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연재 ⑨]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법은 행정의 방패인가,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기준인가 ― 적법한 행정과 정의로운 행정은 언제 갈라지는가

    • 조종건  본지 발행인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조종건  본지 발행인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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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행정기관과 다투다 보면 시민이 가장 자주 듣는 말이 있다. “법에 따라 처리했습니다.” “규정상 어렵습니다.” “절차에는 문제가 없습니다.” 이 말은 강하다. ‘법’이라는 단어가 등장하는 순간 시민은 자신의 주장이 잘못된 것처럼 느끼기 쉽다. 공무원은 법을 알고 시민은 법을 잘 모른다는 정보의 격차까지 더해지면, “법대로 했다”는 한마디는 논쟁을 끝내는 최종 판결처럼 작동하기도 한다.

      그러나 여기서 질문해야 한다. 법은 행정기관이 시민의 질문을 막기 위한 방패인가, 아니면 행정권으로부터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한 기준인가. 법치행정의 본질을 이 질문에서부터 다시 생각해야 한다.

      법대로 했다는 말로 충분한가

      물론 행정은 법에 따라야 한다. 공무원이 개인적 호불호에 따라 허가하고 처분한다면 그것이야말로 위험한 사회다. 그러나 법에 따른다는 것과 법조문을 기계적으로 적용한다는 것은 같은 말이 아니다. 행정에는 재량이 존재하고, 그 재량에도 한계가 있다. 같은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면 시민에게 지나치게 큰 희생을 요구해서는 안 되고, 합리적인 이유 없이 비슷한 사람을 다르게 취급해서도 안 된다. 행정기관이 오랫동안 형성한 신뢰를 하루아침에 뒤집어 시민에게 예상하지 못한 피해를 주는 것도 신중해야 한다.

      그래서 법치행정에는 단순한 조문보다 더 깊은 질문이 따라붙는다. 그 처분은 필요했는가. 그 불이익은 지나치지 않았는가. 다른 방법은 없었는가. 같은 상황의 다른 시민에게도 똑같이 적용했는가. 당사자의 이야기를 충분히 들었는가.

      법은 행정이 이 질문들로부터 도망가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이 질문들을 끝까지 하도록 행정을 붙잡아 두기 위해 존재한다.

      적법성과 정의가 갈라지는 순간

      한 시민이 오랫동안 어떤 시설을 운영해 왔다고 생각해 보자. 행정기관도 이를 알고 있었고, 때로는 협력하거나 지원했다. 그런데 담당자가 바뀌고 정책이 달라졌다는 이유로 어느 날 갑자기 사용을 중단하라고 한다. 행정기관은 말할 수 있다. “법적 권리가 보장된 것은 아닙니다.” 그 말이 법률적으로 맞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으로 충분한가. 그동안 행정이 어떤 태도를 취했는지, 시민이 무엇을 신뢰했는지, 갑작스러운 결정으로 시민에게 어떤 피해가 발생하는지, 다른 대안은 없는지까지 살펴야 한다.

      그것이 행정이다. 그런 검토 없이 단지 처분 근거가 되는 조문 하나를 찾아 시민에게 내민다면, 법은 시민을 보호하는 기준이 아니라 행정의 결정을 정당화하는 방패로 변질될 수 있다. 법치주의가 무서운 이유가 여기에 있다. 법치주의가 제대로 작동하면 권력을 묶는다. 그러나 잘못 사용되면 권력이 법이라는 이름 뒤에 숨는다.

      강도 만난 자에게 “절차는 지켰다”고 말할 것인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생각해 보자. 한 사람이 강도를 만나 쓰러졌다. 그 앞에서 누군가 이렇게 말했다고 가정해 보자. “내가 당신을 때린 것은 아니다.” “내게 당신을 구조해야 할 법적 의무가 있는 것은 아니다.” “나는 규정을 위반하지 않았다.”

      그 말들이 모두 맞다고 하더라도 강도 만난 사람의 상처가 사라지는 것은 아니다. 예수의 질문은 “누가 법을 위반했느냐”에서 멈추지 않았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었느냐.”

      바로 여기에서 법과 정의의 차이가 드러난다. 법은 최소한의 경계를 정한다. 그러나 정의는 그 경계 안에서 인간이 어떻게 취급되고 있는가를 묻는다. 행정이 “우리는 절차를 지켰다”고 말하는 순간에도 시민이 부당하게 무너지고 있다면 질문은 끝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때부터 시작된다.

      절차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가

      사전통지, 의견제출, 이유제시, 청문, 이의신청, 행정심판 같은 절차는 공무원의 업무를 복잡하게 만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다. 행정권 앞에 홀로 서는 시민을 보호하기 위해 존재한다. 그런데 현실에서는 때때로 순서가 뒤집힌다. “통지했으니 됐다.” “의견제출 기간을 줬으니 됐다.” “이유를 적었으니 됐다.” 형식적으로는 모두 맞을 수 있다.

      그러나 시민이 무엇 때문에 불이익을 받는지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고, 제출한 의견이 실질적으로 검토되지 않았으며, 처분의 이유가 추상적인 몇 문장에 불과하다면 그것을 진정한 절차적 정의라고 할 수 있는가. 절차의 존재와 절차의 실질은 다르다. 시민에게 말할 기회를 주는 것과 시민의 말을 실제로 듣는 것도 다르다.

      행정에는 ‘이길 권리’보다 ‘고칠 의무’가 먼저다

      행정기관과 시민 사이에 분쟁이 발생하면 이상한 현상이 생긴다. 어느 순간부터 문제의 중심이 “처분이 정말 옳았는가”에서 “행정기관이 소송에서 이길 수 있는가”로 이동한다.

      그러나 행정기관은 사기업이 아니다. 시민을 상대로 소송에서 이기는 것이 존재 목적일 수 없다. 새로운 증거가 발견되었다면 다시 살펴야 한다. 사실관계를 잘못 파악했다면 바로잡아야 한다. 법률해석이 잘못되었다면 고쳐야 한다. 처분 당시에는 알지 못했던 사정이 확인되었다면 재검토해야 한다. 그것은 행정의 권위가 무너지는 일이 아니다. 행정이 스스로 잘못을 고칠 수 있다는 것이 오히려 법치주의의 힘이다. 잘못된 처분을 끝까지 방어하는 행정이 강한 행정이 아니다. 잘못을 발견했을 때 시민이 법원까지 가지 않아도 스스로 바로잡는 행정이 강한 행정이다.

      재량권은 마음대로 결정할 권리가 아니다

      행정에는 재량이 필요하다. 법이 세상의 모든 상황을 미리 규정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재량은 행정기관이 원하는 대로 결정할 수 있다는 뜻이 아니다. 오히려 재량이 클수록 설명의 책임도 커져야 한다. 왜 A는 허용하면서 B는 허용하지 않았는가. 왜 어제까지 가능했던 일이 오늘은 불가능해졌는가. 왜 가장 강한 처분을 선택했는가. 덜 침해적인 방법은 검토했는가. 시민에게 발생할 손해와 행정목적 사이의 균형을 따져보았는가. 이 질문에 답하지 못하면서 “재량사항입니다”라고 말한다면 재량은 권한이 아니라 책임 회피의 언어가 된다.

      정의로운 행정은 약자의 편에 서야 하는가

      여기서 가장 어려운 질문이 나온다. 적법성과 정의가 충돌하는 순간 행정은 누구의 편에 서야 하는가. 답은 “무조건 시민 편”도 아니고 “무조건 행정 편”도 아니다. 행정이 서야 할 곳은 헌법과 법률이 보호하려는 공익과 기본권의 편이다. 시민의 요구라고 해서 모두 옳은 것은 아니다. 특정 시민의 요구가 다른 시민의 안전이나 권리를 침해한다면 행정은 이를 제한해야 한다. 그러나 바로 그렇기 때문에 행정에는 더 높은 설명책임이 요구된다. 힘없는 시민이라는 이유로 무조건 들어주라는 것이 아니다. 힘없는 시민이라도 권력 앞에서 동등한 인간으로 대우하라는 것이다. 그것이 법치주의다.

      법은 권력에게 더 엄격해야 한다

      시민은 원칙적으로 법이 금지하지 않은 일을 할 수 있다. 그러나 행정권은 다르다. 행정은 국민의 자유와 재산, 생업과 권리를 제한할 수 있는 강력한 힘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법적 근거와 정당한 절차가 요구된다. 따라서 법은 시민을 향한 채찍이기 전에 권력을 묶어 두는 끈이어야 한다. 그런데 법이 시민에게만 엄격하고 행정기관의 판단에는 관대해지는 순간 법치주의의 방향은 뒤집힌다.

      시민에게는 하루의 기한도 엄격히 요구하면서 행정기관의 지연에는 관대하고, 시민에게는 증거를 요구하면서 행정의 판단 근거는 공개하지 않으며, 시민의 작은 잘못에는 원칙을 말하면서 행정의 오류에는 “업무상 착오”라고 한다면 시민은 법을 신뢰하기 어렵다. 법의 권위는 엄격함에서 생기는 것이 아니다. 같은 원칙을 권력에게도 적용할 때 생긴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법을 어떻게 사용하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법을 무시하는 사람이 아니다. 오히려 오늘의 선한 사마리아인은 법을 본래의 자리로 돌려놓는 사람이다. 법을 약자를 몰아붙이는 도구가 아니라 권력으로부터 시민을 보호하는 장치로 사용하는 사람이다. 행정기관이 이유를 설명하도록 요구하고, 필요한 정보의 공개를 요구하고, 과도한 처분에는 비례를 묻고, 서로 다른 처우에는 평등을 묻고, 행정이 만들어낸 신뢰를 뒤집을 때에는 그 책임을 묻는 사람이다. 그리고 시민이 홀로 감당할 수 없다면 그 곁에 함께 선다.

      지난 ⑧회에서 물었다. 법적으로 다툴 권리는 있지만 실제로 다툴 힘이 없는 시민에게 우리는 어떤 이웃이 되어 줄 것인가. ⑨회에서는 한 걸음 더 나아가 묻는다. 그 시민이 왜 처음부터 그토록 힘겨운 싸움을 해야 했는가. 행정이 스스로 듣고, 설명하고, 다시 검토하고, 잘못을 바로잡았다면 법원까지 갈 필요가 없었던 사건은 얼마나 많았을까.

      법은 방패가 아니라 거울이어야 한다

      행정기관이 시민의 질문을 받을 때마다 법조문을 방패처럼 들어 올린다면 시민은 행정과 대화할 수 없다. 법은 행정이 시민에게 내미는 방패가 되어서는 안 된다. 오히려 행정이 자신의 결정을 비추어 보는 거울이어야 한다. 우리의 처분은 필요한가. 과도하지 않은가. 공정한가. 충분히 설명했는가. 시민의 이야기를 들었는가. 잘못되었다면 고칠 준비가 되어 있는가.

      이 질문을 스스로 던질 수 있을 때 비로소 행정은 권력에서 공공서비스로 돌아온다. 예수의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오늘의 행정에 던지는 질문도 결국 여기에 있다. “법대로 했는가”만 묻지 말라. “그 법을 집행하는 동안 강도 만난 자를 또다시 길 위에 버려두지는 않았는가”를 물어라. 법은 행정의 방패가 아니다. 법은 시민의 권리를 지키기 위해 행정권에 세워놓은 경계선이다. 그리고 정의로운 행정은 그 경계선의 최소치만 지키는 행정이 아니다. 그 경계선 안에서 끝까지 사람을 보는 행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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