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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설가 현종호 |
(제7회)-1
어머니마저 잃고 피폐해진 몸을 가까스로 추슬러가며 의금부에서 풀려난 지 한 달 만에 도원수에게 신고를 마치고 나서도 권율이 임지와 직책을 정해주지 않은 탓에 대역죄인 이순신은 인적 끊어진 조선의 연안과 폐허로 전락한 포구와 버려진 섬진강 강가 마을들을 부초처럼 한참 홀로 떠돈다.
어느새 다시 밤이었다. 까닭 없이 웃는 듯, 안쓰러워 서글피 우는 듯 저 높이 멀리서 기이한 웃음으로 칠흑 같은 어둠 속을 아슬아슬하게 비추는 달이 그는 고마웠다. 한 걸음 멀어지면 한 걸음씩 따라오며 어렵사리 그래도 밤길을 보여주는 초승달이 그나마 희미한 빛이라도 흘려주니 그저 고마울밖에.
한양에서 초계로 내려오는 한 달 동안 각 고을의 수령들과 아전들과 백성들이 그를 매번 환대했던 것만은 아니다. 폭우 속에서 엎어지고 자빠지며 악양(하동군 악양면)으로 가 이정란의 집을 간신히 찾아가선 봉변 아닌 봉변을 맛보아야 했던 그였다. 이정란의 집에는 김덕령의 동생 김덕린(金德麟)이 빌려 살고 있었는데, 누명을 뒤집어쓰고 김덕령이 억울하게 죽어간 탓에 비에 흠뻑 젖은 몸으로 야밤에 극심한 수모를 겪어야 했고, 서인 계열의 당파와 얽혀져(굳이 따지자면 이순신은 동인 계열이었다) 문전박대를 당하고 집 밖에서 떨며 밤을 새우는 경우도 허다했었다. 어느 고을들에선 어명을 거역하고 백의종군하는 죄인으로서 때때로 굴욕을 맛보아야 했었다. 변변한 잠자리를 끝내 구하지 못한 채, 버려진 객사나 종들의 허름하고 축축한 초막(草幕)에서 주린 배를 움켜쥐고 혼자서 잠드는 밤마다 코피를 심하게 쏟았고, 곽란으로 흘러내린 식은땀은 차갑고 불편한 잠자리를 매번 깊이 적셨다.
차디찬 바닥에 누워 선잠을 자다가 아주 이상한 느낌에 눈을 뜨면 구렁이들이 그의 눈앞에서 똬리를 틀고 혀를 날름거리고 있는 것이었다. 춥디춥고 이상한 냄새로 가득한 외양간에서 소와 함께 선잠을 자고 굶주린 구렁이들과 같이 지새우던 어둠들. 뼈 마디마디가 시리고 욱신거리는 아픔 속에서, 끼니를 때우진 못한 채, 뱃가죽을 부여잡고 추위에 떨며 시종 허덕이던 날들. 아~ 다시는 떠올리고 싶지 않은 종군의 기억들.
후덥지근하다 못해 푹푹 찌는 날이었다. 숨 막히는 더위는 오늘도 물러날 기미가 아예 없었다. 삼복지간(三伏之間)의 더위를 땡볕이 더욱 뜨겁게 달구었다. 은빛으로 무자비하게 끓어오르는 산맥의 능선들은 가마솥더위에 아침부터 헐떡거리고, 맥빠진 물상들은 뙤약볕 아래 줄곧 흐느적거리며 속절없이 타들어만 갔다. 털 다 빠지고 굶을 대로 굶어서 곧 쓰러질 듯 비틀거리는 그의 비루먹은 짐말은 말방울 소리만 청아하게 울려댈 뿐이었다. 도원수를 향해 한 걸음 한 걸음 길을 가는 그 앞에 그의 원흉 원균이 몇 번이고 불쑥 나타나 길을 막아서며 종군하는 자기를 한껏 비웃어댔다.
“임금한테 같이 장계를 올리기로 해놓고 네놈이 매번 먼저 올려서 내 공을 가로챈 대가를 지금 톡톡히 치르고 있는 거다, 이 썩을 놈아…….”
허깨비인가…… 또 그 헛것이…….
“내가 올려보낸 수급이 네놈이 올려보낸 것보다 열 배는 더 많았다, 이 우라질 놈아!”
또 그 허깨비란 말인가…….
조정에 바친 적의 수급을 놓고 말할 것 같으면 원균이 단연 으뜸이었다. 수급으로 따질 것 같으면, 이순신은 뭐라 그에게 반박할 여지가 없는 것이었다.
못 견디게 푹푹 찌는 무더위 속에서 헛것이 자꾸 보이고, 초계가 가까워지면서 식은땀이 시나브로 흘러내렸다. 삼도수군통제사 자리마저 동네 후배인 이순신에게 빼앗겨버린 원균은 와신상담 재기를 도모하며 분노를 키우고 또 키워갔을 것이었다.
기진맥진해진 몸과 진정되지 않는 마음을 꾸역꾸역 추슬러 초계로 향하는 중죄인 이순신의 흐릿해진 머릿속에서 난중일기가 의식의 흐름으로 다시 써지고 있었다.
일찍 조식을 먹고 길에 올라 구례에 이르니 금부도사 이사빈이 먼저 와 있었다. 인적이 끊어진 구례에서 맞는 밤은 무척이나 쓸쓸하고 허망했다. 쓸쓸한 객주 집 대문간에 딸린 행랑방에 앉아 중죄인 이순신은 혼자서 술을 마셨다. 혼자서 술을 마시며 먼저 가신 어머니를 씁쓸히 떠올렸다. 허전하고 쓰린 속을 달래는 덴 술만 한 게 없었다. 안주도 없이 혼자서 마시는 술이라 속이 점점 타들어 갔다.
손인필의 집에 얼마간 머무는데, 구례 현감 이원춘이 급히 찾아와서 중죄인 이순신을 위로하며 나름 정성껏 모셨다. 이원춘은 금부도사에게도 거듭 술을 권하며 정성을 다해 대접해줘서 고마운 마음 그지없었다. 한때 신립 장군 휘하에서 왜놈들을 물리친 공이 있었고, 송강 정철의 문하로 들어가 이젠 체찰사 정철의 막하에 있는 사람으로, 당파를 떠나 어명을 거역한 죄인에게 쏟는 그의 정성이 무척 고마웠으나 이순신은 까닭 없이 밀려드는 비애감에 다시 젖어 든다.
아침에 길을 떠나 순천 송치고개 아래에 이르니, 현감 이원춘이 아랫사람을 보내 또 점심밥을 지어 먹고 가게 하였다. 고질적인 토사곽란으로 시달리는 그를 배려해서인지 조촐한 밥상엔 그가 즐겨 먹는 무장아찌와 멸치젓, 좁쌀 죽과 북엇국이 정갈하게 차려져 있었다. 입안에 착착 감겨오는 음식으로 허기진 배를 채우는 식도락의 기쁨이 컸지만 슬픔이 곧 임진년의 파도처럼 그에게 다시 밀려온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이어가는 동안 몸집을 한층 키우고 훨씬 포악해진 적들이 칠천도 앞바다로 밀려들고 있던 것이었다.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이행하는 동안 조선 땅을 반으로 나눠 가지려는 ‘명’과 ‘왜’의 협상이 마침내 결렬되고 만다. 강화협상이 결렬되자 사거리를 대폭 늘리고 성능을 극대화한 조총으로 무장한 13만의 왜군이 정유년 7월에 조선으로 다시 쳐들어오니, 이것이 정유재란이다.
【편집부 해설|제7회-1】
제7회-1은 영웅 이순신의 ‘가장 낮은 시간’을 정면으로 다룬다.이 회차에서 전쟁은 더 이상 포성과 함포로 그려지지 않는다. 대신 유랑, 굴욕, 병마, 환영, 그리고 모친의 죽음이라는 개인의 내면 전쟁으로 치환된다.
의금부에서 풀려난 지 한 달. 그러나 이순신에게 자유는 없었다. 도원수 권율은 그에게 직책도, 임지도 주지 않았다. 그 결과 이순신은 국가로부터도, 군대로부터도 유예된 존재로 조선의 연안을 떠돈다. 버려진 객사, 축축한 초막, 외양간, 행랑방은 단순한 배경이 아니라 국가가 그를 어떻게 대했는가를 보여주는 공간적 은유다.
특히 이 회차는 ‘몸의 붕괴’를 집요하게 그린다. 곽란, 코피, 식은땀, 환영, 허깨비, 극심한 탈진. 이는 단순한 병세가 아니라 정신과 신념이 한계까지 몰린 상태를 상징한다. 원균의 환영이 반복적으로 등장하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그것은 외부의 적이 아니라 이순신 내부에서 끓어오르는 분노·억울함·패배감의 형상화다.
구례 현감 이원춘의 환대 장면은 짧지만 중요하다. 당파와 신분을 넘어 한 인간을 인간으로 대하는 태도는, 국가가 버린 장수를 민간이 품어준 상징적 장면이다. 그러나 그 따뜻함조차 이순신의 상실을 치유하진 못한다. 왜냐하면 이미 그는 어머니를 잃었기 때문이다.
이 회차의 핵심은 명확하다. 이순신은 이 시점에서 나라를 구할 장수가 아니라, 먼저 ‘무너지지 않고 살아남아야 할 인간’이 된다.
【본문 용어 해설】
■ 의금부(義禁府) State Tribunal / Royal Investigation Bureau: 조선 시대 중죄인을 심문·처벌하던 최고 사법기관.
■ 도원수(都元帥) Supreme Commander: 전시 최고 군사 지휘관. 모든 군권을 총괄.
■ 초계(草溪) Chogye (place name): 경남 합천 일대. 권율 도원수가 주둔하던 지역.
■ 수령(守令) local magistrate: 각 고을의 행정·사법 책임자.
■ 아전(衙前) local clerk: 수령을 보좌하던 실무 하급 관리.
■ 객사(客舍) guesthouse / official lodge: 관원이 공무 중 묵던 관영 숙소.
■ 초막(草幕) hatched hut: 풀로 엮어 만든 임시 거처. 빈곤·유랑의 상징.
■ 곽란(霍亂) acute gastrointestinal illness: 격심한 설사·구토를 동반한 급성 병증.
■ 종군(從軍) accompanying the army: 군을 따라 전쟁에 참여함. 백의종군과 연결됨.
■ 삼복지간(三伏之間) peak summer heat: 일 년 중 가장 무더운 시기.
■ 물상(物象) living creature / thing: 자연물·생명체 전반을 가리킴.
■ 수급(首級) enemy head / war trophy: 전공을 증명하기 위해 베어낸 적의 머리.
■ 시나브로(—) gradually / little by little: 모르는 사이에 조금씩 스며들듯.
■ 와신상담(臥薪嘗膽) enduring hardship for revenge: 복수를 위해 고통을 참고 때를 기다림.
■ 구례(求禮) Gurye: 전남 동부 지역의 고을.
■ 객주집(客主家) inn / merchant lodge: 상인·나그네가 묵던 민간 숙소.
■ 행랑방(行廊房) servants’ quarters: 대문 옆 하인 거처. 가장 낮은 공간.
■ 손인필(孫仁弼) Son In-pil: 구례 지역 인물. 이순신을 머물게 한 집 주인.
■ 구례 현감 이원춘(求禮縣監 李元春) Magistrate Yi Won-chun: 구례 고을 수령. 이순신을 배려한 인물.
■ 금부도사(禁府都事) State Tribunal officer: 의금부 소속 실무 관리.
■ 체찰사(體察使) Inspector-General: 전시 지역 군·정을 감찰하던 파견관.
■ 막하(幕下) under one’s command: 장수나 고관의 휘하.
■ 칠천도(漆川島) Chilcheondo Island: 정유재란 당시 참패가 벌어진 해역.
【현대적 의미|제7회-1】
제7회-1은 오늘의 사회에 매우 날카로운 질문을 던진다.
1. 국가는 공로를 기억하지 않는다
공을 세웠다는 이유로 보호받지 않는다. 권력이 필요할 때는 쓰고, 불편해지면 유예한다. 오늘날 공공·조직 사회에서도 반복되는 구조다.
2. 가장 위험한 순간은 ‘싸울 자격조차 박탈될 때’
이순신은 패배자가 아니다. 그러나 직책이 없고, 명령도 없고, 소속도 없다. 이 상태가 개인을 가장 빠르게 붕괴시킨다.
3. 연대는 제도보다 인간에게서 나온다
구례 현감, 객주 집, 행랑방의 밥상. 위기는 언제나 아래에서 인간적 연대로 버텨진다.
4. 영웅도 회복의 시간이 필요하다
이순신의 위대함은 초인성에 있지 않다. 무너질 듯 무너지고도 다시 걸어 나왔다는 점에 있다.
5. 정유재란의 전조는 이미 ‘사람을 버리는 정치’였다
정유재란은 전쟁의 실패이기 전에 사람을 소모품으로 취급한 정치의 실패였다.
작가 소개
현종호 (소설가)
• 평택고등학교, 중앙대학교 외국어대학 영어학과 조기졸업
• 명진외국어학원 개원(원장 겸 TOEIC·TOEFL 강사)
• 영어학습서 《한민족 TOEFL》(1994), 《TOEIC Revolution》(1999) 발표
• 1996년 장편소설 『P』 발표
• 1998년 장편소설 『가련한 여인의 초상』, 『천국엔 눈물이 없다』 발표
• 전 국제대학교 관광통역학과 겸임교수 역임
• 현재 평택 거주, 한국문인협회 소설가로 활동 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