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연재 ㉙회]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청년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갔다 ― 교회와 기성세대가 청년의 상처 옆을 지나간 것은 아닌가 ―
    • 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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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에게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우리는 그가 왜 교회 문 앞에서 홀로 울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가

         ▲ “청년에게 왜 교회에 나오지 않느냐고 묻기 전에, 우리는 그가 왜 교회 문 앞에서 홀로 울고 있는지 물어본 적이 있는가?”(AI 재구성=주간시민광장)

      “요즘 청년들은 왜 교회를 떠나는가.” 교회에서 자주 듣는 질문이다. 신앙이 약해졌다고 말한다. 개인주의가 강해졌다고 한다. 세속문화에 빠졌다고도 하고, 인내심과 공동체 의식이 부족해졌다고도 한다. 그러나 질문을 뒤집어 보자. 청년들이 교회를 떠난 것인가. 아니면 교회와 기성세대가 먼저 청년들의 상처 옆을 지나간 것은 아닌가. 이 질문은 불편하다. 하지만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오늘의 청년들에게 적용한다면 피하기 어렵다.

      청년들은 어디에서 쓰러지고 있는가

      오늘의 강도 만난 자는 여리고 길에만 있지 않다. 취업게시판 앞에도 있다. 고시원과 원룸에도 있다. 계약직과 아르바이트 현장에도 있다. 학자금과 생활비를 걱정하는 대학생 가운데도 있고, 몇 년째 취업을 준비하면서 자신감을 잃어가는 청년 가운데도 있다. 직장을 얻어도 안심할 수 없다. 주거비를 감당해야 하고, 결혼과 출산은 점점 더 큰 결단이 된다. 친구들의 성공은 스마트폰을 통해 실시간으로 보인다. 누군가는 취업했다. 누군가는 집을 샀다. 누군가는 결혼했다. 누군가는 해외여행을 간다. 그 화면을 바라보며 한 청년은 묻는다. “나는 왜 아직 여기 있는가.” 기성세대는 그에게 말한다. “눈을 좀 낮춰라.”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 그러나 정말 그것으로 충분한가. 앞선 글에서 말했던 것처럼 최고급 빙상용 스케이트를 신겨도 바닥이 아스팔트라면 달릴 수 없다. 청년에게 더 열심히 달리라고 말하기 전에 우리는 그들이 어떤 바닥 위에 서 있는지를 먼저 보아야 한다.

      “우리 때는 더 힘들었다”는 말의 함정

      기성세대가 거짓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실제로 가난했다. 새벽부터 밤까지 일했고, 좁은 방에서 살았으며, 어려운 조건에서 가족을 일으킨 사람들이 많다. 그 경험은 존중받아야 한다. 그러나 부모 세대가 가난했다고 해서 오늘의 청년들이 겪는 어려움이 가벼워지는 것은 아니다.어느 세대가 더 힘들었는지를 겨루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에 겪는 고통을 이해해야 한다. 부모 세대의 가난과 청년 세대의 불안은 모습이 다를 뿐 모두 현실이다.

      문제는 자신의 성공 경험을 청년에게 그대로 적용할 때 발생한다. “나는 해냈는데 너는 왜 못하느냐.” 이 말에는 청년이 달리는 운동장의 변화가 사라져 있다. 그리고 실패는 순식간에 개인의 책임이 된다. 취업하지 못하면 노력 부족이고, 결혼하지 못하면 이기적이며, 교회에 나오지 않으면 믿음이 부족한 사람이 된다. 그렇게 우리는 구조의 문제를 개인의 품성 문제로 바꾸어 버린다.

      교회는 청년들에게 무엇을 물었는가

      여기서 교회도 자유롭지 않다. 교회는 청년들에게 묻는다. “요즘 왜 예배에 잘 안 나오니?” “봉사는 왜 하지 않니?” “청년부 활동은 왜 소극적이니?” 그러나 그보다 먼저 물어야 할 질문이 있다. “요즘 어떻게 살고 있니?” “취업 준비하면서 힘든 것은 없니?” “월세는 감당할 만하니?” “직장에서는 괜찮니?” “사람 때문에 힘들지는 않니?” “실패가 너무 두렵지는 않니?” “우리가 네 이야기를 들어줄까?” 청년이 교회에서 듣고 싶었던 것은 어쩌면 더 많은 교훈이 아니라 자신의 삶을 진지하게 물어주는 한 사람의 질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신앙을 말했지만 상처는 보지 못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에서 가장 불편한 사람들은 강도가 아니다. 제사장과 레위인이다. 그들은 종교를 몰랐던 사람들이 아니다. 오히려 누구보다 종교를 잘 알았던 사람들이었다. 그런데 쓰러진 사람을 보았고 지나갔다. 오늘 교회도 이 장면 앞에 서 있다. 청년에게 예배를 말하면서 그의 월세는 보지 못하고, 헌신을 말하면서 고용불안은 보지 못하며, 결혼을 권하면서 결혼과 주거가 감당해야 할 경제적 현실은 묻지 않는다면 어떨까. 청년에게 감사하라고 말하면서 그의 절망을 듣지 않고, 믿음으로 극복하라고 말하면서 그가 왜 무너졌는지를 묻지 않는다면 어떨까. 그것은 신앙이 틀렸기 때문이 아니다. 신앙의 언어가 사람의 상처에 도착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청년의 냉소에도 이유가 있다

      기성세대는 청년들의 냉소를 걱정한다. 정치를 믿지 않는다. 언론을 믿지 않는다. 기성세대를 믿지 않는다. 때로는 교회도 믿지 않는다.

      그러나 냉소를 비난하기 전에 물어야 한다. 그들은 무엇을 보고 냉소하게 되었는가. 말과 행동이 다른 어른을 보지는 않았는가. 정의를 말하면서 자기편의 잘못에는 침묵하는 모습을 보지는 않았는가. 사랑을 설교하면서 권력과 명예를 놓고 다투는 모습을 보지는 않았는가. 청년의 냉소를 모두 정당화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그 냉소에도 역사가 있다. 그 역사를 듣지 않고 “요즘 청년들은 문제다”라고 말하는 순간 대화는 끝난다.

      청년을 교회로 데려오는 것보다 먼저 해야 할 일

      그래서 청년 문제의 해결을 ‘교회 출석률 회복’으로 시작해서는 안 된다. 청년을 다시 데려오는 방법을 찾기 전에 청년에게 다시 이웃이 되는 방법부터 찾아야 한다. 취업을 준비하는 청년에게 지역의 기업과 전문가를 연결해 줄 수 있다. 혼자 사는 청년에게 함께 밥 먹을 공동체를 만들 수 있다. 주거 문제로 어려움을 겪는 청년을 위한 기금과 공간을 고민할 수도 있다. 실패한 청년이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멘토와 선배를 연결할 수 있다. 무엇보다 교회 안에 실패를 말할 수 있는 자리를 만들어야 한다. “취업에 떨어졌습니다.” “직장을 그만두었습니다.” “아무것도 하고 싶지 않습니다.” “내가 무엇을 위해 사는지 모르겠습니다.” 이 말을 해도 정죄받지 않는 공동체. 곧바로 충고하지 않고 먼저 들어주는 공동체. 그것이 청년에게 필요한 교회의 모습일 수 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사람을 목적지로 데려갔다

      사마리아인은 쓰러진 사람에게 “힘내십시오”라고 말하고 떠나지 않았다. 가까이 갔다. 상처를 싸맸다. 자기 짐승에 태웠다. 여관으로 데려갔다. 돈을 냈다. 그리고 다시 돌아오겠다고 했다.

      이웃사랑에는 비용이 들었다. 청년을 사랑한다는 말도 마찬가지다. 청년부 예산 몇 푼을 늘리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교회와 기성세대가 가진 공간, 사람, 경험, 돈, 관계망을 청년에게 내놓아야 한다. 사랑은 청년에게 더 열심히 살라고 요구하는 것이 아니라, 다시 살아볼 수 있는 조건을 함께 만드는 것이다.

      떠난 사람만 세지 말고 지나친 사람을 세어보자

      교회는 종종 통계를 본다. 청년부가 몇 명 줄었는가. 주일학교가 얼마나 감소했는가. 20·30대 교인이 얼마나 떠났는가. 필요한 질문이다.

      그러나 다른 통계도 필요하다. 취업에 실패한 청년을 몇 명 찾아갔는가. 혼자 밥 먹는 청년과 몇 번 식사했는가. 월세 때문에 힘든 청년을 몇 명 도왔는가. 실패하고 교회 문밖으로 나간 청년에게 몇 번 먼저 연락했는가. 떠난 청년의 숫자만 세지 말고 우리가 지나쳐 버린 청년의 숫자도 세어보아야 한다. 그 숫자를 보기 시작하면 청년 문제는 전혀 다르게 보인다.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들어가면서 교회 문 앞에 쓰러진 이웃은 왜 만나지 못했는가 AI 재구성주간시민광장

         ▲“우리는 하나님을 만나러 교회에 들어가면서, 교회 문 앞에 쓰러진 이웃은 왜 만나지 못했는가?”
      (AI 재구성=주간시민광장)

      청년들이 떠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지나갔다

      모든 청년이 강도 만난 자는 아니다. 모든 청년의 어려움을 기성세대 탓으로 돌릴 수도 없다. 청년에게도 선택과 책임이 있고, 때로는 도전과 인내가 필요하다. 그러나 그것을 말하기 전에 해야 할 일이 있다. 상처를 보는 것이다. 예수는 강도 만난 사람에게 먼저 책임을 따지지 않았다. 누가 잘못했는가보다 누가 이웃이 되었는가를 물었다.

      오늘 교회와 기성세대에도 같은 질문이 돌아온다. 청년들이 왜 떠났느냐고 묻기 전에, 우리는 왜 그들의 곁에 멈추지 않았는지를 물어야 한다. 청년의 신앙을 걱정하기 전에 그의 삶을 걱정해야 한다. 청년에게 교회로 돌아오라고 말하기 전에 교회가 먼저 청년의 삶으로 걸어가야 한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겠느냐.” 어쩌면 청년들은 멀리 떠난 것이 아니었을지도 모른다. 취업의 문 앞에, 작은 원룸 안에, 실패의 자리에서, 교회의 바로 옆에 쓰러져 있었는데 우리가 너무 바빠 그 곁을 지나갔는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이제 질문을 바꾸자. “청년들은 왜 우리를 떠났는가”가 아니라 “우리는 언제부터 청년들의 이웃이기를 멈추었는가.” 그 질문에서 다시 시작할 때 교회는 청년을 붙잡으려는 공동체가 아니라, 청년이 다시 살아갈 힘을 얻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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