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조종건 칼럼연재 ⑩]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인가》 시민의 침묵은 동의가 아니다 ― 말할 힘을 잃은 사람의 목소리를 민주주의는 어떻게 들어야 하는가
    • 조종건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본지 발행인
      조종건 · 깨어있는시민과의동행 사무총장
                   · 본지 발행인


      민주주의는 시민에게 말할 자유를 준다. 민원을 제기할 수 있고, 정보공개를 청구할 수 있으며, 부당한 행정처분에 이의를 제기할 수도 있다. 행정심판과 행정소송의 문도 열려 있다. 그래서 우리는 쉽게 말한다. “억울하면 말하면 되지 않는가.” “부당하면 민원을 넣으면 되지 않는가.” “정말 문제가 있다면 소송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 말에는 매우 위험한 전제가 숨어 있다. 모든 시민에게 말할 힘이 있다는 전제다. 과연 그런가. 민주주의에서 가장 위험한 사람은 목소리가 큰 사람이 아니다. 어쩌면 가장 위험한 상황은 억울하지만 말할 힘조차 잃어버린 사람이 보이지 않게 되는 것이다.

      왜 사람들은 싸우지 않는가

      권리를 침해당했다고 모든 사람이 싸우는 것은 아니다. 누군가는 공무원에게 몇 차례 설명하다 포기한다. 누군가는 정보공개청구를 했다가 비공개 통지를 받고 돌아선다. 누군가는 행정심판을 알아보다 복잡한 서류 앞에서 멈춘다. 누군가는 변호사 비용을 듣고 소송을 포기한다. 또 누군가는 두려워한다. “괜히 문제를 제기했다가 더 불이익을 받으면 어떡하지.” “지역에서 계속 살아야 하는데 관계가 틀어지면 어떡하지.” “내가 나서면 이상한 사람으로 보이지 않을까.” 그래서 침묵한다. 그러나 그 침묵을 동의라고 해석해서는 안 된다. 침묵은 때로 동의가 아니라 지침이고, 두려움이며, 포기이고, 무력감이다.

      포기한 사람은 통계에서 사라진다

      행정기관은 민원 건수를 집계할 수 있다. 행정심판 건수를 알 수 있고 소송 건수도 알 수 있다. 그러나 통계에 잡히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민원조차 넣지 못한 사람이다. 첫 번째 답변을 받고 포기한 사람이다. 변호사 사무실 문턱에서 돌아선 사람이다. 행정기관과 다투는 것 자체가 두려워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사람이다. 이들은 행정심판 사건번호도 없고 소송 사건번호도 없다. 그래서 제도는 이들을 발견하기 어렵다. 그리고 어느 순간 이렇게 말한다. “별다른 민원이 없었다.” 그러나 민원이 없었다는 사실과 문제가 없었다는 사실은 전혀 같은 말이 아니다. 이 차이를 이해하지 못하는 행정은 침묵을 만족으로 오해하게 된다.

      강도 만난 자는 소리칠 힘조차 없었다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다시 읽어보자. 강도 만난 사람은 길에 쓰러져 있었다. 예수는 그 사람이 제사장에게 민원을 제기했다고 말하지 않는다. 레위인에게 자신의 권리를 주장했다고도 하지 않는다. 그는 그저 쓰러져 있었다. 여기에는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다. 가장 도움이 필요한 사람은 도움을 요청할 힘조차 없을 수 있다는 사실이다.

      사마리아인은 요청서를 받은 뒤 움직이지 않았다. 먼저 보았다. 다가갔다. 상처를 발견했다. 그리고 행동했다. 오늘의 민주주의도 바로 이 지점에서 시험받는다. 목소리를 내는 시민에게 답변하는 것만으로 충분한가. 아니면 목소리를 낼 수 없는 시민을 먼저 발견할 책임까지 있는가.

      민주주의는 목소리의 크기를 세는 제도가 아니다

      현실의 정치와 행정에서는 목소리가 큰 집단이 유리한 경우가 많다. 조직이 있는 사람은 집단적으로 요구할 수 있다. 전문가를 고용할 수 있는 사람은 논리적으로 대응할 수 있다. 언론과 접촉할 수 있는 사람은 자신의 억울함을 사회적 의제로 만들 수 있다.

      그러나 혼자 있는 시민은 어떠한가. 고령자, 장애인, 영세상인, 농민, 비정규직 노동자, 작은 시민단체, 법률지식이 없는 평범한 주민에게도 똑같이 “의견을 제출하십시오”라고 말하는 것으로 충분한가.

      형식적으로는 평등하다. 그러나 실제로는 다르다. 한 사람에게는 전화 한 통이면 해결되는 일이 다른 사람에게는 몇 달의 싸움이 될 수 있다. 한 사람에게는 변호사 비용이 부담되지 않지만 다른 사람에게는 한 번의 상담비도 부담이 된다. 따라서 민주주의는 말할 기회의 평등에서 멈춰서는 안 된다. 말할 수 있는 능력의 불평등까지 보아야 한다.

      권리는 가장 끈질긴 사람에게 주는 상이 아니다

      시민이 행정기관을 상대로 끝까지 싸워 자신의 권리를 인정받았다고 생각해 보자. 우리는 그 사람에게 박수를 보낼 수 있다. 그러나 동시에 물어야 한다. 왜 그 권리를 인정받기 위해 그렇게까지 싸워야 했는가. 10번 민원을 넣은 사람만 답을 듣고, 행정심판까지 간 사람만 다시 검토받으며, 소송을 제기한 사람만 자신의 권리를 되찾는다면 그것은 정상적인 권리구제 체계인가.

      권리는 시민이 끈질기게 싸워 얻어내는 포상물이 아니다. 권리는 처음부터 존중되어야 할 시민의 지위다. 끝까지 싸운 한 사람의 승리보다 더 중요한 것은 싸울 힘이 없었던 아흔아홉 명이 왜 사라졌는지를 묻는 것이다.

      행정은 왜 침묵하는 사람을 찾아야 하는가

      좋은 행정은 민원을 잘 처리하는 행정만을 뜻하지 않는다. 더 좋은 행정은 민원이 발생하기 전에 시민의 어려움을 발견하는 행정이다. 정책 하나를 만들 때도 물어야 한다. 이 제도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절차를 이용하기 어려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처분으로 가장 큰 피해를 입으면서도 항의하기 어려운 사람은 누구인가. 이 질문을 하지 않으면 행정은 결국 가장 조직화된 사람들의 목소리를 시민 전체의 목소리로 착각하게 된다. 그리고 조용한 사람들은 정책의 바깥으로 밀려난다.

      정치도 마찬가지다

      정치인은 표를 본다. 조직을 보고 여론을 살핀다. 집회에 모인 숫자와 인터넷의 반응에도 민감하다. 그러나 정치가 정말 필요한 곳은 오히려 조직되지 않은 사람들의 자리다. 노동조합도 없고, 협회도 없고, 변호사도 없고, 언론에 호소할 방법도 없는 사람들. 정치가 이들의 목소리를 듣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조직된 이해관계의 경쟁으로 축소된다. 정치는 목소리가 큰 사람들의 요구를 중계하는 직업이 아니다. 말하지 못하는 사람의 이해까지 찾아내어 공동체의 결정에 반영하는 것이 정치의 책임이다.

      언론과 시민사회도 자유롭지 않다

      언론 역시 목소리가 큰 사람에게 끌리기 쉽다. 보도자료를 보내는 기관, 기자회견을 여는 단체, 영향력 있는 인물의 발언은 기사화하기 쉽다. 그러나 강도 만난 자는 보도자료를 쓰지 못한다. 카메라 앞에서 자신의 억울함을 논리적으로 설명하지 못할 수도 있다. 그렇다면 언론은 기다리기만 해서는 안 된다. 찾아가야 한다.

      시민사회도 마찬가지다. 시민사회가 지원사업과 행사와 조직 유지에만 몰두하면서 정작 홀로 행정의 벽 앞에 선 시민을 발견하지 못한다면 ‘시민’이라는 이름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선한 사마리아인은 길가에 쓰러진 사람에게 회원가입부터 요구하지 않았다. 그가 어느 편인지 묻지도 않았다. 먼저 사람을 보았다.

      교회는 말하지 못하는 이웃을 보고 있는가

      교회 역시 이 질문에서 벗어날 수 없다. 한국교회는 이웃사랑을 설교한다. 그런데 교회가 발견하는 이웃은 누구인가. 교회로 찾아와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만 이웃인가. 아니다. 예수의 비유에서 중요한 것은 강도 만난 사람이 사마리아인을 찾아간 것이 아니라 사마리아인이 강도 만난 사람을 발견했다는 사실이다.

      이 차이는 크다. 이웃사랑은 요청에 대한 응답에만 머물지 않는다. 말하지 못하는 고통을 발견하는 능력까지 요구한다. 행정처분 앞에서 무너진 영세상인, 복잡한 법률문서를 이해하지 못하는 노인, 소송비용이 없어 권리를 포기한 시민, 조직의 힘 앞에서 혼자 목소리를 삼킨 노동자. 그들이 오늘의 강도 만난 자일 수 있다.

      침묵을 깨우는 제도가 필요하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모든 시민에게 더 용감해지라고 요구해서는 안 된다. “권리는 스스로 찾아야 한다”고 말하는 것으로도 부족하다. 사람을 강하게 만드는 것만큼 제도를 덜 잔인하게 만드는 일이 중요하다. 행정기관은 중요한 불이익 처분을 할 때 시민이 실제로 내용을 이해했는지 확인할 필요가 있다. 취약계층에게는 권리구제 절차를 보다 쉽게 설명해야 한다. 법률지원과 공익변호의 접근성을 높이고, 반복되는 민원과 분쟁은 개인의 불평으로 치부하지 말고 제도 자체의 문제인지 점검해야 한다. 국민권익위원회, 지방자치단체의 시민고충처리기구, 법률구조기관과 시민사회도 시민이 찾아오기를 기다리는 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갈 필요가 있다. 중요한 것은 하나다. 권리구제의 책임을 피해를 입은 시민에게만 떠넘겨서는 안 된다.

      다수의 침묵은 언제나 옳지 않다

      민주주의를 다수결과 동일시하면 또 하나의 함정에 빠진다. “대부분 아무 말 하지 않는데 왜 몇 사람만 문제를 제기하는가.” 이 말은 매우 위험하다. 역사에서 수많은 부당한 제도는 다수가 침묵하는 동안 유지되었다. 침묵은 찬성이 아니다. 그리고 소수의 문제 제기는 공동체를 괴롭히는 소음이 아니라 공동체가 놓치고 있는 위험을 알리는 경보음일 수 있다. 한 사람의 문제 제기가 틀릴 수도 있다. 그러므로 검증해야 한다. 그러나 한 사람뿐이라는 이유로 무시해서는 안 된다. 민주주의는 다수의 목소리를 존중하지만 동시에 다수의 힘으로부터 한 사람의 권리를 보호하는 체제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투표하지 않았다

      여리고 길에 세 사람이 지나갔다. 제사장도 있었고 레위인도 있었으며 사마리아인도 있었다. 만약 다수결을 했다면 어떻게 되었을까. 두 사람은 지나갔고 한 사람만 멈췄다. 숫자로만 보면 지나가는 것이 다수였다. 그러나 예수는 다수의 행동을 정답이라고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한 사람에게서 이웃의 모습을 발견했다. 이 장면은 오늘의 민주주의에도 강렬한 질문을 던진다. 다수가 외면한다고 해서 외면이 정의가 되는가. 민주주의는 숫자를 존중해야 한다. 그러나 숫자가 인간의 존엄보다 앞설 수는 없다.

      민주주의의 수준은 가장 작은 목소리에서 드러난다

      강한 사람은 자신의 권리를 지킬 가능성이 높다. 돈이 있는 사람은 전문가를 구할 수 있다. 조직이 있는 사람은 집단으로 대응할 수 있다. 영향력이 있는 사람은 권력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전달할 수도 있다.

      그래서 민주주의의 진짜 시험은 그들이 아니다. 아무런 힘이 없는 한 사람이 행정기관 앞에 섰을 때다.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주는가. 충분히 설명해 주는가. 잘못된 결정을 다시 검토하는가. 돈이 없더라도 권리를 구제받을 길이 있는가. 그리고 그가 끝내 말하지 못했을 때조차 누군가 그의 고통을 발견하는가. 여기에 민주주의의 수준이 드러난다.

      그래서 민주주의는 행정기관만의 과제가 아니다. 대학본부도, 노동조합도, 교회도, 시민사회도 자신이 가진 힘을 끊임없이 돌아보아야 한다. 권력은 시장실과 관공서에만 존재하지 않는다. 사람의 말문을 막을 수 있는 힘이 생기는 곳에는 어디든 권력이 생긴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그 힘을 가진 조직이 가장 작은 목소리 앞에서 얼마나 자신을 절제하는가에서 시험받는다. 민주주의의 수준은 목소리가 큰 사람을 얼마나 잘 듣느냐가 아니라, 목소리를 낼 힘조차 잃은 사람을 어떻게 발견하느냐에서 드러난다.

      다시 강도 만난 자 앞에서 ⑦회에서는 강도 만난 자가 오늘날 길가에만 쓰러져 있지 않다고 말했다. ⑧회에서는 행정의 벽 앞에서 쓰러진 사람도 강도 만난 자라고 했다. ⑨회에서는 법이 행정의 방패가 아니라 시민의 권리를 지키는 기준이어야 한다고 물었다. 그리고 이제 ⑩회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그 사람이 도움을 요청하지 못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그가 민원을 넣지 않았다면 지나갈 것인가. 그가 행정심판을 하지 않았다면 억울하지 않았다고 생각할 것인가. 그가 소송을 포기했다면 행정의 처분이 옳았다고 결론 내릴 것인가.

      아니다. 선한 사마리아인은 강도 만난 자가 자신을 불러 세웠기 때문에 멈춘 것이 아니다. 그가 먼저 보았기 때문에 멈췄다. 오늘 우리 사회에 가장 필요한 능력도 어쩌면 이것인지 모른다. 더 크게 말하는 능력이 아니라, 말하지 못하는 사람을 발견하는 능력. 더 많이 주장하는 힘이 아니라, 혼자 쓰러진 사람 곁에 멈추는 힘. 그리고 그 한 사람의 침묵 속에서 공동체 전체의 문제를 읽어내는 힘이다. 예수는 오늘도 묻는다. “누가 강도 만난 자의 이웃이 되어 주었느냐.” 민주주의도 같은 질문을 해야 한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돌아선 시민에게 우리는 어떤 이웃이었는가.” 시민의 침묵은 동의가 아니다. 때로 그것은 도와달라는 말조차 할 힘을 잃었다는 마지막 신호다. 그 신호를 발견하는 사회가 민주주의이고, 그 사람 곁에 멈추는 공동체가 이웃이다.
    Copyrights ⓒ 주간시민광장 & www.gohuman.co.kr, 무단 전재 및 재배포 금지
  • 확대 l 축소 l 기사목록 l 프린트 l 스크랩하기
최신기사
         신문사소개  |   시민사회재단 소개  |   보도자료등록  |  개인정보보호정책  |  청소년보호정책  |  오시는길
대표자: 조종건 | 상호: 시민사회재단 | 주소: 경기도 평택시 비전4로 175, 708-202 | 신문등록번호: 경기도 아52894 | 등록일자 : 2021-05-18 | 발행인/편집인: 조종건 | 편집장:조종건 | 청소년보호책임자: 조종건 | 전화번호: 010-7622-8781
이메일: master@gohuman.co.kr
Copyright © 2021 주간시민광장. All rights reserved.