문(direct examination)이라고 한다. 검사는 말라에게 무엇을 보았는지 설명하게 한다. 말라의 증언이 끝나면 엘런에게 기회가 온다. 반대신문(cross-examination)이다. 여기서 엘런이 “당신은 거짓말하고 있습니다.”라고 외쳤다면 어떻게 됐을까. 말라는 간단히 대답하면 된다. “아닙니다.” 끝이다.
엘런은 다른 길을 선택한다. 얼마나 빠르게 운전하고 있었습니까? 질문한다. 별것 아닌 질문처럼 보인다. 그러나 좋은 반대신문은 결론부터 묻지 않는다. 결론을 만들어낼 작은 사실(small facts)부터 확보한다. 속도(speed). 거리(distance). 조명(lighting). 관찰시간(duration). 시야(visibility). 엘런은 하나씩 묻는다. 핵심 질문은 결국 이것이다. “당신이 거짓말했습니까?”가 아니라 “당신이 실제로 그것을 볼 수 있었습니까?” 이 차이는 크다.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증명할 필요는 없다
목격자의 증언을 공격하는 방법에는 적어도 두 가지가 있다. 첫째는 신빙성(credibility)이다. “이 사람을 믿을 수 있는가?” 둘째는 신뢰성·정확성(reliability)이다. “이 사람이 선의로 말하고 있더라도 실제로 정확하게 보았는가?” 사람은 정직하면서도 틀릴 수 있다. 어두운 밤이었다면? 자동차가 움직이고 있었다면? 관찰시간이 몇 초에 불과했다면? 거리가 멀었다면? 그 상황에서 사람의 얼굴뿐 아니라 손에 든 물건까지 정확히 식별할 수 있었을까?
이제 배심원의 질문이 바뀐다. 처음에는 “말라가 거짓말하는가?”였다. 이제는 “말라가 정말 볼 수 있었는가?”가 된다.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은 이런 작은 질문에서 시작한다.
엘런은 말로 싸우지 않고 보여준다
엘런과 벤(Ben)은 당시 상황을 재현(reconstruction)한다. 같은 장소를 지나가며 실제로 어느 정도 볼 수 있는지를 영상(video)으로 보여준다. 그리고 말라가 당시 보았다고 주장한 상황이 과연 가능한지를 배심원이 직접 생각하도록 만든다.
이 장면의 법률적 핵심은 단순한 영상이 아니다. “See for yourself.” “직접 보십시오.”라는 전략이다. 검사는 말할 수 있다. “목격자가 봤습니다.” 목격자도 말할 수 있다. “제가 분명히 봤습니다.” 엘런도 말할 수 있다. “그럴 리 없습니다.” 그러면 세 사람의 주장이 충돌한다.
그러나 배심원이 직접 재현된 상황을 보면 문제는 달라진다. 주장(argument)이 아니라 검증(verification)의 문제가 된다. 영화에서는 특히 벤이 현장에 들고 있던 표지조차 제대로 식별하기 어려운 상황을 이용해 말라의 관찰능력(ability to observe)에 의문을 던진다. 엘런은 배심원에게 “말라는 거짓말쟁이입니다.”라고 명령하지 않는다. 배심원이 스스로 생각하게 만든다. “저 상황에서 정말 저것을 볼 수 있었을까?” 좋은 반대신문의 힘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런데 말라에게는 또 하나의 문제가 있었다
엘런과 말라는 이전부터 서로를 알고 있었다. 두 사람 사이에는 좋지 않은 일이 있었다. 그렇다면 새로운 질문이 생긴다. 말라에게 엘런을 좋지 않게 볼 이유가 있었는가. 법률에서는 이를 편향(bias)이라고 한다. 증인이 피고인을 싫어한다고 해서 그 증언이 자동으로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배심원이 증인의 신빙성(credibility)을 판단할 때 중요한 요소가 된다. 이제 말라의 증언에는 두 개의 질문이 동시에 생긴다. 정말 볼 수 있었는가(Could she see it?). 그리고 엘런에게 편견을 가질 이유가 있었는가(Did she have a reason to be biased?). 처음에는 결정적으로 보였던 목격증언이 흔들리기 시작한다.
이제 다시 배심원이 되어보자
조금 전까지만 해도 사건은 명확해 보였다. 남편이 바람을 피웠다. 아내에게 질투할 이유가 있었다. 피해자가 공격당했다. 목격자가 엘런을 봤다고 했다.
그러나 이제 질문이 생긴다. 목격자는 실제로 정확하게 볼 수 있었는가. 그녀에게 엘런을 싫어할 이유는 없었는가. 경찰은 다른 가능성을 충분히 조사했는가. 수사기관이 엘런을 너무 일찍 범인이라고 생각한 것은 아닌가. 바로 이것이 형사재판에서 말하는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이다.
형사재판에서 피고인은 반드시 진범(real perpetrator)을 찾아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검찰이 피고인의 유죄(guilt)를 합리적 의심을 넘어(beyond a reasonable doubt) 입증해야 한다.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은 검찰에게 있다. 그러므로 엘런에게 필요한 것은 “진범은 이 사람입니다.”라는 완벽한 대답 이전에, “검찰이 말하는 이야기가 유일하게 가능한 설명입니까?”라는 질문이다.
그런데 더 무서운 진실이 기다리고 있었다
영화 후반부에 이르면 사건의 방향이 뒤집힌다. 엘런을 체포하고 관리하던 여성 경찰관 폴라 베이츠(Paula Bates)가 사건의 실제 가해자(real perpetrator)였음이 드러난다. 여기서 영화의 앞부분을 다시 생각하게 된다. 왜 폴라는 엘런에게 그렇게 냉정했을까. 왜 엘런이 도망치려 할 때 총을 겨누었을까. 그것은 단순한 경찰관의 직무수행(law enforcement)이 아니었다. 엘런이 감옥에 가는 것이 폴라의 계획에 필요했기 때문이다. 폴라는 마이크에게 집착(obsession)하고 있었다. 마이크와 관계가 있었던 피해자는 장애물이었다. 마이크의 아내인 엘런 역시 장애물이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폴라에게는 한 가지 강력한 무기가 더 있었다. 총이 아니었다. 경찰이라는 신분(authority)이었다.
범죄자가 공권력의 옷을 입고 있다면
이 영화에서 내가 가장 섬뜩하게 느끼는 지점이다. 처음 폴라는 폭력으로 엘런을 제거하지 않는다. 법(law)을 이용한다. 자신이 만들어놓은 범죄의 이야기가 경찰수사와 검찰기소로 이어지도록 한다. 엘런은 체포(arrest)된다. 피고인(defendant)이 된다. 법정에 선다. 국가가 그녀를 범인이라고 부르기 시작한다.
그런데 정작 진범은 그 국가기관 안에 있었다. 이것은 단순한 범죄자의 이야기가 아니다. 공권력 남용(abuse of authority)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법은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러나 법을 집행하는 사람이 자신의 욕망을 감추기 위해 그 권한을 사용한다면 어떻게 되는가. 강도 만난 사람을 구해야 할 사람이 오히려 강도의 편에 서 있는 상황이 된다. 더 무서운 것은 그 사람이 제복(uniform)을 입고 있다는 사실이다.
법으로 제거하지 못하자 총을 든다
영화 후반 폴라가 엘런에게 총을 겨누는 장면은 그래서 중요하다. 처음 폴라의 방식은 사실상 이랬다. 법을 이용해 엘런을 제거한다(Use the law to remove Ellen). 그러나 엘런이 진실에 가까워지면서 계획이 무너진다. 그러자 방식이 바뀐다. 폭력으로 엘런을 제거한다(Use violence to remove Ellen). 공권력(authority)이 실패하자 총(gun)이 등장한다. 나는 이 장면을 단순한 영화의 반전(twist)으로만 보고 싶지 않다. 법이 진실에서 멀어질 때 공권력과 폭력의 경계가 얼마나 위험하게 가까워질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장면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엘런의 이웃은 누구였는가
여기서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의 질문으로 돌아간다. 엘런은 길가에서 강도를 만난 사람이 아니다. 그녀는 법과 제도 속에서 강도 만난 사람이다. 경찰이 그녀를 의심한다. 검사가 그녀를 기소한다. 목격자가 그녀에게 불리한 말을 한다. 심지어 가까운 사람들까지 그녀의 결백을 의심하기 시작한다.
그때 엘런에게 필요한 사람은 “경찰이 잡았으니 이유가 있겠지.”라고 말하는 사람이 아니었다. 그녀의 말을 무조건 믿어주는 사람만도 아니었다. 필요했던 것은 함께 다시 확인해주는 사람이었다. 벤의 역할이 바로 여기에 있다. 벤은 엘런이 무조건 옳다고 외치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다시 현장에 간다. 다시 시간을 확인한다. 다시 거리를 잰다. 다시 운전해본다. 다시 묻는다. “정말 이 증언이 가능한가?”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이웃의 모습이다.
이웃은 내 말을 믿어주는 사람만이 아니다
우리는 흔히 연대(solidarity)를 “내 편이 되어주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진정한 연대는 그것보다 어렵다. 함께 사실을 확인하는 것이다. 억울하다는 말을 들었다고 무조건 상대방을 악인으로 규정하는 것도 위험하다. 반대로 국가기관이 판단했다는 이유만으로 그 결론을 그대로 믿는 것도 위험하다.
좋은 이웃은 묻는다. 무슨 일이 있었습니까. 기록은 어디에 있습니까. 그 말은 언제 처음 했습니까. 다른 설명은 가능하지 않습니까. 기관은 반대되는 증거도 조사했습니까. 이것이 나는 현대사회에서 필요한 검증하는 연대(verified solidarity)라고 생각한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피해자의 신분을 먼저 조사하지 않았다
누가복음의 선한 사마리아인(Good Samaritan) 이야기를 다시 생각해본다.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보고 제사장과 레위인은 지나갔다. 사마리아인은 멈췄다. 그런데 중요한 사실이 있다. 사마리아인은 그 사람이 왜 거기 쓰러져 있는지 모든 사실을 알고 난 뒤 돕기 시작한 것이 아니다. 먼저 가까이 갔다. 상처를 확인했다. 그리고 책임졌다.
오늘날 우리는 종종 반대로 행동한다. 누군가 국가기관의 조사를 받으면 묻는다. “경찰이 괜히 잡았겠어?” 누군가 기소되면 말한다. “검찰이 증거가 있으니까 기소했겠지.” 누군가 징계를 받으면 생각한다. “기관이 조사하고 결정했겠지.”
그러나 《The Wrong Woman》은 묻는다. 그 기관이 틀렸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더 나아가, 그 기관 안에 이해관계를 가진 사람이 있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법치주의(Rule of Law)는 국가를 믿으라는 말이 아니다
나는 이 영화에서 법치주의(rule of law)의 의미를 다시 생각한다. 법치주의는 경찰과 검찰과 행정기관이 항상 옳다고 믿으라는 원칙이 아니다. 오히려 반대다. 국가권력(state power)도 증거를 제시해야 한다. 국가도 절차(procedure)를 지켜야 한다. 국가의 판단도 반박(challenge)될 수 있어야 한다. 피고인에게는 방어권(right to defense)이 있어야 한다. 증인은 반대신문(cross-examination)을 받아야 한다. 검찰은 입증책임(burden of proof)을 져야 한다. 그리고 마지막까지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이 남는다면 국가가 처벌해서는 안 된다. 이것이 법치주의다. 시민이 국가를 믿어야 하기 때문에 절차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국가도 틀릴 수 있기 때문에 절차가 필요한 것이다.
《Citizen Jane》과 《The Wrong Woman》은 서로 반대편에서 만난다
제인 알렉산더(Jane Alexander)는 국가가 충분히 움직이지 않을 때 질문했다. “왜 수사하지 않는가.” 엘런 플레인뷰는 국가가 너무 확신할 때 질문한다. “왜 나만 범인이라고 생각하는가.” 제인은 흩어진 증거를 연결했다. Connect the evidence. 엘런은 잘못 연결된 증거를 분해했다. Deconstruct the evidence. 제인에게 필요했던 것은 집요함(persistence)이었다. 엘런에게 필요했던 것은 의심과 검증(skepticism and verification)이었다. 둘은 반대처럼 보인다. 그러나 결국 같은 곳에서 만난다. 증거가 먼저이고 결론은 나중이어야 한다(Evidence first, conclusion later).
시민운동에도 두 개의 눈이 필요하다
이것은 시민운동(civic activism)에도 중요한 문제다. 우리는 권력이 외면하는 사건을 끝까지 추적해야 한다. 그것이 《Citizen Jane》의 교훈이다. 그러나 동시에 우리가 믿고 싶은 결론에 맞추어 사실을 선택해서도 안 된다. 그것이 《The Wrong Woman》의 경고다. 그래서 시민에게는 두 가지 힘이 동시에 필요하다. Persistence — 끝까지 포기하지 않는 집요함. 그리고 Self-verification — 내가 틀릴 가능성까지 확인하는 자기검증. 집요함만 있고 자기검증이 없으면 확신은 독선이 될 수 있다. 자기검증만 있고 집요함이 없으면 정의는 쉽게 포기된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이제 다시 예수의 질문 앞에 선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Citizen Jane》은 한 가지 대답을 보여줬다. 사건이 끝날 때까지 떠나지 않는 사람. 《The Wrong Woman》은 또 하나의 대답을 보여준다. 모두가 그 사람을 범인이라고 할 때에도 사실을 다시 확인하는 사람. 나는 여기에 한 문장을 더하고 싶다. 이웃은 무조건 내 편을 들어주는 사람이 아니다. 내가 억울하게 쓰러져 있을 때 진실이 내 편인지 끝까지 확인해주는 사람이다. 그 사람이 때로는 기록을 찾아준다. 현장에 다시 가준다. 증언을 다시 확인한다. 기관에 질문한다. 그리고 모두가 지나간 자리에서 혼자 멈춰 말한다. “잠깐, 정말 이 사람이 범인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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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Wrong Woman》의 법정 장면. 모두가 한 사람을 범 인으로 지목할 때, 누가 다시 증거를 볼 것인가. |
어쩌면 오늘날 선한 사마리아인에게 가장 필요한 용기는 바로 이것인지도 모른다. 다수가 이미 결론을 내렸을 때, 국가기관이 이미 판단했을 때, 언론이 이미 이름을 붙였을 때, 그래도 한 번 더 사실을 확인하는 용기. 강도 만난 자에게 기름과 포도주를 붓는 것만이 이웃사랑은 아니다. 때로는 잘못 씌워진 이름을 벗겨주는 것도 이웃사랑이다. 그리고 법이 잘못된 사람을 향하고 있을 때, 그 앞에 멈춰 서서 “증거를 다시 봅시다.”라고 말하는 것. 나는 그것 역시 오늘날 시민이 실천해야 할 이웃사랑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